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에의 강요

강요받지 않고 스스로 생활의 깊이를 갖는 법

by EURA

이십 대의 나는 진지해지는 것을 경계했지만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는 진지함과 심각함을 제대로 구별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태생이 요즘 말로 <진지충>이라 자칫 정신을 놓으면 코를 발름거리며 누구도 발 들이기 힘든 난해한 세계를 설명하는 모습이 나도 모르는 사이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고, 상대가 가볍게 던진 질문에 그는 관심 없는 나만의 의미를 과도하게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마다, '아 진지해지지 말아야지'라고 스스로를 훈련시키기도 했었다.


그것을 '진지함'이라고 말하려니 좀 부끄럽지만, 많다고 할 수 없는 경험이 쌓이고 나니 그 '혼동의 시간'을 요령이 부족했던 탓이라고 에둘러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전히 어렵지만, 이젠 농담이 필요한 공기엔 농담을 던질 줄 알고 진지함이 필요한 자리엔 내 생각을 적당한 온도로 말할 줄 알게 되었다. 물론 시간이 한참 지나면 지금 느끼는 어려움을 다시 한번 떠올리며 새로운 요령이랄까 달라진 처세랄까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진지함과 심각함의 차이가 뭐냐 묻는다면, 우선은 '여유'의 유무라고 하겠다.

진지함에는 여유가 있어서 타인을 배려할 공간이 있다. 심각함이란 여유로움보다는 절박함의 영역이라, 더 강한 목적성을 띄고 그에만 매몰되는 밀도 높은 상황이다. 진지한 상황에서 나오는 농담은 맥락을 부러뜨리지 않지만, 심각한 상황에서의 농담은 어색해지기 쉽다. 내게 진지함이 사려 깊음의 동의어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어쩌면 이 부분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실감 나지 않던 '삼십 대'라는 말이 제법 익숙해진 지금의 나는 진지함을 잘 다루는 법을 알고 싶다. 너무 무겁지도 또 너무 가볍지도 않게. 적당한 무게감으로 진지한 태도를 지니는 것의 어려움을 매일 실감한다.


진지함을 잘 다룬다는 것은 유쾌함을 잘 다룬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제대로 진지할 줄 아는 사람은, 상황에 맞는 적절한 유쾌함을 환기시킬 줄 아는 사람이니까. 진지함을 잘 다루는 사람은 그를 감싸는 공기를 유연하게 순환시키는 힘 마저 가지고 있다. '완전'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런 어려움은 나 몰라라 하고, 진지함과 거리를 둔 채 마냥 천진하게 살아가면 좋으련만 점점 더 진지함을 유지해야 할 이유는 많아진다. 늘어나는 책임감, 프로페셔널함에 대한 요구, 선택의 기회비용... 하지만 많은 이유를 다 차치하고서라고 내가 '진지함'에 매달리고자 하는 이유는 그것이 가능하게 하는 '깊이감' 때문이다.


어떤 대상을 평가하는 데 있어 '깊이'는 내게 굉장히 중요한 지표였고 때때로 내가 쉽게 내뱉을 수 있는 감상을 위한 어휘가 되어주었다.

'그 작가는 깊이가 없어'

'깊이 없이 아무렇게나 하는 사람들은 싫어'

'깊이가 없는 세상이야'

라고 말 하기는 너무나 쉬웠다.


그러나 나는 그놈의 '깊이'를 누구보다 간절히 '추구'하면서도 사실 그 의미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르겠어서, 내 '깊이 없음' 앞에 한 없이 작아졌다. 스스로의 '깊이 없음'만은 완벽히 알겠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여기서도 반복한 그놈의 '깊이'의 정체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은 얼마나 모호한 말이던가. 마치 아무데서나 남용되는 '진정성'처럼, 부끄럼 없이 모두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파트릭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라는 단편에는 그것의 폭력성이 잘 나타나 있다. 누군가에 대한 감상으로 '깊이'라는 지표를 갖다 대는 것이 얼마나 무책임한 일인지 말이다.


그럴수록 더더욱 나는 '깊이'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스스로의 '깊이감'을 정리해야, 내가 딛고 나아가야 할 모호한 길을 조금은 더 또렷하게 알 수 있겠다고 믿었다. 그런 믿음과 부끄러움에 대한 반성을 가지고 '깊이'를 추적하기로 했다. 공책 위에 '깊이'의 정의를 써보고, 사전을 들추며 내가 남용한 '깊이'의 정의를 더듬어 보았다.


우연히 쓴 지 얼마 안 된 일기장의 한 켠에 적힌 '깊은 맛'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견했는데, 당황스럽게도 거기엔 '깊이'에 대한 나만의 정의가 이미 담겨 있어서, 실천하지 않은 생각들은 얼마나 휘발성이 높은 지를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일기장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정말 오랜만에 안도 다다오의 글을 읽는다.


2년 혹은 3년 만이다. 그의 글을 읽으면 나도 모르게 주먹이 불끈 쥐어지는데, 그가 가진 엄청난 열정과 박력 그리고 삶에 대한 의지에 나도 모르게 동요되어 주먹을 쥐고 있는 것이다. 몇 장 안 되는 그의 글을 읽자마자, 나는 내가 왜 건축을 사랑했는지 건축가를, 건축물을, 건축을, 건축 세계를 좋아했던 모든 이유를 단번에 알아버렸다. 건축은 내게 조화를, 자연을, 물성을, 분위기를 알려주었고, 공간의 힘과, 아늑함, 따스함, 차가움을 체험의 결과로, 실감으로 알려주었다.

책으로는 결코 실감할 수 없었던 그 감각을 건축을 통해 배웠고 건축물을 통해 느꼈고 책상으로 돌아와 펼쳐 읽는 그들의 글에서 나의 낮은 해상도로는 미처 보지 못했던 그들의 감수성을 다시 읽을 수 있었다. 내게 건축가들의 글이란, 이성적 정밀함을 지닌 동시에 자연의 재료에 대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어 묘한 사랑스러움이 느껴지는 무엇이었다.


안도 다다오의 문장 중 어떤 단어에 시선이 오랫동안 머물렀는데 그게 바로 '깊은 맛'이었다. 깊은 맛. 풍부하고 깊은 맛. 어쩌면 삶은 그것이 전부다. '풍부하고 깊은 맛을 내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것이 나라는 사람의 다짐이다. 주먹을 불끈 쥐는 이유기도 하다.


풍부하고 깊은 맛은 근원은


재료의 신선함에서,

기술의 능숙함에서,

조리과정의 간결함에서,

조화의 창의성에서 나온다.


좋은 재료를 가지고, 재료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능숙한 기술, 그리고 재료들의 창의적인 조화를 통해서 나오는 것이 사물의 깊은 맛이다. 그 맛을 낼 줄 아는 어른으로 크고 싶은 것이. 그 맛을 느낄 줄 아는 사람으로 살고 싶은 것이 내가 바라는 전부였음을. 허우적거리고 방황하며 디뎌온 내 나날들에 대한 가장 단순한 답이었음을 느낀다.



아,

그러니까 일기로만 쓰지 말고 스스로 깊이를 실천하고 체험하며 살아야 한다.

글로만 쓰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글로만 진지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

마음으로, 행동으로 내가 믿는 '깊이'의 정체를 제대로 믿으면서

나의 태도와 행동에 그것이 깃들기를 바라며, 살아가야 한다.



지금보다는 조금 더 유연한 진지함을 아는 사람이자,

누군가의 정성 어린 노력의 '깊이'를 알아볼 줄 아는 사람.

그리고 내가 하는 일에 있어서 최소한의 '깊이'를 지닐 수 있는 충실함을 지닌 사람.

그런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그런 힘을 지니는 것만으로도 꽤 괜찮은 30대, 아니 사람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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