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하며 생각한 것 7

by 글 짓는 은용이

“벗”이라 부르면 동무요 친구. “자식”이라 말하면 짝과 내가 낳은 아이. “자식새끼”라 이르면 짐짝.

“벗”으로 불러야 그와 내 어깨가 나란해집니다. 일컫는 대로. “자식새끼”일 것 같으면야 한집에 살 까닭··· 있을까요.

“자식”도 귀에 좀 거슬립니다. 왠지 “내가 낳고 기른 녀석 내 맘대로”라고 여길 성싶어서. 유전자 절반을 줬을 뿐 내가 낳지도 않았는데 ━ 짝이 열한 시간이나 진통한 끝에 낳았는데 ━ 내 맘대로라니.

안 될 말입니다. 오래전부터. 덩치 작은 친구지만 얼마든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할 수 있었으니까. 몸집 비슷한 지금도 그렇고.

어릴 적 벗이 쓰던 젖병이 생각났습니다. 닦기 까다로운데 허투루 씻을 수 없던 병. 우유나 물 마실 때 물고 빨던 거. 닦는 손길에 내 마음 묻어 벗에게 건너가는 듯싶었죠. 말할 것도 없이 자취가 남진 않았습니다.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야?”

2008년 십일월. 여덟 살이던 벗이 갑자기 물었습니다. 내 팔 베개 삼아 누운 채. 나는 금세 대답했죠. “⭘⭘”라고. 머뭇거릴 게 없었습니다.

해죽해죽. 웃는 벗에게 나도 물었어요. “⭘⭘는? 누구를 가장 좋아하는데?”

“······.”

곰곰. 한참 머뭇머뭇하더니 벗은 말했습니다.

“엄마.”

“······.”

“그러게 평소에 ⭘⭘랑 많이 놀아 줬어야죠!”

하하하하하. 나는 목젖 열고 웃었습니다. 벗 귀여워서. 이제 스물한 살 된 그 친구는 나와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죠. 나중엔 앞서갈 테고.

2018년 일월 큰노꼬메 아래. 앞서 걷는 벗 뒤선 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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