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 나는 제주
“선배, 휴가 어디로 가요?”
Y가 내게 물었다. 1997년 팔월 여름 한낮. 이튿날 자 신문에 담을 기사 원고를 얼추 추슬렀을 때.
“휴가? 어··· 왜?”
“아니, 그냥··· 궁금해서요.”
나는 그쯤에서 입 다물지 못했다. 그가 물었으니. 별생각 없이 말해 줄밖에.
“제주에 가려고. 한 번도 가 본 적 없어서.”
“같이 갈까요?”
앗, 이 무슨. Y는 머뭇거릴 까닭 없는 양 파고들었다. 나는 허 찔린 듯했고. 입 벌렸되 달싹달싹 뭐라 말하지 못한 채 열한 시 방향에 앉아 있는 Y를 바라만 봤다. 웃는 듯 마는 듯.
“잠깐 얘기 좀 하시죠.”
Y가 자리를 뜨며 나를 편집국 밖으로 불러냈다. 그를 따라 의자에서 엉덩이 뗀 나는 곧바로 느껴 알았다. ‘아, 무섭네. 이거 아무래도 같이 가야 할 얼개다.’
“근데에··· 한 부서에서 이삼 년 차가 한꺼번에 휴가로 빠져나가기 어렵지 않겠어?”
거의 마지막 버팀. 나는 그게 좋은 수가 될 거라 여겼다. Y도 어쩔 수 없을 묘수. 하, 지, 만. 그는 강력했다.
내가 제주에 들어가는 날로부터 자기 휴가일을 사흘만 겹치게 하겠다는 것. 사흘쯤은 기획 기사 한두 꼭지로 덮을 수 있지 않겠느냐며. 내게도 기획 기사 한두 꼭지 마련해 두면 사흘쯤 함께 사라져도 괜찮을 거라고. 더도 말고 사흘만. 그때 나는 거듭 느껴 알았다. ‘하하, 무섭네. 이거 꼼짝없이 같이 가야 할 얼개다.’
Y는 1996년 삼월, 내가 이 년 차로 접어든 신문사에 들어왔다. 이듬해 같은 부서에서 땀 흘리게 됐고. 그는 팔륙 학번, 나는 팔칠. (같은 학교를 다닌 건 아니었다.) 나이도 Y가 한 살 많았는데 신문사에서 뒤집혔다. 한반도를 병영으로 삼았던 일제가 뿌린 몹쓸 위아래 선후배 따지기. 그는 두세 손가락에 꼽는 전자 기업에서 오 년 동안 연구원으로 일하며 병역을 갈음했다. 그 회사 과장 될 무게를 박차고 신문기자가 된 터라 곧고 단단했다. 하여 나는 Y를 보며 배운 게 많았고. 특히 그가 쓴 기사 속 ‘특히’가 꼭 알맞고 보기에 좋아 나도 즐겨 썼다.
한때 Y는 노동조합 사무국장, 나는 위원장. 우리는 오랫동안 가까웠고 이것저것 따져 가며 머리와 힘 모았다. 특히. 뒷날 내가 신문사와 홀로 맞섰을 때 그가 함께했다면 어땠을까. 앞서 신문사를 떠난 Y가 못내 아쉬웠다.
나는 그가 좋았는데 좋은 마음 들머리쯤에 제주에 같이 가자 하니 어쩌랴. 함께 가기로 했다.
서울 지하철 9호선 신논현역 네거리. 1997년 팔월 17일 일요일 오전 열한 시쯤. (그때엔 신논현역은 말할 것도 없고 교보문고 강남점마저 없었다.) 지하철 2호선 강남역 쪽 갓길에서. Y와 Y를 짝으로 둔 이가 내 자동차에 올라탔다.
Y를 짝으로 둔 이를 본 건 처음. 나와 가볍게 인사 나눴고. 나를 짝으로 둔 이와도 얼굴 마주하며 두루 웃었다. 좀 어지러울 수 있겠는데 우리는 두 쌍. 그러니까 넷이었다. 제주에 같이 가자던 Y에게 나는 “친구와 함께 가기로 했다”며 첫 번째 버팀 수를 내밀어 봤지만 ━ Y가 알아서 물러서 주길 바랐는데 ━ 잘 먹히지 않은 것. Y는 천연스레 처음부터 넷이서 같이 가자는 뜻이었다며 눈을 빛냈다, 글쎄. 믿기지 않게도.
“내 차 말야. 프라이드라 넷이 타기엔 좀 작은데···. 멀리 오래 가려면 많이 힘들 텐데.”
은근히 내민 내 두 번째 버팀 수도 한 방에 무너졌다. “에이, 괜찮아요!”라는 Y 말 한마디에. 거의 마지막 버팀 수였던 ‘한 부서 이삼 년 차 기자가 한꺼번에 휴가로 빠져나가기’도 Y가 알아서 해냈고.
짝과 나는 갈데없이 Y와 Y를 짝으로 둔 이를 맞이했다. 즐겁게. 하하 진심으로.
강남역 지나 양재 나들목에서 경부고속도로에 올라섰다. 제주 그리며 남쪽으로. 처음 봐 낯설었지만 이십 대 후반 셋과 서른 된 Y는 금세 웃었다. 젊었으니까. 엠티 가듯 즐거웠고. (Y와 나만 즐거웠을 수도 있지만.) 금강 휴게소까지 내처 달렸다. 바삐.
한데 제주 간다더니 웬 경부고속도로? 금강 휴게소? 충청도에? 휴가 갈 곳 바꾼 거였을까.
배였다. 완도와 제주 오가는 배. 비행기 말고 배 타러 완도로 달렸다. 바삐. 오후 다섯 시께 뱃시간에 대려고. 자동차와 함께 제주에 닿는 게 몸 좀 더 가벼운 휴가가 될 듯해 짝과 내가 짠 흐름. 현기영 소설 <순이 삼촌> 속 ‘나’가 팔 년 만에 ‘허위허위 찾아가’려 더듬던 ‘수륙 천오백 리 길’이었다. 작은 차 깊은 숨 같은 거 꿈꾸며. 짝과 내가 품은 꿈에 Y와 Y를 짝으로 둔 이가 함께한 것.
그해 팔월 9일 태평양 서쪽 마셜제도에서 휘돌기 시작한 태풍 위니는 그달 12일 “오 등급 슈퍼 태풍”이 됐다고 들렸다. 가장 커졌을 때 2,350킬로미터를 뒤덮었고 눈 지름만 322킬로미터나 된다나. 위니가 한반도로 오지 않고 대만 오른쪽과 중국으로 뛴 터라 그달 17일 저녁나절 완도와 제주 사이 바다는 구름과 바람 있되 굽이치진 않았다. 해넘이 없되 숨 트여 ‘좋다’ 싶었는데 길이 어디 늘 마음 같던가.
바다는 끝내 녹록지 않았다. 세 시간 반쯤 나아가 제주 앞바다에 닿았지만 위니가 떠민 ‘풍랑주의보’ 때문에 완도로 가야 할 배가 항구에서 나오지 못했다. 그 배 난 자리 바라며 제주 앞바다에서 사십 분. 바다와 바람은 배 안 사람 가슴을 위로 훌쩍 들었다가 놓고 또 훌쩍 들었다가 놓았다. 울렁울렁. 견딜 만하던 삼십 분쯤 지나니 ‘이게 배멀미로구나. 어지럽다.’
김녕. 민박. 여름 성수기 지난 터라 마을에 방 빈 집이 많은 듯했지만 제주 앞바다에서 울렁인다, 배에서 차례차례 차 내린다, 어디로 갈지 정한다 한 바람에 깜깜해져서야 머물 곳을 구했다. 으아, 물은 어찌 그리 차가운지. “한라산에서 내려온 물”이라는 민박 주인장 자랑에 웃어 줄 생각 없이 “네에···” 하고 말았을 만큼 시렸다. 얼음이라도 낀 듯.
이튿날. 1997년 팔월 18일 월요일. 짝은 동굴을 싫어하지만 나와 Y와 Y를 짝으로 둔 이와 함께 만장굴에 들어갔다. Y와 Y를 짝으로 둔 이는 성산 일출봉에 오른 적 있지만 짝과 나와 함께 꼭대기에 다시 올랐고. 넷은 한라산 중산간에 얹힌 구름과 안개 속에서 서로를 번갈아 카메라에 담았다.
넷은 서귀포 안덕 화순에 두 번째 민박을 구하고는 철 지난 듯 아무도 없는 바닷가로 서둘러 나갔고 얼굴 치는 모래바람을 마음껏 맞았다. 위니가 떠민 풍랑주의보 덕에. 한라산에서 내려와 솟은 물 모아 둔 바닷가 안쪽 작은 수영장에서 퐁당거렸다. 웃으며. 팔월 19일 화요일. 넷은 천천히 제주 남서와 북서쪽 바닷가로 옹기종기 돌아 공항에 닿았다. 섬을 한 바퀴 돈 것. 공항에서 Y와 Y를 짝으로 둔 이가 내렸다. 안녕히. 짝과 나는 이호 바닷가로 갔고.
그땐 몰랐지만 짝과 나는 이미 깊숙이 빠진 거였다. 제주에. 처음 가 머문 나흘 동안 설렁설렁한 줄 알았는데 몸과 마음 죄다 물들었고. 마음 깊숙이 죄다 닿았되 몸 설렁설렁한 탓에 짝과 나는 오랫동안 헤맸다. 제주에서 해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