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와 한정적 인간

<올리버 트위스트> (Oliver Twist, 2005)

by 최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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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호기심이 낭떠러지 바다를 극복해 나아가던 시기였다. 인간을 속박해왔던 중세를 뒤로하고 유럽인은 인간 본연의 감정들을 표출해냈다. 자유의지를 깨달아 더 큰 세계로 날아오르고자 한 것이다. 억압에서 벗어난 인간의 쾌락이야말로 한계를 짓지 않는 무한한 기쁨일테니 막을 수 없었을테다. 해방되어 가는 인간들의 욕망은 기어코 바다 건너 아메리카 대륙과 아프리카로 향하였다. 하지만 그릇된 욕망이었다. 무한은 오히려 혼란을 가져오기 일쑤인 법. 욕망은 곧 추악함으로 바뀌어 그 대륙들에 살고 있던 수많은 인간을 살해하고 상품화하여 노예무역을 행하였다. 그리고 착취를 발판삼아 유럽은 ‘자본’을 형성하게 되었다. 산업과 상업의 발달은 유럽을 부유한 국가로, 위대한 국가로 발돋움하게 해주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 보상은 돌아가지 않았다. 그 자들에게는 국력 향상의 책임만 부여됐을 뿐 그에 걸맞는 권리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본과 국가의 폭력성에 맞설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 자는 죽을 때까지 착취당하였다. 나이, 성별 등은 착취에서 벗어나는 데에 중요하지 않았다. 자본을 가지지 못한 자는 노동 가능 여부로 구별되고 모조리 핍박 받았을 뿐이었다. 현대 자본주의를 공정한 경제원칙으로 찬양하지만 그 시작은 가장 여린 존재들을 파먹음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자본주의 역사상 이루어진 착취는 시선을 주지 않는다. 그것을 직관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 곧 반항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정의(justice)'라고 정의(definition)된 사상이나 체계에 대한 비판과 반성 없이 진보하고자 한다. 과오를 바라보지 않고 발전한다면 그 방향은 어디로 향하겠는가? 그것이 올바르다고 할 수 있는가? 단순히 '과거에 이러한 일이 있었다.' 정도로 인정하는 정도라면 세계는 한스러운 영혼을 달랠 수 있는 것인가? 성장가능한 자본주의를 위해서 우리는 자본주의가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지 직관해야 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회고하며 반성해야 한다. 인간의 올바른 성장은 자기반성과 회고로부터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화 <올리버 트위스트>는 그러한 성찰에 영감을 줄 영화라 할 수 있다.

산업혁명은 현대 문명의 기초적인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이 시기 즈음부터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능이 충실히 경제활동을 통하여 실현되고 정치에서 배제되었던 사람들이 하나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일부에 한정됐을 뿐, 가난한 사람은 해당되지 않았다. ‘가난한 것은 개인이 게을러서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는 빈곤관이 팽배했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은 인간의 본능을 발현하고 사회에 목소리를 낼 자격조차 없었던 것이다. 몸이 아픈 사람, 어린이, 노인 등등 사회생활에 필연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만한 사람도 그런 평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산업혁명 이전 르네상스 시대부터 발견해왔던 인간의 존엄과 가치는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에 한정된 것이었다. 산업혁명 시대에 대하여 더욱 알아보자. 농촌에서는 산업혁명으로 인한 인클로저 운동이 진행되었다. 인클로저 운동은 산업 활동으로 인한 이익을 위하여 농민의 토지를 빼앗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고 많은 농민들이 경작권을 잃고 농업노동자로 살아가게 되었다. 동시에 농업기술이 발전하자 농업노동자의 중요성이 줄어들게 되었고 이마저도 잃은 노동자들은 도시로 향하여 임금노동자가 되었다. 이로 인해 식량의 공급 부족해지면서 곡물 가격이 인상되었고 농촌과 도시는 황폐화되었다. 빈민의 수가 급증하자 영국 정부는 이를 통제할 필요성이 커졌다. 구빈법을 통하여 빈민을 노동가능 여부에 따라 구분하고 구빈원에 수용하여 강제 노동을 시킨 것이다. 시간이 흐르자 구빈법에도 점차 문제점이 생겼다. 구빈법 체계 속에서 빈민에 대한 가혹 행위가 문제된 것이다. 이를 반영하여 길버트법, 스핀햄랜드법이 제정되었고 복지제도로서 구빈제도가 발전한 듯 싶었다. 하지만 당시의 빈곤관과 구빈 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재정 능력으로 인하여 또 한 번 위기에 맞았다. 빈민을 통제하고자 하였지만 구빈비용 상승 및 인구과잉, 악용하는 고용주, 노동생산성 저하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영국정부는 구빈제도의 수급자격에 해당하는 사람의 수급신청을 의도적으로 억제함으로써 복지 지출을 줄이고, 퇴보하여 구빈법을 잇는 잔혹한 법이 만들어진다. 바로 신구빈법이다. 신구빈법은 스핀햄랜드제도와 길버트법의 폐해를 개선하기 위하여 원외구조금지원칙과 임금보조제도를 폐지하였다. 원외구조는 노인과 병자 등 노동을 할 수 없는 상태의 빈민으로 한정되었다. 또한 일반 노동자의 최하위 임금보다 낮은 수준으로 구제하여 복지의존성을 낮추고자 하였다. 신구빈법은 세 가지 원칙에 의하여 시행되었는데 첫째, 열등처우의 원칙은 빈민에 대한 낙인과 작업장 수용으로 인한 거주 및 이주의 자유를 박탈, 선거권 박탈 등의 패널티를 부과하여 빈민에 대한 핍박을 강화하였다. 둘째, 작업장 수용의 원칙으로 빈민을 신체 무능력자(노인 및 병자 등)와 어린이, 노동능력이 있는 여성, 노동능력이 있는 남성으로 분류하여 작업장에 수용한 것이다. 셋째, 전국적 통일의 원칙은 ‘중앙구빈위원회’를 설치하여 중앙 정부가 전국의 구빈 행정을 관할한다는 행정의 중앙집권화 원칙이다. 세 가지 원칙 속에서 이루어진 신빈민법은 구빈 비용 감소라는 제정 목적을 달성하였지만 법의 내용이 잔인하다는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다.

영화 <올리버 트위스트>의 주인공 ‘올리버 트위스트’는 10살 즈음의 인물로 설정되었다. 영화 속에서 고아인 주인공이 처음 간 곳이 작업장이었고 어린이들이 꽉 들어차 기계처럼 노동을 하는 장면에서 올리버 트위스트는 신구빈법의 대상에 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된 노동 후에는 영양가 없고 너무나 적은 양의 식사가 제공되었고 이후에 어린이들은 빼곡하게 누워 잠을 취한다. 그런 날들의 반복 속에서 올리버 트위스트는 식사를 더 제공해달라는 요청을 하였다가 재판을 겪게 되고 이후 작업장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갈 곳이 없던 올리버 트위스트는 작업장의 소개로 작업장 외에서 노동을 하게 되었고 가혹한 폭력행위를 겪게 되자 살기 위하여 런던으로 향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런던은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쥐와 시궁창 냄새가 뒤끓고 바닥에는 술과 거지들이 한판하는 그런 곳이었다. 아무도 서로에게 신경쓰지 않았고 바들바들 길구석에서 허기와 갈증에 말라가는 그에게 손을 내밀어준 사람은 오직 소매치기 소년이었다. 그의 도움을 받아 허겁지겁 밥을 먹을 수 있었고 소매치기 하여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생존을 위해 매춘일을 하는 소녀들을 보았고 자기 자신도 그런 삶을 살아야할 것 같았다. 아마 올리버 트위스트의 초롱초롱한 눈빛은 눈물 자국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날 올리버 트위스트와 소매치기 소년들이 손수건을 훔쳐 달아나기로 계획한 그 날, 올리버 트위스트는 붙잡혔고 재판장에 서게 되었다. 긴장, 중압감, 갈증에 판사의 질문에도 "워터(물)"이라 답하는 그. 어린 마음에 가혹한 생활은 갈증 덩어리였다. 올리버 트위스트는 재판 도중에 쓰러졌고 다행히 그를 좋게 본 소매치기 피해자 아저씨가 데려와 보살핀다. 그의 초롱초롱 빛나지만 왜인지 슬픈 눈에 마음이 흔들린 것이다. 상황이 그를 소매치기 하게 하였고 본성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저씨는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올리버 트위스트가 일어나자 아저씨는 소매치기를 그만두고 같이 살며 일을 배우겠냐고 물었다. 결국 올리버 트위스트는 정갈해지고 쌓아온 글과 예절을 베풀며 행복한 자리에 서게 되었다. 하지만 사라진 올리버 트위스트를 찾아온 소매치기 소년들, 그들은 오히려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아저씨를 속여 집안 재산을 다 끌어오라고 협박하며 시킨다. 그렇게 올리버 트위스트는 과거의 행동에 반성하기 시작하였고 영화도 클라이맥스로 향한다.

영화 속에서도 실제 그 사회에서도 어린이는 보호받아야 할 존재로 여겨지지 않았다. 왜 어린이는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인데 노인과 병자와 달리 노동 가능한 인구로 취급되었을까? 기본적으로 근대 사회에서 인권은 남성, 백인, 자본자라는 자격이 있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전유물이었다. 또한 어린이는 어른의 장난감, 소유물, 구제가 필요한 영혼 정도로 취급받았으며 7세 정도가 되면 ‘작은 성인’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아동을 노동 가능한 성인으로 바라본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발달과 근대 사회 배경에서 가족은 소비의 단위로 여겨지기 시작하면서 아동의 가치가 저하된 것도 있다. 즉, 자본주의와 근대 사회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이라는 것을 한정적으로 가치 있는 자에게만 부여하여 봉건 사회와 비슷한 구조를 연출한 것이다. 봉건 사회의 신분이라는 자격이 근대 사회에서 인권이라는 자격으로 전환된 것 아닌가? 봉건 사회를 타도한 것은 모든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되찾기 위함이 아니라 단지 지배 계급을 바꾸고 싶었기 때문이었는가? 인간의 자유와 존엄은 사회적 약자에게 해당하지 않는 것이라면, 르네상스 시대부터 출발한 인간에 대한 탐구와 인간의 본능, 인간의 능력 등의 ‘인간의 논의’는 진정히 인간에 대한 탐구가 맞을까? 이 점에서 근대 철학에 대한 회의감을 느낀다. 인간에 대한 탐구로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철학적 논의는 철저히 여성과 아동 등을 배제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연구는 인간에 대한 연구라고 부를 수 없다. 백인 남성 권력의 소유를 정당화 하는 이론일 뿐이다. 근대 사회와 당시의 빈곤관은 그럼에도 인권에 대한 더욱 폭넓은 정의를 통해 발전해 나아갔다. 근대에서 백인 남성 자본가 계급에만 존재하던 인권이 차근차근 여성에게도 아동에게도 노동자 계급에게도 주어진 것이다. 이것은 아동, 여성, 노동자에 대한 열악한 처우가 정당화될 수 없다는 전제가 깔린 것이고 이들의 환경이 문제로 인식되고 합의되었음을, 인간으로 바라보아졌다는 것을 말한다. 어떻게 그러한 합의가 이루어지게 된 것일까? 가장 여리고 무조건적으로 지켜주어야 할 아동에 대한 인식 변화 과정을 통하여 탐구를 이어가보고자 한다. 근대 사회에서 아동은 작은 성인이자 가장의 소유물 정도로 여겨졌기에 노동이 합리화 되었다. 하지만 아동 노동은 숙련노동자로 성장하는 데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아동 노동은 노동력의 안정적 재생산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아동 인권은 초기에 ‘인간이기 때문에’라는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미래의 노동력을 걱정한 데에서, ‘미래의 노동자’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이는 ‘국민국가’라는 개념이 등장하면서 국가가 통일적으로 구성되어야 하는 점이 강조되었기 때문에 그를 위하여 국민을 교육시키는 방법이 주장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아동은 노동 현장에서 벗어나 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며 미래를 위한 수단으로 여겨지고 성인과 다른 존재라는 점이 인정됨으로써 아동에 대한 인식이 변하게 되었다. 이러한 아동에 대한 인식이 변함에 따라 영국의 구빈 제도도 발전하게 되었다. 기존의 신구빈법을 대신하여 공장법이 제정되었다. 아동 노동과 교구도제의 생활 개선 운동이 확대되고 도제 학대 사건이 문제되면서 상대적으로 약자의 지위에 놓여있는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도제 기간 중의 환경을 개선하고 노동 시간에 제한이 생겼으며 야간작업을 금지하는 규정이 생겼다. 그리고 빈민의 자녀로 구빈원에 소속되면서 공장에 고용된 자를 주요 대상으로 하여 일정 기준에 해당하는 모든 공장에 적용되었다. 공장법 이후에는 점차 노동 시간 제한을 강화하고 연령별로 분류하여 적용하며 구체화되어갔다. 공장법은 아동의 보호에 중점을 두어 규제를 하기 위하여 중앙집권적 기구를 창설하였고 연령 및 성별에 따른 구분을 두지 않아 폭넓게 적용되어 더 많은 아동을 보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국가 개입의 근거가 되어 복지의 영역이 확대되게 하였다. 인권이라는 개념이 ‘인간’이기 때문에 발전한 것이 아니라 다른 목적을 위하여 '수단적'으로 발전하였다는 점이 굉장히 모순적이지 않은가? 인간의 자유와 권리 증진을 위해 최고의 수단이었던 자본주의 마저도 보이지 않는 작은 존재를 희생시키면서 성장하였다. 그리고 아직도 세계에는 아동 노동이 존재하고, 그것을 몰라도 알아도 소비한다. 인권이라는 가치는 어찌보면 그것을 누릴만한 환경에 속한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한정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 참조문헌 : 강민지,정광순. (2009). 아동권리협약 이행사항에 나타난 아동권리 내용 분석. 초등교육학연구, 16(2),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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