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각한 한파 없이 지나가고 있는 이번 겨울의 속도는 제법 빠르다. 겨울엔 늘 두툼한 코트를 입고 그 안에 도톰한 니트를 입어 몸의 부피감이 두꺼워지는 바람에 행동의 속도는 무척 느려지는데, 연초의 분주함과 연휴의 설렘 때문인지 시간은 늘 잽싸게 간다.
'연초'라는 감각을 빠릿하게 유지하는 겨울이 지나가면 소생의 봄이 올 테지만, 어쩐지 겨울이 지나가는 것이 반갑지만은 않다. 겨울 햇살이 봄의 빛을 입고 세상 모든 생명들이 연둣빛을 입으면 그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겠으나 겨울이 지나가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들어 이 계절에 하고 싶었던 크고 작은 일들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겨울에 하고 싶은 것은 겨울의 빛을 잘 보는 것과, 겨울이 가진 아름다움을 마음으로 잘 쓰다듬는 일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삶이란 아름다운 것에 감탄하고 또 감명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다. 아름다움은 관계에서 번져 나오는 충만한 행복감일 수도, 풍경의 광휘일 수도 예술이 주는 풍요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시간 속에 피고 지는 그런 아름다움 들을 최대한 많이 거둬들이며 내 안으로 데려와, 계속해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굴할 수 있는 맑은 마음과 감각을 닦는 것이 내가 바라는 생활 습관이다.
오늘 오전, 오전 빛이 좋은 거실 창가에 겨울 빛이 환하게 들었다. 미세먼지가 심할 거라고 여기저기서 들었기에 큰 기대 없었는데 눈이 부실만큼 한 다발의 햇살이 촉촉하게 들어왔다. 특히 설 연휴 아빠에게 받아온 서양난에 스미는 햇살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꽃의 선, 색, 부피감 어떤 것도 아름답지 않은 부분이 없어 한참을 바라보다가, 집에 있는 모든 사진기를 들고 나와 사진을 찍었다. 폴라로이드로는 꼭 남기고 싶어서 폴라로이드로 사진을 찍었는데, 마침 흑백 필름이 있어 그로 남기면 더 시적일 것 같아 셔터를 눌렀다.
색이 유난히 고운 꽃인데도, 흑백의 사진 속에서 전혀 모자람 없이 외려 더 고혹한 색으로 빛났다. 120MM 필름 한 롤을 다 쓰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다시 꽃들을 마주하며 처음으로 (언제나 나는 절대로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정원사가 되는 일을 상상해봤다. 꽃을 사랑하는 마음이 필요한 거라면 난 충분할 것 같아서.
작년의 언젠가부터 '아름다움'이라는 것에 집착하며 흡사 구도자 같은 자세로 아름다움에 대한 글들을 읽어왔다. 어느 날의 일기장엔, 욕망의 노예가 된 수도승처럼 낙담한 말투로
"내가 과연 아름다움을 말할 수 있을까. 내가 감히 아름다움에 대해 쓸 수 있을까"라고 써놨었는데 오늘 꽃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해 오래된 사진기를 철컥거리고 있는 나를 보니, 내가 아는 아름다움에 대해서만 말해도 충분하다는 안심이 들었다.
내가 캐고자 하는 것은 진리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계절의 빛 그리고 자연의 윤곽일 뿐이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겨울의 오전, 꽃과 나 둘만의 시간 속에 빽빽이 다 들어있었으니까. 내가 아는 아름다움, 내가 느끼는 아름다움을 성실히 그리고 진솔하게 적어 내려 가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서로의 아름다움을 나누는 생활로 나의 올 해가 가득 찼으면 좋겠다.
정말로 올해 내가 바라는 것은 그게 전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