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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구직 급여 6만 6000원

서울서부고용지원센터에 네 번 갔다

by 글 짓는 은용이


#1 공덕역 1번 출구. 2025년 3월 6일 오전 열 시 삼십 분께. 길가 플라타너스 성긴 가지가 을씨년스럽되 봄 곧 올 낌새가 마땅히 뚜렷했다. 나무 옆 표지. 왼쪽으로 발길을 돌려야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서울서부지청에 닿을 거라고 가리켰다.


일자리 잃은 걸 알리러 가는 길. 마땅히 실업을 인정받을 것으로 짚었되 세상일이 어디 늘 뜻대로던가. 나는 지청 앞까지 9분쯤 걸으며 내가 일자리를 잃은 까닭을 조용히 곱씹었다. 지청에서 왜 일자리를 잃었느냐고 물어볼 테니까. 오가는 사람 얼굴이 어두워 보인 건 내 마음 탓이었고.


지청 4층 서울서부고용지원센터 상담 창구. 나는 “임기 만료”라 했고, 창구 담당자는 ‘계약 만료’로 알아들었을 터.


#2 센터에 다시 가 실업을 인정받았다. 2025년 3월 20일 오전 아홉 시 삼십 분께. 한 시간쯤 ‘구직 급여’ 수급 교육을 받았고 ‘꿈을 응원하는 (고용노동부) 취업드림수첩’을 손에 쥐었다. 한국 노동 복지 짜임새 안에 선 건 처음. 고용노동부는 그달 13일부터 20일까지 8일 동안 내가 일을 잃었되 구직 급여 교육을 받으러 센터에 간 걸 새 일터를 찾으려 애쓴 것으로 보고 52만 8000원을 줬다.


52만 8000원 나누기 8일, 하루 6만 6000원꼴. 모두 더해 210일 동안 구직 급여를 받을 수 있되 달마다 새 일터를 얻으려 애쓴 걸 한두 개씩 내보이는 조건. 나는, 한두 개씩은 말할 것도 없고 열 차례씩 백 번이라도 움직일 수 있겠으되 구직 급여에 기대어 차분히 내게 걸맞은 일을 찾기로 했다. 내게 가까운 일. 넉넉히 땀흘릴 수 있을 노동.


▴2025년 3월 6일 서울서부고용복지센터 상담 창구 앞(왼쪽)과 공덕역 1번 출구 앞(가운데). 오른쪽은 2025년 6월 12일 서울서부고용복지센터 상담 창구 앞.


#3 또 공덕역 1번 출구. 2025년 6월 12일 오전 아홉 시 삼십 분께. 플라타너스 이파리가 제법 우거졌다. 코앞에 비 내릴 여름 냄새 물씬했으니까. 나무 옆 서울지방노동고용청 서울서부지청 표지를 다시 바라보진 않았다.


3월 21일부터 이날까지 3개월여 동안 달마다 26일 치 구직 급여 171만 6000원을 받았다. 78일간 514만 8000원. 4월과 5월 사이 내게 가까울 것으로 여긴 일터 면접이 두 차례 있었지만 나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영화 <어쩔 수가 없다> 속 ‘만수’가 호기롭게 말한 “삼 개월 내 재취업”은··· 쏜살같았다.


▴2025년 9월 4일 공덕역 1번 출구 앞(왼쪽)과 서울서부고용복지센터 상담 창구 앞.


#4 서울서부고용지원센터 상담 창구. 2025년 9월 4일 오전 열 시 이십칠 분께. “10월 10일, 그다음엔 끝나는 거예요.” 창구 담당자 말꼬리엔 붙잡을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애초 10월 8일이었던 내 구직 급여 수급 기간이 끝난 것. 8일은 추석 연휴 끝이었기에 10일 실업 인정을 거쳐 13일 224만 4000원을 받았다. 9월 5일부터 10월 8일까지 34일간 실업한 채였되 새 일자리를 찾아 애쓴 걸 인정받아 받은 돈. 마지막 구직 급여. 정말 “그다음엔 끝나는 거”였다.


모두 더해 204일 동안 1346만 4000원. 7개월로 나누면 다달이 192만 3428원쯤. 퇴직 전 3개월 평균 임금의 60%를 기준으로 삼되 하루 6만 6000원으로 ‘상한 모자(샐러리 캡)’를 씌운 것이었기에 가족 기존 생계에 크게 모자랐다. 2025년 최저 임금 ‘월 209만 6270원’보다도 적었지만 얼마간 숨 가다듬고 새 일터를 찾아 나설 때 쓸 만큼은 됐다. 버틸 만했다는 얘기. 이 돈에 3년 7개월 치 언론노조 민주언론실천위원장 퇴직금을 더해 생계를 잇기도 했으니까.


2025년 11월. 지난 3월부터 8개월쯤 이어진 내게 걸맞은 새 일터 찾기. 나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해 본 적 없는 데다 받을 임금을 크게 낮춘 일터까지 두드려 봤으나 모두 미끄러진 것. 몇 차례 서류 전형을 넘어 면접에 닿기도 한 걸 보면 그동안 짚은 ‘내게 걸맞은 새 일터 찾기’가 모두 터무니없는 곳은 아니었던 걸 방증했지만 끝내 미끄러지고 말았다.


1995년 4월 1일부터 29년 10개월 동안 이어진 언론 노동 이력. 만 56세. 오십 대 한국 노동자 발걸음이 무겁기 때문이었을 터. <어쩔 수가 없다> 속 ‘만수’처럼 재취업하기가 녹록지 않다. 만수는 총을 들었지만 나는 구직 급여 하루 6만 6000원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나마 ‘어쩔 수’ 있던 버팀목. ‘만수’ 손에도 총 말고 구직 급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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