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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댓바람 러닝셔츠와 통굽 슬리퍼

<밥풀을 긁어내는 마음으로> 172쪽 ~ 176쪽

by 글 짓는 은용이

순옥과 명선이 셋집을 큰길 ━삼양로━ 건너편 쌍문동 안쪽 깊숙한 곳 주택 2층으로 옮겼습니다. 백운 시장과 덕성여대 사이 언덕바지인 데다 1층 주인집 마당을 가로지른 뒤 가파른 철 계단까지 밟고 오르느라 숨 가쁜 집. 수고로웠되 2층 베란다에 올라서 눈길 돌리면 저 멀리 북한산 꼭대기 흐름이 자근자근 밟히는 곳이었죠. 다 좋았어요. 언덕배기 새소리에 솔바람 소리까지 들렸으니까. 강파른 철 층계는 빼고.

아침 잠결에. 순옥이 뭔가 끓이는 소리와 냄새. 명선은 이미 출근한 성싶고. 당신 귀빠진 날이라 동네 친구 여럿과 나눠 먹을 떡 하러 방앗간에 간다··· 하는 순옥의 어머니. “응. 엄마, 조심하셔어”라는 듯싶은 순옥 말 어렴풋.


쿵.


······.


솔바람 숨죽였고. 새까지 놀랐을까. 고요.


미심쩍은 소리에 후다닥 베란다로 나선 순옥. “엄마!” 우당탕퉁탕 철 계단 내려밟는 소리. “엄마, 엄마!” 울음까지.


꿈결 깨고 벌떡 일어난 나. 후다닥 우당탕퉁탕 마당으로 내려가 순옥의 어머니를 등에 업었습니다. 의식 잃은 그의 귀에서 피가 조금 흘러나온 게 보였죠.


문 두드려 만난 동네 의원 의사는 “머리 안에서 뭉치지 않고 출혈이 있어 그나마 다행”인데 의식이 돌아오지 않으니 “빨리 병원으로 가라” 했습니다. 그가 미리 전화해 둔 병원은 미아동 신일고등학교에 못 미친 곳. 순옥은 몹시 급한 나머지 구급차 아닌 택시를 잡았죠. 나는 순옥의 어머니를 등에 다시 업었고. 빨리 움직인 덕이었을까. 순옥의 어머니는 병원 응급실에 잘 닿아 더 큰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나는 바짝 움츠렸던 힘줄과 살과 마음과 숨을 조금 텄죠. 가만 보니 순옥도 숨 좀 돌린 듯했어요. 나는 그에게 다가가 말했죠. “숙모, 저 오늘 오전 수업 있어서 학교 가야 하는데···.”


“어, 그래. 고생했다. 어서 가.”


순옥은 숨 좀 돌렸되 여전히 근심에 잠겨 목소리가 무거웠습니다. 내가 그에게 “학교에 가야 한다”고 말한 본뜻을 헤아리지 못했어요. 나는 놀란 그가 마음을 잘 가다듬도록 조심스레 말했죠. “(여기서 집에 갈) 버스비 좀 주세요.”


천 원짜리 한 장 손에 쥔 나는, 병원을 나서기 전 화장실 거울 앞에 섰습니다.


아이고오. 오른쪽으로 누워 자 버릇하더니 어김없이 옆머리와 뒤통수 사이에 새집을 지었더군요. 이런. 하얀 러닝셔츠만 입은 채였죠. 민소매인 데다 오른쪽 겨드랑이 아래쪽이 축 늘어진. 제길. 잠옷으로만 쓰던 하얗고 큰 테니스 반바지는 늘 허리 아래 엉치뼈에 걸치더니 어김없이 내려가 있더군요. 으아, 이건, 이건 안 돼. 내 발이 순옥의 통굽 슬리퍼를 꿰고 있지 뭡니까. 길이가 짧고 굽이 높아 내 뒤꿈치는 허공에 떠 있고. 쿵 하는 소리와 순옥 울음소리에 놀라 후다닥 뛰쳐나오며 아무거나 꿴 게 어찌하여 꼭 그 슬리퍼였는지. 아이고오.


‘이 차림으로 버스를 어떻게 탈 것이며, 이 차림으로 집까지?’


미칠 노릇. 동네 의원에서 병원으로 옮겨 갈 때 눈곱을 살짝 떼긴 했지만 이건 도무지. 안 될 말이었습니다. 머뭇머뭇. 병원 밖으로 나와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걷다가 ‘안 되겠어. 택시비 달라고 해야겠다’ 싶어 되돌아갔죠. 한데 응급실 앞에 웅크리고 앉은 순옥을 먼발치로 다시 보니 내 입이 떨어질 리 없겠더군요.


그냥 가야겠다 마음 다졌습니다. 굳게. ‘길거리 사람들은 알 거야. 저 친구 무슨 일 있었나 보네. 그것도 큰일. 아침나절에 어찌 저리 돌아다닐 수 있겠어’라고 다들 잘 알아줄 거라고 나는 믿었죠. 음. 고개 빳빳이 들었어요.


버스. 탔습니다. 빨리 사람 눈길로부터 벗어나는 게 좋겠지만 너무 잽싸면 되레 붙들리겠기에 천천히 버스 맨 뒤로 갔죠. 그리 갔는데. 천천히 그리 갔는데. 앉을 만한 자리는 하나도 없고, 맨 뒷자리에 앉아 있던 ━내 또래 학생인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낯모를 친구가 눈동자를 조금 넓히나 싶더니 오른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기어이··· 웃더군요. 쿡. 쿡쿡. 나는 뭐, 괜찮았습니다. 버스 손잡이 잡은 오른팔로 얼굴을 조금 가렸다 싶은 게 그나마 좋아(?) 창밖만 봤으니까.


서너 정거장 만에 수유역. 이런. 제길. 아침 첫 수업 가는 덕성여대 친구들이 우르르. ‘하아,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나는 뭐, 꿋꿋이 서 있었습니다. 창밖만 보며. 여기 쿡, 저기 쿡쿡했을 뿐 왁자하진 않았거든요. 덕성여대 앞에서 그 친구들 우르르 내린 뒤 창밖 까르르 소리 들리고 맨 뒷자리도 함께 빌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나는 알지 못했죠. 다음 정거장에 내려 언덕바지 집까지는 또 어찌 걸어갔는지 이제는 기억이 흐릿합니다. 버스 안이 워낙 뜨거웠던 터라 그 뒤로 마주친 동네 사람 눈길이야 뭐,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예요. 골목길로 접어들고 나서는 나도 자꾸 히죽히죽했고. 어이없고 재미있어서. 아하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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