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순이의 잘 먹고 잘 노는 법

휴가에 대하여

by 정은유


우리 회사에는 Block Leave 제도가 있다. 줄여서 ‘블락‘이라고들 한다.

직원이라면 누구든 10일의 휴가를 몰아서 써야 한다. 시기는 상관없고 업무대체자(일명 백업) 간에 양해가 되면 결재자의 승인은 요식행위에 불과하다.


13년 전에 입사했으니 12번의 블락을 다녀온 셈이다. 처음 몇 년은 아이가 어려서 2주 내내 온전히 돌볼 수 있는 것만으로 좋았다. 그 핑계로 동네 엄마들과 거의 매일 만나 놀았고, 블락을 기다리는 재미로 회사를 다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이가 자라자 엄마들과 어울릴 기회도 줄어들었다. 나 혼자 놀러 다니거나 가족여행 다니면 좋은데, 휴가가 자유롭지 않은 남편 때문에 쉽지 않았다. 결국 집에서 잘 노는 법을 마치 생존 수영 배우듯 익혔던 것 같다. 수 년에 걸쳐 ‘집순이의 잘 먹고 잘 노는 법- 정은유 버전’이 탄생한 것이다.



12번의 블락 중에 제일 기억나는 때가 있다.

2022년인가 하고 기록을 찾아보니 아뿔싸, 2021년이네. 벌써 4년 됐구나.


같이 살던 엄마가 이사를 가시면서 주부 인생 홀로서기 시작이자 <(낮 동안) 나 홀로 집에>가 실현된 첫해였을 거다. 간섭하는 사람 없으니 흥청망청 놀아볼까도 했지만 이왕이면 의미 있는 시간으로 보내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하루 한 권씩 독서를 하고 그 기록을 인스타에 남겼다. 짤막한 독후감과 함께 감동받은 구절들을 그대로 옮겨 넣었다. 주말 빼고 10일의 평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성실히 읽었다. 기록 남기기도 그날 그날 완료했다. 지금 생각해도 보람된 시간들이었던 것 같다.


유감스럽게도 이토록 기특한 휴가는 한 번으로 끝. 그 후로 매일 독서는커녕 휴가 중에 한 권도 제대로 안 읽었을 거다. 그렇다고 블락이 무익했던 건 아니다. 월급 다 받으면서 한 달의 절반을 놀고먹는데 이 자체로 감사하고 짜릿하지 아니하냐고.



올해 블락은 아들 수능 끝나고 쓸 생각이다. 구체적 계획은 아직 없는데 아들이 같이 놀아준다 하면 여행을 가거나 맛집, 극장 투어 같은 거 해보려 한다. 이마저도 여의치 않다면 넷플릭스 보면서 맛있는 거 배달해 먹고, 간만에 책꽂이 털이를 해도 좋을 것 같다.


아, 방금 좋은 생각이 났다. 이번 달처럼 매일 글쓰기를 해볼까? 이미 한 번 해봤으니 그땐 좀 더 여유롭게 할 수 있을 거다. 밤마다 글 쓰느라 두어 시간 집중하고 나면 기진맥진하고, 늦은 시간에 잠들어 낮에는 피로가 몰려왔다. 안 하던 짓 하니 몸도 힘들 수밖에.


블락 기간에는 몸도 머리도 충분히 쉬면서 쓸 수 있을 테니 그때 쓴 글과 지금의 글의 느낌을 비교해 보는 재미도 있겠지. 올해 블락도 2021년만큼이나 유익하겠는걸.

밖으로 쏘다니지 않고도 잘 먹고 잘 노는 거 하나는 수준급인 거 킹정!


만랩 집순이의 2주 통휴가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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