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젊은 엄마 시절을 그려보며
지금 구십육 세인 우리 외할머니는 스무 살 무렵 얼굴도 모르는 채로 우리 외할아버지에게 시집을 왔다. 몇 해 전에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는 옛 사진을 보아도 노년의 얼굴을 보아도 상당한 미남이시다. 사촌동생들이랑 할머니 할아버지 옛날 사진을 보다가, 우리 할머니는 결혼식 날 기분 엄청 좋았겠다며 까르르 수다를 떨었다. 거의 100년 전에 태어난 여자들은 많이 그러했을 텐데, 우리 외할머니도 자녀를 많이 낳으셨다. 결혼 직후부터 시작해서 꼬박꼬박 2년 터울로 일곱 명을 출산했다. 이중 외할머니의 막내딸은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나서, 내게는 엄마의 위로 외삼촌 두 분, 엄마 아래로 이모 두 분과 막내 외삼촌 한 분이 계시다.
가만히 계산해 보면 스무 살부터 거의 서른다섯까지 우리 외할머니는 임신하고 출산하고 수유하며 젖먹이를 키우다가 그 아이가 돌을 막 넘기면 또 임신을 하는 과정을 일곱 번이나 경험했다. 가장 젊고 푸릇할 나이에 절반은 배가 부른 채로, 나머지 절반은 젖을 먹이면서 사신 것이다. 내가 직접 임신, 출산, 수유의 과정을 겪고 나니 이게 얼마나 어마어마한 일인지 감히 상상조차 잘 안 된다. 열 살, 여덟 살, 여섯 살, 네 살, 두 살 아이가 있는데 또 막 출산을 한 여자의 몸은 얼마만큼이나 자신의 것일 수 있을까.
게다가 할머니가 주로 육아를 하던 1950년대에는 분유가 있었겠나, 기저귀가 있었겠나. 어떻게든 젖을 물리고 천기저귀를 손빨래하며 우는 아이들을 재웠겠지. 지금은 온갖 육아 아이템들이 해주는 일들을 온전히 할머니의 몸으로 다 해야 했을 것이다.
다른 것 다 둘째치고 모유수유만 해도 어마어마한 일이다. 직접 모유수유를 하기 전에 나는 이게 쉬운 건 줄 알았다. 음식을 좀 가려먹어야 하고 수유 때마다 가슴을 오픈해야 하는 번거로움 정도는 있겠지만, 그것뿐이라 생각했다. 물론 유두의 모양이 수유에 적합하고 모유량이 많고 아기의 빠는 힘이 좋은 경우, 수월하게 모유수유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조건을 다 갖춘 엄마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모유수유에 대해서만 쓰려해도 수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다 각설하고 짧게 말하자면, 모유수유는 쉽지 않다. 가슴이 불타는 돌덩이가 되는 것 같은 통증을 겪기도 하고 유두에서 피가 나기도 하고 옷 앞섶이 시도 때도 없이 흥건히 젖어나기도 하고, 무엇보다 밤에 두세 시간 간격으로 깨어나 배고파 칭얼대는 아기를 안아 들고 가슴을 열어야 한다. 통잠을 못 자니 만성 수면부족에 시달리고, 굉장히 피로하다. 우리 할머니는 이걸 거의 격년으로 일곱 번쯤 하신 것이다.
어디 이뿐이랴. 젖을 다 뗄 정도로 아이들을 키워놓았어도 열 명 가까운 식구들의 삼시세끼 밥을 차리는 일은 얼마나 지난했을까.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내가 대학생 때 독일로 교환학생을 가 있었는데, 독일에 있는 중에 외할머니 생신이 있었다. 우리 외가 식구들은 매년 할머니 생신이면 스무 명 넘는 자식 손주들이 다들 모여서 식사하고 케이크도 자르며 축하를 한다. 독일에 있어서 부득이 할머니 생신에 참여하지 못하는 나는 할머니에게 편지를 썼다. 인사와 축하에 더해 이런 글을 편지에 썼던 걸로 기억한다.
"할머니, 저는 혼자서 제 밥 세끼 챙겨 먹는 것도 참 번거롭고 귀찮아서 대충 먹을 때가 많아요. 그런데 할머니는 그 옛날에 가전제품도 조리도구도 변변치 않았을 텐데, 할아버지랑 외삼촌, 엄마, 이모들까지 거의 열 명의 세끼 식사를 어떻게 매일 챙기셨어요? 요리하고 설거지하기만 해도 하루가 다 갔을 것 같아요. 할머니 정말 고생 많으셨을 거 같아요. 대단하세요."
할머니 생신에 맞춰 할머니 댁에 도착한 내 편지를, 사촌동생이 모두 앞에서 낭독했다고 한다. 아마 할머니 할아버지와 친척 어른들은 멀리 외국에서도 할머니 생신을 챙기는 나를 기특하게 여기셨을 것 같다. 하하호호 웃으며, 생신잔치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손녀의 작은 이벤트 정도로 넘어갔겠지 싶었다. 그런데 사촌동생에게 전해 들은 바로는 할머니가 저 대목에서 눈물을 글썽이셨다고 한다. 까마득히 잊혔던 오륙십 년 전의 하루하루가 문득 생각나셨던 걸까. 지금 돌아보면 할머니에게는 그 시절이 정말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그래도 우리 할머니, 고되기만 한 삶을 사신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 기억이 닿는 어린 시절부터 매년 설, 추석, 어버이날, 할머니 생신, 할아버지 생신 이렇게 최소 다섯 번은 외갓집에 갔다. 아까 기술했듯 외국에 있는 정도의 예외가 아니면 모두가 모였다. 다들 서울에 살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할머니 입장에서는 여섯 자녀와 여섯 사위 및 며느리, 그리고 해가 갈수록 늘어서 결국 열 명이 된 손주를 집에서 맞이하셨다. 물론 음식을 준비하거나 청소를 하는 일은 할머니의 손을 타지 않는다. 주로 딸과 며느리의 손길들이 닿았고, 언제부터인가는 출장 뷔페를 불러서 음식을 해결했다.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복작복작 모인 집은 화기애애하고 삼삼오오 이야기꽃이 폈다. 나도 이때 사촌들과 모여서 놀이터도 가고 비디오도 빌려보고 밤새 수다도 떨었던 기억이 즐겁게 남아있다.
그리고 할머니는 일흔이 넘어서도 생활운동을 즐겨하셨다. 할아버지와 아침 일찍 동네 뒷산 배드민턴장에 가시는 게 일상이었는데, 한 번은 나도 쭐래쭐래 따라간 적이 있다. 배드민턴을 치는 동네 어르신들이 많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주거니 받거니 랠리를 하던 게 기억난다. 또 할머니는 여든이 다 되도록 수영장도 다니셨다. 팔십 대에 직장암 수술을 하신 후로는 수영장을 갈 수 없게 되었는데, 이걸 몹시 아쉽게 생각하셨다. 병문안을 가서 할머니에게 "저 요즘 수영 배워요." 말씀드리자 할머니는 본인의 새 수영복을 가져가라고 하셨다. 사이즈 때문에 내가 할머니의 수영복을 입을 수는 없었지만, 할머니랑 이렇게 통하는 게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흐뭇했다.
사촌들이 하나둘 결혼을 하면서는 명절의 분위기가 조금 바뀌긴 했다. 각자의 시댁과 처가가 생긴 사촌들은 명절에 할머니댁에 못 오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결혼을 늦게 한지라 몇 년 전까지는 엄마 아빠를 따라 명절에 외갓집을 갔는데, 어느 해는 할머니랑 나랑 둘이서 침대에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었다. 할머니는 나에게 "너는 애인 없어야?" 물으셨고, 나는 부모님에게도 오픈하지 않은 남자친구 이야기를 할머니에게 했다. 난 할머니에게 "할머니도 할머니의 엄마 생각나요?" 물었고, 할머니는 "그럼, 생각나지. 우리 엄마는 많이 아팠어." 라며 아련한 추억을 꺼내셨다. 구십을 넘어서부터 약간의 치매 증상을 보이시던 할머니는 한창 이야기하던 중에 "너는 애인 없어야?"라는 물음을 두 번 더 하셨다. 나는 조금 놀라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처음 물음에 답했던 그대로 정답게 두 번 더 말씀을 드렸다. 이윽고 할머니가 침대에서 일어나 보행보조기를 짚고 거실로 나가셨다. 그러고는 어른들이 모두 모여 앉은 거실에 대고 말씀하셨다. "얘 애인 있단다." 이럴 수가. 나는 어쩐지 우리 할머니가 너무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뜻밖의 공표에 거기 계시던 친척 어른들이 허허 웃으시며 축하를 해주셨고, 엄마는 "넌 엄마한테도 안 한 이야기를 할머니한테 했어?"라고 하길래 "엄마는 안 물어봤잖아. 할머니가 애인 있냐고 물어보시길래 답한 거지 뭐."라고 이야기했다.
몇 해 전 외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던 날, 할머니는 많이 우셨지만 할머니 곁에는 든든한 세 아들과 세 딸, 많은 손주와 증손주 들이 있었다.
나이에 비해 놀랍게 정정하시던 우리 할머니는 작년 봄에 한 번 쓰러지신 난 후 요양병원에 들어가셨다. 호스를 통해 음식을 드시고 소변줄을 다시고 말씀도 못하시는 상태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의사의 말도 있었지만, 조금씩 기력을 되찾으셔서 이제 찾아오는 자녀들을 알아보시고, 웃거나 흐느끼시는 정도로 감정 표현도 하신다고 한다. 그래도 지금 할머니는 마치 갓난아기처럼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의료진의 도움으로 먹고 배설하고 이동하신다. 말을 알아들으시는 것 같지만 말을 하실 수는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할머니의 여섯 자녀들은 한주가 멀다 하고 할머니를 찾아간다. 지금 다 육십 대 중반에서 칠십 대 중반의 나이이지만, 구십육 세 엄마를 지극히 모신다.
우리 할머니가 일곱 명의 아기를 낳고 기른 이삼십 대에 나는 무엇을 했나. 대학을 다니고 대학원을 다니고 회사를 다녔다. 공부를 하면서 실컷 놀고 여행을 다니기도 하고, 진로를 고민하며 학위 논문을 쓰고, 해외 학회에서 영어로 발표를 하고, 몇 번의 연애도 하고, 회사에서 여러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승진도 하고 이직도 했다. 이런저런 운동들을 해보다가 발레에 재미를 붙여서 꽤 오래 취미 발레 수업을 듣고, 책 읽고 글 쓰는 게 좋아서 독서 모임에도 꾸준히 참여했다. 주로 나 자신을 위해 투자하고 나 자신의 꿈을 추구하고 살았다. 쭉 혼자 살아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같이 살면 더 좋을 거 같은 사람을 만나 다소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하고, 출산을 했다.
사실 결혼 전 나의 삶은 할머니 세대 여자들에게는 대부분 주어지지 않은 옵션이다. 우리 엄마 세대만 해도 내 또래 여자들보다는 선택의 폭이 좁았을 것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 사회의 눈부신 발전과 이에 따른 여성의 지위 상승이 내게 이런 선택 권한을 부여했다.
내 이후의 삶은 어떻게 될까. 육아휴직이 끝나면 회사로 복귀를 하고, 아이를 돌보는 틈틈이 내 개인 생활도 해나갈 것이다. 자기 자신만 집중해서 평가한다면, 나는 우리 할머니나 엄마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힘을 가지고 누려왔다. 1할 정도만 나의 능력이고 9할 쯤은 시대의 산물이리라.
그런데 가족 단위로 확장해서 생각하면 나는 우리 할머니보다 훨씬 단출할 수밖에 없다. 할머니가 손주 열 명을 봤을 나이에 우리 엄마는 이제 겨우 백일 된 손주 한 명을 보았고, 내가 그 나이에는 내 자식이 아직 결혼을 안했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 할머니가 스무 명 넘는 가족들에게 생일 축하를 받던 육칠십 대가 되면, 난 많아야 네다섯 명, 혹시 적으면 단 두 명의 가족과만 생일 축하를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외삼촌, 엄마, 이모 들이 그러하듯 나 역시 점점 늙어가는 나의 엄마, 아빠를 지극히 모시겠지만, 육인분의 몫을 해낼 수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가끔 이런 생각도 든다. 이제 막 백일을 넘긴 내 아기가 제 엄마나 아빠처럼 결혼을 늦게 하거나 아예 안 한다면, 부모의 장례를 굉장히 쓸쓸하게 치를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 슬퍼할 내 아들과 같은 마음으로 서로 어깨에 고개를 묻고 눈물을 흘려줄 사람이 아무도 없겠구나,라는 생각. 이렇게 멀리까지 가진 않더라도, 지금으로서는 형제도 없고 사촌도 없는 내 아기는 내가 어릴 때 외갓집에서 느꼈던 그 북적북적한 대가족의 바이브를 느껴볼 일이 없기도 하다.
물론 자식 손주의 수가 곧 노년기 인생의 행복을 대변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나이가 들수록 여러 측면에서 가족의 소중함이 더 진하게 느껴지는 것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나는 노년기에 우리 할머니보다 사회적으로 내세울 경력은 더 많겠으나, 분명 어느 정도는 더 외로울 것이다. 거친 가정이지만, 남편이 먼저 세상을 뜨고 자녀 하나가 멀리 있다고 가정했을 때, 우리 할머니에게는 여전히 가까이 사는 다섯 명의 자녀와 많은 손주가 있지만, 나는 아무도 없을 테니까. 사회 시스템 및 서비스 덕으로 늙어서도 큰 무리 없이 살 수 있을 거라 예상은 한다. 그러나 사회가 가족의 역할을 완전히 대신해 줄 수는 없다. 특히 심적인 부분에서는 그럴 것이다.
구구절절 말이 길었지만 정리하면 간단하다. 이삼십 대에 자녀 출산과 육아에 자기 자신을 갈아 넣은 구십육 세 우리 할머니는 개인적 혹은 사회적 성취는 거의 없지만 노년기 많은 가족들과 풍성한 기쁨을 누리셨다. 이삼십 대에 내 공부와 일과 꿈에 집중한 서른아홉 나는 현재에도 그리고 아마 미래에도 가족 구성원이 단출하겠지만 개인적 혹은 사회적 성취는 남을 것이다. 청년기를 어떻게 보냈느냐에 따라 노년기가 결정되는, 당연한 원리다.
사실 지금 누군가에게 우리 할머니처럼 살래, 나처럼 살래, 물어보면 십중팔구는 후자를 택할 게 분명하다. 내 삶이 우리 할머니의 삶보다 더 가치 있거나 의미 있어서라기보다는, 사회의 발전 방향이 그렇다. 과거에서 현대로,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갈수록 통계적으로 여성 한 명이 낳는 자녀 수가 적어지는 게 단적인 증거다.
우리 할머니는 결혼도 출산도 본인의 선택이나 의지보다는 그 시대 여자들이 다들 하는 관습에 의해 흘러 흘러 진행됐을 것이다. 나를 돌볼 틈도 없이 줄줄이 태어나는 자식들을 돌보는 데에 모든 젊음을 쏟아부었을 것이다. 아주 고되고 아픈 나날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 할머니는 그 시간들을 다 건너서 행복한 노년을 맞이하셨다. 매년 생신 날 수많은 자식 손주들에게 축하를 받으며 케이크 불을 끄는 할머니 표정을 보면 정말 그러했다. 지금은 비록 많이 노쇠하셔서 요양병원에 계시지만, 자주 찾아오는 자녀들 덕에 조금은 기운이 나시리라 믿는다. 할머니가 더 기력을 회복하시고 더 평안하셨으면 좋겠다. 여자의 임무가 출산과 육아로 수렴되던 시대에 태어나 사셨지만, 고생하신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이제 할머니도 돌봄을 받으시며 행복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