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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짱 Apr 15. 2024

최진영 장편소설 <해가 지는 곳으로>속 문장들


독서 모임 '사분면'의 다섯 번째 책. 직전에 읽었던 책이 SF 소설이었는데, 내용이 꽤 힘들었던 터라 이번엔 비교적 가볍게 읽히는 소설을 선택했다. 몰입해서 읽었던 만큼 여운이 길게 남은 책. 바이러스가 퍼진 세상을 배경으로 그리는 고유한 인물들의 이야기. 그 속에 문장들을 몇 가지 옮겨보겠다. 




농담과 웃음을 고향에 버리고 온 사람들

가족과 친구, 소중한 고향을 버리고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애쓰는 어른들. 어른들은 웃음을 버렸다.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하지 않았고, 싸우거나 흉한 말을 내뱉는 것도 아닌데 계속 서늘해지기만 했다. 폐허가 된 세상을 견디는 큰 슬픔과 이루 말할 수 없는 막막함이 와닿는 문장.




건지에게 꿈이란 전에 닿아 본 적 없는 새것, 실패해 본 적 없어 재지 않고 있는 그대로 품을 수 있는 첫사랑 같은 것이었다.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다 잃어도 꿈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아직 닿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간절해지는 것일까? 이 같은 상황에서 계속 꿈꿀 수 있을까? 상상조차 하기 싫은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나의 것을 잃지 않는다는 것, 얼마나 단단해야 가능할까. 읽는 내내 건지에게 마음이 갔던 이유다. 




도리가 내게 그것을 주어서 내가 그것을 얼마나 원하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 먹을 수도 입을 수도 없지만 나를 좀 더 나답게 만드는 것. 모두가 한심하다고 혀를 내두르지만 내겐 꼭 필요한 농담과 웃음 같은 것. 

어른들은 잃어버리고 말았던 농담과 웃음 같은 것들이 더 안타깝다 느껴졌던 이유는 너무나 원했기 때문이었을 거다. 나답게 만드는 것은 짐짓 무용해 보이는 것들이므로. 무용하기에 당연하다 느껴지는 것들이고, 가장 쉽게 버리게 되는 것들이지만 그것이 곧 나답게 만들어주는 것들이므로. 어떤 상황이 닥쳐도 그것을 잃지 않고, 또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 친구로 남고 싶다. 




미루는 삶은 끝났다. 사랑한다고 말해야 한다. 

삶은 미루는 것들이 많다. 이유도 각양각색이다. 저마다 그럴듯하다. 하지만 그럴수록 돌아오는 후회는 더 커지기 마련이다. 손쓸 겨를 없어지는 순간이 되어서야 생각한다. 미루는 것이 행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어려운 일이어야 했던 것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만큼 미루지 말아야 할 것도 없다. 지금 당장 사랑한다고 말하자. 가장 먼저 떠오른 바로 그 사람에게. 




내게는 책임감도 광기도 있었다. 그 두 가지가 전혀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바이러스와 공포에 압도당해 미쳐버린 사람들을 그저 악인이라 할 수 있을까? 그들 역시 광기 어린 책임감에 짓눌려버린 것은 아닐까. 나라고 안 그럴 자신이 있는지 모르겠다. 책임감이 강한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늘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고민할 때가 많다. 압도당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더 많이 사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들에겐 이들의 기적이 있어.

모두의 기적은 저마다 다르다. 나의 기적이 다른 사람의 기적이 될 수 없고, 반대 역시 그러하다. 저마다의 기적. 나의 기적은 뭘까? 지금 내가 꿈꾸는 기적은 뭘까. 이뤄졌으면 하는 나만의 기적 하나쯤은 가지고 살아야 할 것 같다. 그것이 나를 나답게 만들어 주고, 세상을 세상답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마음껏 사랑하게 해주는 것 같다. 




턱밑까지 닥친 재앙을 피해 집을 떠나면서도 책이나 이어폰 챙길 생각을 했다니. 이어폰을 보니 음악을 듣고 싶었다. 음악을, 듣고 싶었다.

지금 당장 최소한의 짐을 싸서 집을 버리고 도망가야 한다면, 어떤 것들을 챙기겠는가? 이 질문을 거듭하다 배낭 가방을 사서 짐을 채우기 시작했다. 꼭 필요해질 것들만을 담아두었는데, 이 책을 읽고서 이어폰을 넣었다. 책을 한 권 담았다. 필름 카메라를 넣었다. 듣고, 읽고, 남길 것이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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