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했던 자의 자기반성
기억이 생생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글쓰기로 상을 받았다. 날씨가 좋으면 운동장에서, 날이 궂으면 교실에 하나씩 있는 텔레비전을 통한 방송으로 전교 조회를 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그날 교장실에 가서 교장선생님에게 상장을 받았고, 상장 받는 내 모습은 방송반의 방송 장비를 통해 모든 교실로 송출됐다. 돌아보면 참으로 별것 아닌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어찌나 뿌듯하고 자신감이 차오르던지. 그날, 내 장래희망은 작가가 됐다.
국문학과에 진학하겠다는 구체적 꿈을 품은 초등학생은 중고등학교를 지나며 수학을 좋아하게 됐다. 수학은 정연하고 아름다웠다. 마음이 복잡한 날이면 난 수학문제집을 꺼내놓고 풀었다. 논리에 따라 차근히 수식을 풀어가면 딱 맞는 정답이 나오는 수학은 복잡한 세상 속 나의 안식처였다. 수학적 재능도 나름 따라준지라 나는 학창 시절 수학 공부를 하며 어려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자연히 대학 전공도 수학으로 정했다. (수학과 진학 후에는 어려운 수학도 많이 만났다..) 그리고 대학원은 경영공학으로 가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비록 전공은 다른 길을 택했지만 나는 늘 글쓰기에 자부심이 있었다. 일기나 독후감이 부담스러운 적이 없었고, 백일장에서는 소소히 상을 타왔으며, 대학 진학 후에도 경제 관련 에세이를 써서 상을 받기도 했다. 심지어는 박사 논문과 회사에서 쓰는 보고서도, '글쓰기' 자체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었고, 나름 인정도 받았다. 한때 개인적으로 쓰던 블로그 글 중 몇몇은 인기글, 성지순례글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내가 언젠가는 좋은 글을 쓰고 책을 펴낼 거라고 늘 믿고 있었다. 의식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아도 당연히 그러할 거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글은 여러 종류가 있다. 서점에서 살펴볼 수 있는 책의 장르가 수십 가지이니, 간단하게는 수십 종류의 글이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나는 그중에서도 소설을 쓰고 싶었다. 에세이도 좋지만, 일단 좋은 소설을 쓰고 싶었다. 내가 읽고 가장 묵직한 감동을 받는 책이 소설이니 당연한 일이다.
딱 십 년 전, 나는 학위를 받고 연구원이 되었으며, 그해 나 스스로에게 주는 생일 선물로 소설 창작 강의를 신청했다. 사실 혼자서도 잘 쓰면 가장 좋았겠지만, 배워보고 싶기도 했다. 글을 쓰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과 만나고 싶기도 했고. 그 창작 강의를 시작으로 나는 꽤 여러 해 동안 간헐적으로 합평 수업을 들으며 단편소설을 습작했다.
처음에는 금방 등단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내가 좋아하는 글들처럼 깊이 있고 감동적인 글을 내가 직접 써 내려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읽는 것과 쓰는 것은 매우 달랐다. 논문이나 보고서를 쓰는 것과 소설을 쓰는 것도 아주 달랐다. 좋은 소설들을 읽어가면서 눈은 점점 더 높아지는데, 마음은 점점 더 고양되는데, 손은 그만큼 따라주지를 않더라. 이번에는 정말 대단한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포부로 시작했다가, 중간쯤 써 내려가며 스스로 조금 실망하고, 다음에는 이런 점을 고쳐보겠다는 다짐 속에서 글을 끝낸 경험이 이어졌다. 그럼 다음 글은 그전 글보다 더 잘 쓸 것만 같은데, 이게 또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았다.
참 어려웠다.
내가 글쓰기, 적어도 소설쓰기에 대해서는 별 재능이 없다는 것을 차츰 겸허히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씁쓸하지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연구원이고, 내 연구는 나름 잘하고 있으니, 문학은 그저 우아한 취미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초등학생 때부터 품어온 꿈을 이렇게 접어버리는 것은 과거의 나에게도 부끄러운 일이고, 더 올인하지 못하고 포기하는 것은 미래의 나에게 떳떳지 못한 일이었다.
저런 생각이 차올랐을 때 마침 다니던 회사를 떠나는 게 좋겠다는 상황과 마음이 찾아왔다. 보통 회사를 그만두기 전에 이직을 결정짓곤 하지만, 나는 최소 1년에서 2년 정도는 회사를 다니지 않을 마음으로 퇴사를 했다. 소설을 쓰기 위해 회사를 그만뒀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회사를 그만두고 30대 중반에 인생의 쉼표를 찍는 귀한 시간 동안, 글쓰기를 더 집중해보고자 하는 다짐은 있었다.
퇴사 직후, 동네 서점에서 하는 조해진 작가님의 합평 수업을 신청했다. 원래 많이 좋아하던 작가님이라 설레고 들떴다. 작가님은 나긋나긋 조용조용한 말투로 소설에 대해, 수강생들의 글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해주셨다. 가끔 좋은 평만 하려는 선생님들도 계시는데, 작가님은 부드럽지만 날카로운 평을 해주셨다. 그리고 내 단편을 보시고는, 몇 번째로 쓴 글인지, 투고해 봤는지, 최종심은 가지 않았는지 물어보셨다. 짧은 문답이었지만 마음이 한가득 벅차올랐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인생이 그렇게 마음처럼 흘러가지만은 않더군. 나는 자발적 백수로 일 년 넘는 시간을 보내면서도 끝내 그해에 좋은 결실을 얻지 못했다.
내가 자발적 백수 기간에 '쓰기'에만 집중한 것은 아니다. 여행도 가고, 읽기도 많이 읽고, 공부하고 싶은 다른 분야도 몇몇 조금씩 손을 댔다. 한 마디로 하고 싶은 거 많이 하면서 좋은 시간 보냈다. 어쩌면 이게 문제라면 문제일 것 같다. 내 마음대로 24시간을 운영할 수 있는 황금 같은 기간에 '의도적으로 글쓰기에만 집중하지 않은' 게 문제라기보다, 그런 황금 기간에 '글쓰기에만 집중하지 않을 수가 없는' 열정을 갖지 못한 게 문제랄까. 그러니까, 정말 글쓰기에 재능이 있고 열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기간에 자발적이고도 자연스럽게 글쓰기에만 몰두하지 않았을까.
기대가 실망으로 변한 게 벌써 몇 해 전의 일이었다. 아직 자발적 백수이지만 비자발적 백수로 강제 전환되기 전에 일을 다시 알아봐야 하나도 생각했다. 그러나 조급하지는 않았다. 받아들일 걸 받아들이고(무결실의 현실과 그게 의미하는 내 재능없음 같은 것들), 계획할 것을 계획했다(자발적 백수는 반년에서 일 년 정도 더 한 후에는 다시 일을 찾겠다 같은 것들).
시간적으로도 마음적으로도 약간의 여유 공간을 확보했달까. 그리고 시도한 것은 장편소설 집필. 이제 와서 돌아보면 무모하지만 그리 무겁지 않은 도전이었다.
원래 내가 좋아하는 책들은 민음사나 문학동네의 세계문학전집에 실리는 소설들, 혹은 창비나 문동, 현대문학 같은 계간지에 실리는 소설들이다. 굳이 여기서도 개인적 선호를 가리자면 난 고전소설들을 좋아한다. 쿳시, 먼로, 오웰 같은 작가들. 좀 더 열거하자면, 헤르만 헤세, 로맹 가리, 밀란 쿤데라, 도스토예프스키. 살아있는 작가를 추가하자면, 가즈오 이시구로, 이언 매큐언, 줌파 라히리.
그런데 내가 장편으로 써보려고 시도한 건 저런 작가들의 소설과 같은 지향점을 갖는 건 아니었다. 미드 보기가 취미였던 시절 스쳐간 드라마 소재를 쭉 머릿속 서랍에 넣어두고 있었는데, 그걸 꺼내보려는 것이었다. 엄청난 김칫국이지만, 내 글이 영상화가 된다면 엄청난 예산을 끌어오기는 어려울 가능성이 높으니 저예산으로 제작 가능하도록 제한된 공간과 적은 수의 인원을 등장시켜야겠다는 생각까지도 서랍에 같이 들어있었다. 드라마는 많이 봤지만 시나리오는 읽어본 적도 없으니, 익숙한 소설 형식으로 써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리고 요즘에는 이런 영상화를 목표로 하는 글을 공모하는 공모전이 많더라.
장편은 처음 쓰는데, 그 과정이 단편 쓰기보다 재밌고 신났다. 내가 좋아하고 많이 읽는 순문학(이런 분류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서도)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하지만, 장르문학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글이 탄생했다. 그리고 그게 2023년 교보스토리대상에서 우수상을 탔다.
약간 얼떨떨하면서도 당연히 기뻤다. 이직과 이사라는 나름 바쁜 일과 속에서도 퇴고를 하고, 수상 이후 연결된 작가님, 교보 PD님과 연락을 하며, 이후 작업을 진행했다. 솔직히 말해서 이 글이 엄청나게 훌륭한 소설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그러나 흥미롭게 읽히는 페이지 터너 소설로 출판이 되고, 잘 맞는 제작자를 만나 영상화가 되는 걸 기대했다.
기대와 달리 내 글은 몇몇 출판사에게 거절을 당했다. 출판사들의 거절 이유 중에는 다소 기시감이 든다는 게 있었는데, 씁쓸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 글 수상 이후에, 넷플릭스에서 나온 '디 에이트 쇼(The 8 Show)'를 봤는데 굉장히 놀랐다. 디테일은 아주 달라서 내 장편과 저 드라마가 비슷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제한된 공간, 제한된 인원, 살아남기 위한 투쟁 같은 큰 설정은 유사하다고 할까. 내 오랜 글쓰기 친구이자 출판사를 다니는 편집자 언니도 저 드라마 이야기를 하더라. 뭐 그것만이 문제이거나 이유는 아니었겠지만서도.
결론적으로 내 글은 종이책 출판사와 매칭되지 못하고, 전자책으로만 출간이 됐다. 수상이 기뻤던 딱 그만큼 아쉬운 마음이 드는 종착점이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