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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그렇고 그런 기억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

새 회사 첫 출근의 소감: 아뿔싸! 오늘 우울을 그만 깜빡했다.

by 은연주



새해 첫 회사에서 첫 출근을 마치고 퇴근하는 길. 그대로 홀로 텅 빈 집에 가기 아쉬워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친구는 새해 초부터 이미 야근이 확정인 상태였다. 엘리베이터를 타며 친구에게 첫 출근 소감을 말해줬다.

"응, 나 이제 퇴근해. 너 야근 많아? 아님 나랑 저녁 먹을래?“


농담 반 기대 없이 던진 말에 천사 같은 친구는 흔쾌히 짐 싸고 날 위해 퇴근을 했다. 태어나서 회사 처음 다녀보는 것도 아닌데 오랜만에 출근해서 상기된 나의 뻔한 이야기를 다정하게 끝까지 들어줬다. 그리고 새 출발 축하한다고 밥까지 턱 하니 사줬다. 카페에서 차도 마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더니 시간이 늦어졌다.




이 친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건진 갯벌 속 진주 같은 소중한 사람. 내 우울증 이야기, 새로운 보금자리 이야기, 새 회사는 어떤 것 같은지, 사무실 환경이나 팀 분위기까지 내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쏟아내고는 이번에는 친구의 이직 준비 이야기를 또 한바탕 했다.


역시 주로 일에 관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 회사에서 만난 친구이다 보니깐 아무래도 회사 이야기를 필두로 커리어, 근로자의 삶, 경제적 자유에 대한 갈망 등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편이다. 그러다가 내 입에서 문득 이런 말이 나왔다.

"니네 회사는 올해 뭐 신규 사업 있어?"


니네 회사라니. 전 직장을 퇴사한 지 아직 만 1년도 안 됐는데. 물론 회사라는 곳은 퇴사와 동시에 마법처럼 잊히는 쓸모없는 존재라서 헤어진 전 남자 친구만도 못하긴 해도, 이렇게 직접적으로 내 입에서 '니네'라고 선을 긋는 표현이 나오다니. 내가 말해놓고 나도 흠칫 놀랐다.




나는 결혼하고 해외로 이사 가느라 오랫동안 잘 다녔던 회사를 그만뒀지만, 친구는 아직도 같은 회사에 잘 다니고 있다. 그래서 그동안 아주 가끔씩 친구에게 전 직장 소식을 종종 전해 들을 때마다 나도 아직 한쪽 발은 찰랑이는 물에 살짝 담근 기분이었다.


적당히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 이전 직장의 신규 사업은 잘 되는지. 내게 더 이상 영양가 없는 이야기임에 틀림없는데 습관처럼 전 직장 소식이 궁금하기도 했다. 퇴사하면 다 남인걸 아는데도 내 기억세포의 일부는 여전히 거기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오늘 하루는 정신없이 지나갔다. 이전 회사에서 쓰던 업무툴과 똑같아서 새로운 시스템 적응하느라 고생할 시간은 벌었다. 덕분에 경력 이직 몇 번 해 본 N년차 직장인답게 나름 시니어 흉내도 내듯이 바로 업무 투입될 구상도 좀 했고, 어떻게 퍼포먼스를 낼까 프로젝트 고민도 했다. 무엇보다 이것저것 프로그램 깔고 노트북 세팅을 하니 하루가 그냥 뚝딱 지나갔다. 새해 첫날부터 시작된 낯선 새 환경에 새로운 사람들.


출근해서 근로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나니 이제야 정말 나는 전 직장의 옷을 벗고 새 옷을 입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친구에게 "니네 회사"라는 말이 나온 걸까.




아직 새로운 팀원들 이름도 다 외우지 못했고, 지하철 몇 번 칸에서 내려야 최소 걸음으로 회사까지 도착하는지 최대 효율을 몸에 익히지도 못했다. 프린터 설치는 했지만 시험 인쇄를 해보지 못해서 내일은 출근하면 아침부터 그것부터 해야 한다.


그래도 이렇게 새로운 환경에 몰두하느라 오늘은 미처 우울을 깜빡했다. 우울할 겨를이 없었다. 남편 따위는 생각나지도 않았고, 내게 닥친 새로운 업무들부터 해치우느라 슬퍼하느라 눈시울이 붉어질 틈이 없었다.




그럼 나 조금은 희망을 가져도 될까? 나도 모르게 전 회사가 '니네 회사'가 됐듯이, 이렇게 살다 보면 언젠가 지금의 내 아픔도 남의 아픔처럼 무색해지는 날이 올까. 남편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도저히 내가 수습하지 못할 복잡한 감정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까.


그는 내게 '죽었는지 살았는지 관심도 없는 전남편'이 될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남편을 그리워하지도 않았으면 좋겠고 미워하지도 않았으면 좋겠고 슬프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더 이상 내가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니깐 나는 오늘 나의 첫 출근이 너무 대견하고 고무적이다.


이 세상에 모든 회사는 어차피 다 거기서 거기고, 좋은 회사, 나쁜 회사는 없다는 걸 아는데도. 오늘만큼은 새 회사가 너무 좋다. 부디 사람들이 내게 남자친구 있냐고, 결혼은 했냐고 안 물어봤으면 좋겠다. 물어볼 거라면 최대한 늦게 물어보면 좋겠다. 제발 부디 내일도 잘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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