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고서 보였던 것들

경로이탈이 이탈이 아닌 이유

by 정은유


오늘은 '경로 이탈'에 대해 얘기해 볼까 한다.


이 단어가 나오면 절대 안 하고는 못 배기는 얘기가 있다. 말하기 부끄러운데, 글쓰기 계속하다 보면 언젠간 나올 얘기라 오늘 그냥 공개하련다.


나로 말하자면 심하게 길치다. 어쩜 공간 감각과 방향감각이 이렇게나 없는지, 길치 수준으로 우열을 가린다면 넉넉히 상위에 들 거라 자신한다.




20여 년 전, 남편과 연애 초반에 고속 터미널에서 만나기로 한 적이 있다. 탁 트인 곳이고 여러 번 가본 적 있어서 만남 장소 찾는 게 뭐 얼마나 어려울까 했는데, 오판이었다. 터미널 앞에 그렇게나 많은 지하 출구가 있는 줄 몰랐다.


저쪽으로 나가야지 하고 방향감 딱 잡고 지하로 내려갔는데, 사방이 막힌 공간에 들어선 순간 “여긴 어디, 나는 누구“ 가 되어버리는 마법. 이쪽인가 보다 싶어 나가면 엄한 출구, 다시 내려가서 다른 쪽으로 나갔더니 정말 다른 출구. 그러기를 거짓말 좀 보태서 열 번쯤 반복한 거 같다.


이쯤 되면 남편(당시 남친)에게 나 있는 곳으로 오라 하는 게 빠를 수 있는데, 남편은 대구에서 태어나 거기서 쭉 살아온 사람이다. 서울이란 동네 전체가 낯선 사람에게 나 있는 곳으로 알아서 오라 할 수 없었다. 엄청난 헤맴 끝에 만난 우리. 그때의 서럽고 반갑고 애틋한 기분이 이 순간 새록새록 떠오른다.


이상 길치로 살면서 겪은 일 중 제일 난감 버전을 적은 거고, 목적지를 한 번에 찾지 못해 길 위에서 헤맸던 일을 셀 수가 없다. 경로 이탈은 그래서 나한테 일상다반사의 해프닝이자 곤혹이다. 일행 없이 홀로 낯선 곳을 찾아갈 때의 두려움이 싫어서 웬만하면 그럴 일을 피하고 보는 것 같다. 이게 오늘날 집순이가 된 이유 중의 하나일 수도 있겠다.




예정된 경로를 벗어나는 것. 어감 자체에 실패 비슷한 느낌이 들어있는 것도 같다. 그런데, 내 경우에 대입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그동안 겪어온 숱한 경로 이탈의 경험이 남긴 추억들을 떠올려 보면 나쁘기만 했던 건 아니기 때문이다.


지도 앱을 본들 방향을 모르니 갈 곳 잃은 부랑자처럼 길 위에서 당황했던 순간이 많았지만, 그때마다 친절히 도움 준 사람들이 있다. 내 쪽에서 먼저 정중히 물으면 열 명 중 열 명 모두가 최선을 다해 가야 할 방향을 일러주었다.


막막함이 풀리는 순간 눈물이 날 만큼 후련함과 동시에 세상은 아직 따뜻하다는 사실이 좀 전까지의 방황을 의미 있게 승화시켜 주는 느낌이었다.


만나기로 한 곳을 지척에 두고도 출구 하나를 제대로 못 찾아서 이리저리 헤매던 나를 마냥 안쓰럽고 귀엽게 봐주던 구 남친이자 현 남편과의 웃픈 추억처럼,


앞으로 무수히 겪게 될 경로 이탈 현장에서의 방황이 그저 방황으로만 끝나지 않기를.

고마운 이들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마침내 도착한 목적지에서 좋은 일만 있기를.

그리고 그런 순간들이 쌓이고 쌓여 낯선 길에 기꺼이 나설 용기가 되어주기를, 이 밤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