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컵에 물이 반만큼 찬 나날들
딱 백일 된 아기를 키우고 있다. 출산 이후 사람들과 연락을 하거나 만나게 되면 다들 많은 축하와 함께 많은 걱정도 건넨다. 육아가 제일 힘들지, 아기 보느라 힘들지, 고생 많겠다, 우울하거나 아프진 않고?, 등등의 이야기들.
나는 지금 힘든가?
사실 쉽지 않은 면도 있다. 출산 후 병원에서 닷새, 조리원에서 2주, 산후도우미 2주, 남편 출산휴가 4주를 지내는 동안은 옆에 누군가가 있어서 그럭저럭 괜찮았다. 약 한 달 전부터 아침부터 저녁까지는 아이를 혼자 보고 있는데, '힘들다'기 보다는 자주 '졸립다'. 아픈 데 없고 잘 크는 아이이지만, 아직 밤에 통잠을 못자고 서너시간 마다 먹을 걸 찾기 때문에 내 잠도 길어야 3시간 정도로 뚝뚝 끊어지기 때문이다. 잠이 부족해서인지 150 정도까지 높아진 혈압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생각보다 별 무리 없이, 가뿐히 잘 살고 있다. 일단 육아휴직이라 회사를 안 가고, 육아 말고는 반드시 해야하는 다른 일들도 없다 보니, 주어진 조건 하에서 하루를 운영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아기가 잘 때 나도 자고, 음식은 간단한 것으로만 챙겨 먹는다. 아기랑 노는 것도 꽤 재밌다. 동요가 나오는 책을 읽어주고, 터미타임을 시키고, 몸을 조물조물 마사지 해주고, 주거니 받거니 옹알이를 한다. 세상 모든 아기들은 다 귀엽지만, 이렇게 24시간을 함께 할 때만 알 수 있는 아기의 특별한 순간들이 있고, 나는 그 순간들을 뭉클하게 잘 즐기고 있다.
물론 이렇게 무난한 육아를 해나가는 데에는 몇몇 요인이 크게 작용한다. 첫째, 남편의 도움이 크다. 아침 6시에 출근해서 저녁 6시에 들어오는 남편은 본인도 고단할 텐데 나 대신 집안일도 기꺼이 하고, 아기 돌보는 일도 즐거워 한다. 둘째, 내가 호르몬의 영향을 덜 받는 인간인 것 같다. 요즘 MBTI식 표현으로 나는 극T인 사람이다. 출산하고 눈물 난 적이 딱 한 번 뿐이다. 아기가 50일쯤 됐을 땐가, 모유수유가 생각보다 버거워서 눈물이 한 방울 뚝 떨어졌었지. 그 외에는 감정이 요동치거나 산후우울증 증상으로 여겨지는 건 없다. (대신 그래서인지 모유량도 적다) 호르몬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은 육아가 더 힘들 거 같긴 하다. 셋째, 아기가 안 아프고 건강하다. 밤에 잠을 길게 안 자는 거 말고는 크게 까탈스럽지 않다. 마지막으로, 내 몸 역시 딱히 아픈 데가 없다. 주변에 아기 키우는 엄마들 열이면 열 모두 손목이 아프다고 해서 나도 아플 줄 알았는데, 희안하게 손목 통증조차도 없다.
이렇게 이야기하니 내가 무슨 슈퍼 육아맘이라도 되는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만도 않다.
나는 원래 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인데 지금 그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았다. 일주일에 적어도 두세 번은 운동을 하고 싶은데 전혀 못하고 있어서 몸이 많이 굳었다. 한 달에 최소 너덧 권은 책을 읽었는데 출산 후 100일 동안은 겨우 두 권을 읽었다. 원고지 800매 정도의 분량을 계획하며 쓰던 글이 있는데 이 역시 올스톱 상태다. 심지어는 거의 한평생 주일이면 교회가서 예배 드리던 내가 정신없이 간신히 온라인 예배만 드린지 벌써 몇 개월째다. 영적으로도 지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정지 혹은 퇴보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만약 이 상태가 지속된다고 생각하면 꽤 우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 계획상으로 남편이 두세 달 후에 육아휴직을 쓰기로 해서, 그때부터는 나도 내 시간을 좀 가질 예정이다. 나는 해당되지 않지만, 양가 부모님 중 한쪽이라도 도움을 주실 수 있거나, 시터를 쓸 수 있다면 비슷한 효과를 가질 수 있을 듯하다. 남편의 휴직도 없고, 양가 도움도 어렵고, 시터도 쓰지 못하고, 말 그대로 무기한 독박육아가 펼쳐진다고 생각하면, 어휴, 까마득하다.
아무튼 하고 싶은 말은, 육아도, 어쩌면 어느 순간 순간의 인생도, 물이 반쯤 찬 컵인 듯 하다는 것이다. 반밖에 없다고 조급해할 수도 있고, 반이나 있다고 흡족해할 수도 있다. 마음가짐만의 문제이기 보다는, 내가 물을 얼마나 먹는 사람인지, 이전에 물을 얼마나 먹어놨는지, 물 말고 다른 수분섭취 통로가 있는지, 이걸 마시면 또 얼마쯤의 물이 채워질지 등을 모두 고려해야 하겠지만서도. 가뿐하다면 가뿐하고, 힘겹다면 힘겨운 하루하루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지 생각하는 건, 꽤나 도전적이면서도 제법 재미있다.
지금 브런치에 이렇게 주절주절 일기처럼 글을 쓰는 이유도, 물이 반이나 있다는 걸 인지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육아 백일차를 맞아, 조금은 더 능숙한 하루 운용을 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솔직히 말하면, 육아 말고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슬슬 답답함과 조급함을 느끼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원래 쓰던 글을 계속 이어 쓰고 싶지만, 이런 일기를 주절거리는 데에 드는 에너지가 1이라면, 그 글을 쓰는 데에 필요한 에너지는 10이라서, 현재로서는 10만큼의 에너지를 축적하는 게 좀 어렵다. 겨우 생기는 1의 시간과 에너지를 그냥 아기와 자는 데에 쓰기 보다는 뭐라도 쓰면서 마음을 정리하고자 한다.
사실 브런치에는 이런 일기류의 글을 올리고 싶지는 않았다. 주제를 잡고 시리즈물로 쓰고 싶어서 아이디어 정리해 기획한 게 두 꼭지 정도 있어서, 이런 걸 쓰고 싶었다. 원래 쓰던 글과 기획해 놓은 아이디어를 다 쓰는 건, 마라톤 같은 일이다. 그러나 물 반 컵 들고 장거리 달리기는 무리라서 이런 10분 산책 정도만이라도 시작하려 한다.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는 데에 내 에너지를 모두 갈아넣기 보다, 최선을 다해 아이를 돌보면서도 나 역시 내 길을 걷는 독립된 개체로서 살아보자. 백일, 아기도 수고했고, 남편도 수고했고, 나도 수고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