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 나는 제주
공항 남쪽으로부터 먹구름이 굴러왔다. 막 구물구물.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하늘 올려다보며 한숨짓는 내게, 구름이 ‘우린 바람에 떠밀렸을 뿐이야’ 하듯.
구름 등 떠민 건 프라피룬. 2000년 팔월 30일 ━ 상하이와 부산 사이를 날기 일 년쯤 전 ━ 수요일 오전. 중국에 걸쳐 숨 좀 죽었다던 태풍 프라피룬이 1초에 삼십오 미터까지 내달릴 만큼 다시 힘내더니 한반도로 뛰어온다 했다. 김포공항에서 한숨. ‘비행기 뜰 수 있으려나. 제주엔 바람 불기 시작했을 텐데. 아무 일 없이 잘 내려앉을 수 있을까.’
구름 위쪽 하늘은 걱정과 달리 판판했다. 구름 아래 제주로 내려갈 때에도 조용했고. 큰바람 앞둔 고요라 할까.
서귀포 이중섭거리에 닿아 잠자고 머무를 곳부터 다졌다. 큰바람 맞기 전에. 무엇보다 짝 몸 편하고 걱정 없이 좋아야 했으니까. 생긴 지 십팔 주째인 짝 배안 벗도 그렇고.
조용한 서귀 마을 시장. 차분한 서귀포 시민. 맛있는 장터 점심. 덕분에 고요한 짝과 짝 배안 벗 마음이 보였다. 내 숨도 함께 가라앉아 트였고.
“사십 년 만에 가장 센 바람이 온답니다. ◯◯으로 파도 구경 가세요.”
빌린 자동차 세피아를 건네러 온 이 말씀. 프라피룬 오니 어디에 가 뭘 할지 모르겠다는 내게 큰바람 파도를 보러 가라 했다. ‘짝과 짝 배안 벗과 함께 바닷가로 가 태풍 속 파도를 바라보라고? 아니, 이 사람이 대체 무슨 소릴··· 참, 이 사람은 짝 배안에 벗 있는 걸 모르지.’
“파도요? 하하하, 글쎄요. 그건 좀···.”
그가 말한 ‘◯◯’는 ‘큰엉’이었을 성싶은데 한 귀로 흘려듣고 말았다. 속절없이. 짝과 짝 배안 벗에게 큰바람 맞고 파도 보며 함께 웃자 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으니까.
그날 밤과 이튿날 점심 사이 프라피룬은 비 적되 바람 셀 거라는 기상청 걱정대로 흑산도 여러 집을 찢었다. 서귀포 남원 쪽 집 지붕 몇 개를 뜯어 하늘로 날렸고. 새벽녘 짝과 짝 배안 벗과 나는 창을 방 안으로 불룩이 밀어붙이는 바람 소리에 놀라 이부자리를 짐 넣어 뒀던 쪽방으로 옮겼다.
2000년 팔월 31일 목요일 아침나절. 한국전쟁 때 화가 이중섭이 바라봤을 쪽으로 아득한 내 눈길. 비 적되 바람 거센 바다 한가운데 거뭇한 섶섬. 문섬과 서귀포항 치는 큰 파도 물보라. 아름다웠다. 창 안쪽에서도 얼마든지. 그날 오전 아홉 시 프라피룬은 제주 서쪽으로 250킬로미터 떨어진 바다 위를 내달리며 제 오른쪽을 세차게 휘둘렀고.
짝과 짝 배안 벗과 나는 창 깨질까 두려워 방 안쪽으로 좀 더 멀찍이 물러났다.
“뭘 찍네. 영환가? 드라마?”
드라마. 배우 김정은이 보였다. 카메라에 제주 즐기는 모습 담으며. 남자 짝 배우와 함께. 웹으로 되짚어 보니 그 무렵 나날이 방송하던 MBC 티브이 드라마 <당신 때문에>인 성싶다. 미안하지만 남자 배우에게는 눈길 가지 않았고.
프라피룬이 한 시간에 40킬로미터씩 제주에서 멀어질수록 바람이 달았다. 흩뿌리다 멈추곤 다시 흩날리길 거듭한 비에서도 감칠맛 났고. 비(雨) 뿌리는 태국 신 프라피룬의 단맛.
비바람 남아 있으니 사람 많나. 적지. 비바람 남아 있으니 갈 데 많나. 적지. 하여 비 좀 흩뿌릴 때 온실 있어 우산 들지 않아도 될 성싶은 여미지 식물원에 갔고, 김정은 동아리도 ━ 아마도 같은 까닭에 ━ 거기 있었다. 조용히. 모여 앉아 두런두런 소풍하듯 드라마 찍으며.
여미지는 처음. 1989년 시월에 생겨 1990년대 결혼한 사람 사진 뒷배경으로 자주 쓰인 곳. 해마다 백이십만 명씩 다녀갔다니 엄청났겠지, 뭐.
십육 년 만인 2016년 팔월 여미지에 다시 가볼까 했다. ‘재미없을 게 뻔해 궁금하지도 않다’고 이미 얼굴로 말하는 벗을 거듭 꼬드겨서. 비 좀 왔고 서귀포 중문 쪽에 머물던 터라 “한번 가 볼래?” 두 번도 아닌 딱 한번. “넌 안 가 본 곳이니까, 이번에 함께 가 보고, 여긴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싶으면 다시 가지 않으면 되잖아.”
갔다. 십육 년 만이기 때문일까. 달랐다. 까닭이 뭘까. 눈길 닿는 곳마다 물기 없이 바싹 마른 느낌이 묻어났다. 사람이 드물어설까. 고요한 나머지 바닥에 끌린 내 신발 뒤꿈치 소리가 온실 안쪽 길을 가득 채울 성싶었다.
노동자. 온실 안쪽 길섶 홀로 가다듬는. 그의 등에 오랜 아픔 서렸다. 단체 협약 되살리라며. 임금은 왜 구 년째 그대로냐고. 부당 해고 노동자 돌아오게 하라며. “우리는 여미지 식물원에서 인간답게 일하고 싶다”고.
백이십 명이 나눠 하던 일을 서른다섯 노동자에게 떠맡긴 식물원. 여든다섯 명을 내보낸 식물원. 한 노동자를 세 차례나 해고한 식물원. ‘아름다운 땅’이란 뜻 담아 ‘여미지(如美地)’라던데 이 무슨 아픔인가.
나는 여미지 식물원에 다시 가지 않기로 마음 다졌다. 2016년 팔월 짝과 벗과 내가 낸 입장료 2만 9,000원이 아까웠고. 혹시나. 뒷날 서른다섯 노동자에게 덧씌운 일을 다시 백이십 명이 나눠 맡기로 한다면, “우리는 여미지 식물원에서 인간답게 일하고 있다”는 노동자 이야기와 웃음소리가 들린다면, 나는 그때에야 비로소 다시 가 볼까 짚어 보리라. 입장료를 만 원으로 올렸다던데 노동자가 보람찬 일터라면 2만 원은 말할 것도 없고 3만 원쯤 낼 마음도 있다.
서해로 내달려 황해도에 닿을 때까지 프라피룬은 거칠었다. 2000년 팔월 31일 밤 늦게. 땅에 올라선 뒤에야 힘 잃기 시작해 이튿날 밤 아홉 시쯤 동해에서 사라졌다.
제주 속 짝과 내 둘레 빗줄기는 성겼다. 프라피룬 멀어질수록 마땅히. 바람 셌되 비 적은 태풍이었으니까. 불현듯 머리카락 휘몰아 하늘로 쳐 올리긴 했지만 토닥토닥 사람 마음 어루만질 줄 아는 듯했다.
짝과 짝 배안 벗과 나는 태평양 저쪽에서 굴러와 한라산 위로 넘어가는 프라피룬 꼬리를 바라봤다. 1999년 이월 개봉해 오백팔십만 명이 본 영화 <쉬리> 속 배우 김윤진과 한석규가 앉았던 벤치에서. 태평양 저쪽에서 굴러와 중문 바닷가 모래에 드러눕는 파도를 바라봤다. 꽤 오랫동안. 잊지 않으려고.
하얘 눈 제대로 뜰 수 없는 아침 바다 햇살을 보진 못했다. 비바람 때문에. 하얗기는 한데 그저 “하얗다” 할 수 없는 눈부심을 바랐지만 만날 수 없었다. 구름 때문에. 1997년 팔월 18일 월요일 아침엔 햇빛 가득한 김녕 바닷가 파도가 자잘히 일렁여 내 눈 건드리자··· 절로 찡그린 눈살 따라 벌어진 입마저 다물지 못했는데. 느낌 좋아 짝 배안 벗에게도 알리고팠는데.
김포 가는 마지막 비행기. 2000년 구월 1일 금요일 밤 여덟 시 이십 분쯤. 올라타려면 공항 안 버스로 비행기 옆까지 가야 했다.
짝과 짝 배안 벗과 나는 되도록 더 오래 제주 바람 마시고 싶었을까. 마지막 버스를 탔다. 버스 안 네댓 사람. 짝과 짝 배안 벗과 내가 전철처럼 옆으로 길게 놓인 자리에 앉은 뒤 고개 드니 건너편에 컨츄리꼬꼬. 가수 신정환과 탁재훈. 되짚어 보니 그해 여름을 겨냥해 3집 앨범에 담은 ‘오! 가니’를 널리 알리던 무렵인 성싶다. “오! 가니 가니. 나를 떠나가니.”
고요. 눈길이 서로 닿았되 웃음이나 말을 건네지는 않았으니까. 거북해 말없이 견뎠다기보다 ‘저기 컨츄리꼬꼬가 있네’ 하는 느낌 그대로였다. 더할 것 뺄 것 없이 딱 그만큼. 컨츄리꼬꼬도 ‘저기 한 쌍이 있네’였을 듯했고. 짝 배안 벗을 알아보고 ‘두 사람은 어떤 쌍일까’ 가늠해 봤을 수도 있겠지만 버스 안에 웃음이 피어나진 않았다.
컨츄리꼬꼬는 흩어졌다. 가수 신정환이 티브이에 나올 수 없게 됐고. 다만 입담 좋은 탁재훈이 가끔 보였다. 좀 미안하지만, 그를 볼 때마다 나는 프라피룬 머리와 몸통과 꼬리를 본 2000년 팔월 제주가 아득하다. 제주 그리며 빙긋. 언제 어떻게 제주로 다시 갈까 겨누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