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에서 정말 대운의 교운기가 있다면 제일 잘 걸러진 건 '너'야.
사주를 믿지도 않고 안 믿지도 않는다. 심심하면 가끔 재미로 본다는 소리다. 5만 원 정도 선에서는 돈 내고 사주 본 적이 몇 번 있다. 아예 안 믿었으면 돈 내고 사주 볼 일도 없고, 정말 믿었으면 사주대로 뻔하게 살고 있겠지. 사주 몇 번 봐보니 하는 얘기들이 큰 틀에서는 항상 거의 비슷했다. 요즘 유행하는 MBTI랑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고로 사주는 운명이 아니고 성격이구나, 성격이 팔자라는 결론을 내렸다.
내 사주에는 2022년, 2023년이 결혼운 길하고 강한 시기라고 나와있다. 한두 군데서 들은 얘기가 아니다. 심지어 옛날에 전 남자친구와의 궁합을 맞춰봤을 때는 '이 사람은 아니야, 얘는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고 니 결혼운은 22년, 23년에 들어와. 그때 결혼해야 잘살아'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럼 혹시 이혼수는요? 이혼수 같은 건 없어요? 이혼수를 물어보면 내 나이 60대쯤 한 번 있다고 했다. 애초에 내가 결혼 안 해도 잘 먹고 잘 살 팔자라서, 그때 가면 이제라도 내 인생 찾겠다며 남편을 떠날 수 있는 시기라고 했다.
재미로 듣는 얘기니깐 어차피 그 말이 사실이어도 별로 상관없을 것 같았다. 환갑 지나면 지겨워서 혼자 살고 싶어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자식이 성인 되고 나서 이혼하는 거면 요즘 말로 축하받으면서 졸혼하는 거 아닌가 생각했다.
가만 보자, 그러고 보니 사주대로 2023년에 결혼하기는 했다. 그런데 결혼하자마자 이렇게 힘든 일이 생길 거라는 얘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남편과의 궁합은 괜찮은 편이라고, 이 정도면 70점이라는 말들을 들었다.
남자 성격이 너무 세고 자기중심적이라서 여자가 평생 참고 살아야 된다는 말도 들어보긴 했지만, 어차피 원래 결혼이라는 것 자체가 다른 사람을 참고 맞춰가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해서 흘려 들었다.
작년 힘든 일을 겪으며 나는 여전히 사회를 거의 손절하다시피 잠수 탔다. 보고 싶은 친구들이 너무 많지만 아직 용기가 안 난다. 내게 선뜻 연락해 주는 따뜻한 손길에 보답할 준비가 안 되어서 미안함이 들지만 어쩔 수 없다.
그중 한 친구가 먼저 내게 무슨 일이 생긴 지 말 안 해도 대충 다 알겠다며, 너 괜찮냐고 아는 척을 했다. 나는 그녀를 평소에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와 역시 친한 친구는 말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다 아나보다, 혼자 감탄을 했다. 그리고 직접 만날 기회가 생겨서 내게 어떤 일이 생겼는지 다 털어놓았다.
근데 내 얘기를 다 들은 그녀가 갑자기 쌍시옷이 들어간 비속어를 섞어가면서 내 시댁을, 내 남편을 욕하기 시작했다.
"미친 거 아니야? 니 인생 망쳐놓고! 너 이제 인생 망했는데! 너네 시부모님도 존X 이기적이야. 니 인생 망쳐놨잖아. 빨리 소송해도 시간 아까운데 지금, 너 뭐 하고 있는 거야? 시어머니랑 밥 먹고 연락한다고? 너도 미친 거 아니야? 나였으면 당장 변호사 불러서 소송할 텐데. 니 인생 망했어, 정신 차리라고!"
어차피 내 사연을 알고 있는 다른 친구들이 워낙 몇 명 없어서 표본이 작지만 이런 반응은 난데없었다. 내 상황을 다 알고 있는 친구들은 모두 내가 너무 힘들었을 걸 알고 많이들 울었다. 꼭 울어야 된다는 건 아니지만 내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해 줬다. 그리고 남편의 상태와 나머지 가족들을 걱정하고 안타까워해 줬다. 남편을 욕한 친구들은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정말 이상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얘는 내 친구가 아니었구나. 내게 불행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렸구나, 내 인생이 망했다고 간절히 믿고 싶은 거구나'
내가 맨정신으로 감당하기 벅찬 일이 벌어진 건 틀림없고, 한 순간에 무너져서 각종 정신병에 시달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반년 간 항우울제를 복용해 오면서도, 죽고 싶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하면서도, 절에도 들어가 보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보면서도 내 인생이 망했다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래서 친구라고 믿었던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들었을 때 등골이 서늘해졌다.
앞으로 이혼을 하게 되면 '평범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일'까지 결혼 전보다 더 멀어지고, 오히려 가시밭길이 되기는 하지만 그마저도 내가 재혼을 결심했을 때나 생기는 문제일 뿐이다. 이혼한다고 인생이 망하는 사람 아무도 없고, 더구나 결혼해 보니 정신이 온전치 않은 남편 때문에 내가 동정을 받으면 받았지, 남들한테 내 인생 망했다고 손가락질받을 일은 없다.
그렇지만 내 불행을 기다리고 있었던 악마 같은 사람과 얼굴 붉히고 따지고 들며 싸워서 내가 얻는 게 뭐가 있을까. 어차피 지금이라도 정신 차렸으니 조용히 손절하면 그만인 일이었다. 그래서 그 말을 듣고 화를 낼까, 정색을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타이밍을 놓쳐서 어색하게 설명을 더 늘어놓았다.
"아니 나는 시부모님이 이기적이라는 생각은 안 드는데. 내 남편이 진짜 아픈 거라서 나는 남편한테 연민도 느껴. 뭐 바람피우거나 두 집 살림한 것도 아니고. 그리고 시부모님은 남편도 나도 똑같은 자식이니깐 오히려 더 힘들고 안타까우실 것 같은데. 굳이 내가 미워할 대상을 꼽으면 남편 하나뿐인데, 남편탓해서 지금 당장은 괜찮아도 나중에..."
갑자기 그녀가 내 이야기를 가로채고 말을 끊었다.
"야 나한테 구구절절 변명하지 마. 네가 뭐라고 설명해도 내 생각은 안 바뀌어. 난 솔직히 오빠 그럴 줄 알았다. 너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너네 시부모님도 미친 사람들이고, 니 남편은 진짜 미친놈이고. 너 인생 망했어, 지금 너 손해 본 게 얼마나 큰지 몰라? 결혼식 비용부터 니 커리어 끊긴 거에, 이혼녀 되는 니 이미지? 정신 차리고 빨리 싸워. 나라면 소송해. 개같이 싸워. 미친 거 아니야? 너 지금 망했어.“
내가 왜 변명을 하겠어. 그것도 너한테. 내 인생이 안 망했는데 나랑 상관도 없는 너한테 망했니 안 망했니 변명을 해서 뭐 해. 나도 우리 가족도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네가 알았다고? 그렇게 되길 바랐던 거겠지.
그때 갑자기 10년도 더 넘은 옛날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천송이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내가 이번에 바닥을 치면서 기분 참 더러울 때가 많았는데 한 가지 좋은 점이 있다? 사람이 딱 걸러져. 진짜 내 편과 내 편을 가장한 척. 인생에서 가끔 큰 시련이 오는 거, 한 번씩 진짜와 가짜를 걸러내라는 하느님이 주신 큰 기회가 아닌가 싶다."
나는 사주에서 올해부터 10년 대운이 바뀐다. 그리고 대개 대운이 바뀌기 직전 해를 교운기라고 부른다. 교운기는 도무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벌어지거나 인연이 다한 사람들이 끊어지고 떨어져 나가는 시기. 인생의 챕터가 바뀌면서 두 세계가 충돌하는듯한 혼란스러운 시기.
만약 작년이 내게 엄청난 교운기였다면 내 인생에서 가장 행운은 너의 진짜 모습을 알아본 것. 너는 내 인생이 망했다고 믿고 싶겠지. 내가 스스로 내 인생이 망했다고 자책하고 괴로워하며 더 크게 망가지길 기다렸겠지.
많이 아프고 힘들긴 해. 근데 나는 한 번도 내 인생이 망했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 그래서 니 배가 그렇게 아팠나 보다. 그렇게 발작 버튼이 눌려서 네가 먼저 되지도 않는 트집을 잡고 절교를 외쳐줬으니 말이야.
네가 마지막에 그랬지. "네가 겪은 일은 진심으로 유감인데, 이건 이거고 그건 그거로 별개잖아. 내가 절대 너의 힘든 일을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거나 하진 않을 테니 걱정 마"라고.
나는 너랑 절교하는 그 순간에도 네가 혹시 내 아픔을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면 어떡하지 이런 고민은 미처 하지도 못했어. 그래서 그것도 고마워. 네가 먼저 여기저기 다 말하고 다닐 거라고 광고해 줘서. 티 내줘서 고마워. 그리고 네가 말하고 다녀도 나는 괜찮아. 더럽혀지는 건 너지 내가 아니니깐. 그럼 망한 것도 내가 아니라 누군지 더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여동생은 내게 한마디 했다. "언니, 나는 그 언니가 옛날부터 언니 부럽다고 할 때부터 의심스러웠어. 그 언니가 맨날 언니 성격 좋아서 부럽다느니, 예뻐서 부럽다느니 그랬잖아. 가만 생각해 보면 부럽다는 말 입 밖으로 많이 내뱉는 사람들은 질투가 많고 열등감이 많은 거야. 자격지심이야 그거 다. 앞으로 주변에 언니한테 부럽다고 말하는 사람 또 있으면 차라리 미리 손절해 버려“
내 인생에 필요 없는 악연이 알아서 제거된 것만으로도 작년의 수확은 충분히 값지다. 그런 의미 없는 인연을 싼 값에 걸러낸 것만으로도 새해 출발이 한결 산뜻하다. 그러니 올해는 소중한 사람들로만 가득 채우는 해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