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잎과 강된장

작년 이맘때...

by 정은유


오늘이 8월 하고도 11일이지. 작년 이맘때 열심히 휴가 즐기고 있었네. 지금 회사에서 제일 좋은 점 꼽으라면 2주 휴가를 통으로 써야 하는 Block leave 제도가 있다는 것. 별 이유 없이 연말에 쉬어 버릇했는데 작년엔 좀 특이했다.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지만 핵심만 적자면 번아웃이 왔던 것 같다. 일과 사람 둘 다에 치여서 즉흥적으로 휴가를 신청했고 금요일에 퇴근하자마자 엄마 집으로 달려갔다. 동생네도 함께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엄마 밥 얻어먹으며 잠만 자다 와도 좋다고 생각했다. 엄마 밥은 보약이니까 몸보신만 해도 충분하다 여긴 휴식의 시간. 엄만 우리가 밤늦게 도착하는 거 뻔히 알면서 으레 저녁밥을 차려놓곤 했는데 그날도 예외가 아니었다. 옷 갈아입고 손만 후다닥 씻고 본능적으로 식탁으로 향한 순간, 꺄아~ 소리가 레알 육성으로 터져 나왔다. 역시 동생도 함께였다.



이토록 정겨운 호박잎과 강된장의 콜라보라니! 계절을 관통하는 진초록의 화려함 앞에서, 소박해서 되레 강렬히 느껴지는 엄마의 제철 음식이 전하는 사랑 앞에서 한참을 행복에 겨워 어쩔 줄을 몰랐다. 떨어져 살다가 한 번씩 맛보는 엄마 음식은 늘 맛있고 소중하지만, 이번은 유독 더 그랬다. 앞서 말한 대로 번아웃 비슷한 게 찾아온 덕분(?)에 도피하듯 찾아온 엄마품이 이렇게나 푸근할 줄이야. 일로 힘들고 사람한테 스트레스받느라 마음 한구석이 거칠거칠 수세미였는데, 엄마표 밥상 한 번에 부들부들 솜사탕이 되는 순간이었다.


작년 이맘때 인스타에 무슨 글을 썼었나도 찾아보았다. 밝은 내용은 아니었다. 연초에 터진 홍콩 ELS 사태로 우리 팀이 직격탄을 맞았다. 민원 접수가 끊이지 않았고 금융감독원에 비슷한 내용의 의견서를 반복해서 내느라 속된 말로 빡센 날이 많았다. 여기에다가 부서장하고 업무 외적인 걸로 마찰도 있었다. 나는 어떤 순간이든 사람이 먼저여야 한다 믿고, 실제로 그러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 분은 직원을 도구로 여기는 것처럼 행동할 때가 많다. 본의가 아니고 부서를 책임지는 부서장이니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고 하면 일말의 이해는 가능하겠지만, 기본 성향이 나랑 정반대라 매번 어렵다.


작년에 썼던 글의 일부다. 다시 읽어도 꽤 씁쓸하네.


“일 힘든 건 그 순간만 견디면 되는데, 준비 없이 시작된 상사와의 갈등은 맞서 싸울 수도 물러설 수도 없이 나만 갉아먹히는 영혼 소모전 같은 거더라. 와중에 감사 핑계 대고 휴가 감행.”


작년에 이러고 가졌던 휴가 뒤에 얼마나 많이 편안해졌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루 일과가 같은데 뭐 얼마나 달라졌을라고. 그래도 시간적으로 충분한 쉼이 되었고 그 덕분에 일 년을 또 버틴 거겠지. 올해 Block leave까지 남은 기간 동안도 잘 싸워보자. 지쳐 쓰러지지 않을 정도로만. 그러고 나서 내 엄마 만나러 가야지. 푸근하고 소박한 엄마 밥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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