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광(北極光)

<12번째 솔저> (The 12th Man, 2017)

by 최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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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주의

추위에도 얼지 않는 것들이 있다. 하늘은 얼지 않고 별은 빛나 해는 흘러갔다. 노르웨이인은 그런 하늘을 몹시 소중하게 여겼다. 그의 동료가 하늘을 우러러 보며 물었다. "설마 독일이 북극광도 뺏어간 건 아니겠지?" 하지만 얀 볼스루드는 실패한 군인이 되었다. 나치로부터 조국을 탈환하고자 한 ‘마틴 레드 작전’의 시작에 앞서 동료 저항군 11명이 체포당한 것이다. 얀은 홀로 온몸으로 달려 도망쳤다. 뒤에서 독일군의 총알소리가 빗발치고 얀의 앞은 끝없는 산맥이 흐른다. 더욱이 부상으로 인해 발에서는 피가 흘렀다. 얀은 어떠한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 됐다. 얼어죽거나 독일군의 총알에 죽거나, 그러나 얀은 주저하지 않고 얼어죽는 것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추운 물에 뛰어들어 독일군을 피해 도망쳤다. 인간이 살아남을 수 없는 수온이었기에 독일군은 더이상 쫓아오지 못했고 얀은 겨우 근처 오두막을 찾아다니며 몸을 피할 수 있었다. 그 도중 산파의 도움으로 부상을 겨우 감싸맨 얀은 노르웨이를 탈출하고자 계획하게 된다. 그리고 동시에 잔인하고 집요한 나치 친위대 슈타게는 얀을 찾으려고 의술을 익힌 자들을 하나하나 찾으러 다니고 있었다. 발의 통증은 심각해지고 얀의 숨통은 조이는 상황, 어쩌다 이른 오두막집에서 수용소에서 일하는 간호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지쳐 쓰러진 얀을 돌보고 결국 썩어가는 발을 치료해주며 그가 눈을 뜨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수용소에서 일하며 보고 들은 바를 얀에게 전해주었다. 동료들이 고문을 당했고 아무도 얀의 정보를 말하지 않았으며 그러다 죽었으며 결국 처형될 것이라는 소식들. 얀은 조용히 입을 틀어막을 수 밖에 없었다. 그의 뒤에는 새까만 노르웨이의 하늘에서 별이 빛날 뿐이었다. 그의 눈은 나즈막히 말을 건넸다. 왜 자신만 살아남은 것인지 그의 눈은 그것을 참 궁금해했다, 분노했다, 슬퍼했다, 참을 수 없었다. 슬픔을 억누르는 분노는 얀의 눈빛에서 불티가 되었고 얀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렇다, 얀은 살아남을 수 밖에 없었고 그래야 했다. 도와준 이들이 위험에 처하지 않게 얀은 출발할 상태가 되자마자 떠났다. 이후 얀의 영혼은 처절히 짓밟히고 괴로워하며 죽고 싶고 포기하고 싶어지는, 혹독한 탈출을 맞게 된다. 인간성이 조각나고 오직 그와 민족의 생존만을 위해 도망친다. 얀은 민족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건 여행자였다. 자전거를 타고 세계일주를 하던 즐거운 얀을 포기하고 오직 노르웨이를 위하여 군인 얀이 되었다. 이전의 삶을, 그것도 나라나 민족이라는 추상적인 것들 때문에 포기한다는 것은 자아를 희생하겠다는 이야기이다. 자신을 민족의 삶으로 대체시키고 인간성을 스스로 없애겠다는 것. 그래서 사람들도 그도 '얀'의 생존이 곧 나라와 민족의 삶이라 여겼다. 생존본능이라는 자연적 본능을 버리고 만들어진 가치 따위에 어떻게 목숨을 기꺼이 버릴 수 있을까? 그러한 추상적인 '민족', '국가'라는 개념은 대체 무엇일까? 어떻게 개인을 집단체에 소속되게 했을까?

놀랍게도 민족이라는 개념이 생긴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서양사에서 민족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는 15세기 영국-프랑스의 백년전쟁에서 잔다르크가 영웅으로 활약하고 희생하면서라고 보고 있다. 인류 대부분을 민족보다는 이웃, 가족, 마을 공동체 소속으로 살아온 것이다. 이웃, 가족, 마을이라는 것은 국가 혹은 민족에 비해 작고 객관적이며 직시할 수 있는 관념이다. 반면 국가와 민족은 조금 더 시야를 넓혀 이웃, 가족, 마을 모두가 연결되었지만 인지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알 수 없는 추상적인 관념이다. 직접 느낄 수 있는 것에서 없는 것으로 확장시키려면 그럴 힘을 가진 무엇인가 필요하다. 영국-프랑스의 백년전쟁에서 잔다르크의 영웅적 행보를 프랑스 왕실에서 영웅으로 상징화시켰다. 전쟁에서 아군의 사기를 드높이고 적군을 압도하기 위하여 '통일된 상징'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더욱 큰 소속감과 연대감을 가진 인간은 자신의 무엇을 희생하면서 상징을 지켜냈다. 상징은 단순히 단어와 이미지 따위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인간의 사회적 소속감을 투영하는 고난이도의 공감이다. 개인적 차원의 동정심, 위로의 차원을 뛰어넘어 모르는 타인까지도 나의 공간에 포함시키는 기술인 것이다. 그러한 기술은 시련을 통해 강화되었다. 그리고 전쟁에서 적군의 상징을 유린해 전시하는 행위를 통해 더욱 효과를 발휘하였다. 노르웨이라는 국가의 정체성에 있어 북극광(北極光)은 거대한 상징이었다. 노르웨이인들은 국가의 존립 여부를 북극광(北極光)이라는 단어를 통하여 비유적으로 되물었다. 노르웨이는 알다시피 매우 척박하고 추운 땅이다. 집결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그런 땅, 누군가는 떠나간다. 오랜 시간이 지나 노르웨이인이라는 민족이 탄생하였을 때 민족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결속할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특히나 나치의 탄압을 받아 사라져가는 즈음에는 새로운 상징이 필요했다. 국가 차원의 어려움 속에서 단결해낼 잔다르크 같은 영웅 말이다. 영화 속 노르웨이인들은 북극광을 빼앗길 수 없다말하며 얀 볼스루드를 나치로부터 지켜낸다. 노르웨이의 정체성과 존속을 얀 볼스루드에 투영시킨 것이다. 나치의 추적을 피해 살아남는 것이 희망, 그만이 살아남은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말, 그를 지키는 것이 정체성과 신념을 지키는 것이라는 말은 얀 볼스루드가 영웅으로 상징화된 것을 잘 보여준다. 특히나 '빛(光)'에 통상 '희망'이라는 의미가 부여된 것으로 미루어볼 때, 북극광이라는 것은 북극(노르웨이)의 광(희망)이라 해석할 여지가 있다. 그렇게 이름도 알 수 없는 노르웨이인들이 얀을 돕고, 얀이 모르는 사이에 나치 게슈타포에 의해 처형 당한다. 모두의 피로 생을 이어가는 얀 볼스루드는 인간 얀 볼스루드를 지우고 노르웨이 군인 얀 볼수루드로 태어났다. 지독한 고독, 발가락이 문드러지는 고통, 추적당하는 꿈을 등에 지고 해골이 되었을지라도 자신을 도운 사람들을 생각하며 노르웨이의 독립을 위해 탈출한다. 자신의 마지막 총알을 두고 노르웨이의 총에 죽겠다는 그의 말은 상징을 자기 자신에도 내면화한 모습을 보여준다. 상징을 부여한다는 것이 개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주는 대사였다. 끝없는 책임을 지는 책임감, 얀 볼스루드는 개인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파괴적인 모습. 자기 파괴로 이어질 뻔 했지만 그 끝에서도 자신을 버리고 노르웨이를 떠올려 마지막 총성을 울렸다. 국경을 눈앞에 두고 자유로워서일까, 나치에 잡혀 고문을 당하더라도 감수하겠다는 군인의 의지일까? 그 총성과 함께했던 의미심장한 미소가 마음에 걸린다.

"설마 독일이 북극광도 뺏어간 건 아니겠지?" 그의 동료가 쳐다보며 물었다. 얀 볼스루드는 같은 하늘을 보며 미소지었다. 노르웨이의 추위에도 하늘은 얼지 않고 별은 빛났다. 얀 볼스루드는 '마틴 레드 작전'에서 실패했고 나치의 추적을 피해 도망갔다. 하지만 북극광(北極光)은 여전히 노르웨이 하늘에 있었다. 나치 친위대 슈타게는 등지고 있었기에 그림자만 따라다녔을 뿐이었다. 얀 볼스루드는 탈출 이후 종전과 그 이후까지 노르웨이의 빛으로서 하늘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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