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미안한 착각

그리고, 모처럼의 해방감

by 정은유


예정대로 오늘 재택근무를 했다.


수험생이라고 8시까지 등교하는 아들을 깨워야 해서 기상 시각은 출근날과 같았지만, 일어나서 잠옷 차림 그대로 업무 시작한들 문제 될 게 없는 것은 짜릿함 그 자체였다. 아, 이참에 나도 다른 부서처럼 재택 하고 싶다.


일 년에 두 번 있는 재택 훈련 때마다 큰일이 터져서 오늘도 살짝 긴장상태였다. 재택이니 몸은 편하겠지만 예기치 않은 일이 생기면 나의 상사는 만만한 내게 예민하게 굴 테니까. 그럼 난 또 움츠려들 테고...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패턴인데도 익숙해지지 않는 건 내 잘못이 아닌 일에 기분 나쁜 소리까지 들어가며 차출된 것에 대해 불합리함을 느껴서겠지.


그런데 오늘, 다행히도 아무 일 없었다. 팀원들 각자 위치에서 자기 할 일들 하고 나도 내 일에만 집중하며 하루를 보냈다. 금요일은 원래 덜 바쁜 날이기도 해서 온전히 평온한 하루였다. 이것만으로도 하루 정리가 가뿐했을 건데, 오후 늦게 있었던 어떤 일이 내 기분을 더 날아가게 해 주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해방감인지 모르겠다.




팀에 유일한 남자 직원이 있다. 입사 4년 차 접어드는 과장인데, 사람이 모난 데가 없이 누구에게 언제나 수더분하다. 그도 감정 있는 인간이니 화나는 순간이 있을 건데 절대 티 내지 않는다. 가끔 억지 부리는 고객과 통화하고 나서도 부르르 하지 않고 정 못 참겠을 땐 아무도 들리지 않게 혼잣말 내뱉고 만다. 후배지만 배울 점이라 생각한다. 전화응대를 많이 하는 직원 중 하나인데 태도 관련으로 민원 들어온 적이 없다.


이런 부분이 그의 강점이라면 아쉬운 점은 주요 업무인 OOO 심사 외에는 잘 모르는 게 많고 더 큰 문제는 적극적으로 배우려 하지 않는다는 거다. 당사자가 들으면 억울하다 할지 모르는데, 팀장인 내가 3년 넘게 지켜본 바로는 그렇다. 이것에 대해 여러 번 피드백 주었고, 어려운 걸 묻거나 도움 청할 때 성실히 지원해 주었다. 그러나, 기대만큼 착착 성장하지 못하는 느낌이 들었고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체념해 왔던 것 같다.




그의 업무에서 8월에 특이건이 있었다. 월단위로 우리 쪽에서 넘긴 자료로 결산하는 부서에서 이번 주 내내 온갖 질문을 하는 거다. 우리가 OOO을 잘못 지급했다는 식으로 나오는데, 그럴 리가 없다 싶다가도 불안했다. 고객 돈이 걸려있으니 신속한 확인이 필요했다.


당연히 내 도움을 구할 줄 알았는데 알아서 하려는지 별 질문이 없었다. 먼저 퇴근하고 다음 날 아침에 메일함을 열었는데, 조목조목 처리 근거를 설명한 메일을 보내놓았더라. 내가 더 보탤 것이 없었다. 조금 놀랐고 그렇게 종결될 줄 알았는데...


이틀 만에 또 다른 직원이 구구절절 사설을 늘어놓으며 이번엔 자료 작성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거다. 그도 재택이어서 메신저를 보냈다. 당최 나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니 잘 읽어보고, 우리한테 별 임팩 없으면 돈이 잘못 나간 건 아니니 결산 부서가 원하는 대로 세부정보만 고쳐주라고 했다.


한 시간 후쯤 메신저가 오더라. 자료 안 고치기로 헸고 관련 내용 넣어서 회신도 보냈단다. 그 직원의 행태 상 벌써 정리가 된 것도 신기했는데, 몇 줄 안 되는 메일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와우! 두 번에 걸쳐 완벽한 KO 승이구나!


누구 도움 없이 혼자 배경지식 공부하고, 이번 케이스에 기준 대입해서 결괏값 만들고, 그걸 타인에게 근거 갖추어 핵심만 요약해서 이해시킨 것까지... 본인의 주 업무가 아닌 부수업무는 세상 약하기만 하던 직원이 기승전결 전반을 100% 주도했다는 사실이 오늘의 재택근무를 아름답게 마무리해 준 기폭제였던 거다.




정신 차리고 보니 퇴근시간, 진심 다해 격려를 보냈다. 차마 표현하지 못한 미안함을 담아서.

- 이렇게 잘할 건데 조바심 내지 말고 기다려줄걸, 더디지만 성장하고 있었는데 배울 마음이 없는 거 같다고 착각했어.


더불어,

마침내 알을 뚫고 나온 새처럼 본인의 한계를 멋지게 뛰어넘은 그에게 나도 (어제 말한 바 있는...) 선한 영향력을 가진 선배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