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을 딛고 위로를 건낼 수 있는 어른들의 광장
네 그루의 오동나무, 다섯 개의 주소, 열 개의 문에 둘러 쌓인 채로 내가 살고 있는 이 작은 광장은 생제르맹의 오아시스. 이 광장을 채우는 나무와 창문들은 나를 광장의 엄마라고 부른다. 어둠이 찾아와도 유일하게 그들을 보듬어주는 존재여서일까? 부담스럽지만 거부하기는 싫은 호칭과 역할을 어쨌든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만큼 이 장소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책임감을 가지고 있으니까. 파리에서 가로등으로 산다는 것은 이미 세상에서 가장 많은 떨림과 우울을 목격할 수 있는 특권을 뜻하지만 사람들이 종종 ‘낙원’이라고 말하는 이 광장의 중심을 지켜가고 있는 것은 휜 적 없는 허리를 더욱 꼿꼿이 세우게 하는 자부심을 준다. 건물에 기생하는 전구들과 달리 내 든든한 다리로 서 있는 독립적인 존재라는 것도 꽤나 큰 자부심이다.
광장의 중심에서 센 강 쪽으로는 들라크루아 박물관이 [1], 그 반대방향으로는 옛 수도원의 건물과 생제르맹 교회가 있는 이곳의 위치 만으로도 장소성의 가치는 남다르다. 이자벨마랑 매장이 있는 쟈꼽가로 (Rue Jacob) 쇼핑을 가는 여인들을 멈춰 세우기도, 생제르맹 거리나 (Boulevard Saint-Germain) 센느가 (Rue de seine)에 있는 약속 장소로 서두르던 사람들이 잠시 속도를 늦춰 여유를 갖게 하기도 딱이다. 라빨레뜨(La palette)[2]에서 아페로를 한 커플들의 귀갓길 산책을 밝혀주는 것도 우리의 역할.
파리지앵뿐 아니라 여행자들도 우연히 발견한 이곳을 마냥 스쳐 지나가지는 못한다. 붐비고 번잡한 생제르망의 거리를 헤매던 여행자가 들어와 낯선 위안을 느끼는 곳. 갑자기 어디고 걸터앉아 이 광장에 빨려 들어온 우연한 마법을 마음껏 만끽하는 곳. 파리의 속살을 들여다보았다는 은밀한 발견을 수줍게 즐거워하는 곳. 소란스러움과 혼란스러움이 줄 타듯 거리를 덮치는 이 곳에서, 그 팽팽한 긴장감이 탁 하고 끊어지지만 이곳은 전설적인 카페들과 근사한 교회가 있는 근처의 생제르맹 광장이나,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부신 오페라 건물이 있는 오페라 광장, 마치 자신이 파리의 모든 것이라는 듯 으스대는 콩코드 광장처럼 웅장하고 화려한 광장이 아니다. 각종 보석과 사치품들의 유혹이 끊이지 않는 벙돔광장과도 다르다. 금빛으로 반짝거리는 가로등도 없고, 국보가 된 조각상도 없다.
그 모든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저 위에 열거된 화려하고 거대한 광장들과 비교해도 당신의 기억 속에서 더 반짝이는 무언가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아는 사람들은 아는' 파리의 ‘낙원’으로 불리는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누구도 압도하지 않는 친근함일까? 어떤 것도 위협하지 않는 안전함? 무엇도 부추기지 않는 다정함? 우리에겐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그 특유의 분위기를 만드는 것들은 어쩌면 파리의 상징과도 같은 ‘화려함’이라는 수식어와는 거리가 먼 사소하고 평범한 것들이다.
늘 다섯 개의 등에서 빛을 내고 있는 나[3], 계절에 따라 풍경을 다르게 그리는 오동나무들, 우직하게 공간을 감싸 안는 건물들, 누군가의 사생활이 담긴 창가, 그리고 우리를 방문하는 사람들…
이 모든 것들은 파리의 어느 길가에서 봐도 낯설지 않은 모습들이지만 모두가 함께 만들어내는 우리만의 분위기에는 무언가가 있다.
그 무언가는 어쩌면, 우리가 가진 어떤 필연적인 부재의 감각이 만들어낸 분위기일지도 모르겠다. 아침이 오면 세상의 많은 것들은 깨어나지만 나는 눈을 감는다. 한 밤의 수고는 아는 사람만 아는 작은 비밀. 어둠이 올 때까지 용도 없이 광장의 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밤을 기다리고 낮을 관찰할 뿐. '우두커니’라는 단어 안에 담긴 딱 그만큼의 넋의 부재가, 내 허전함의 크기가 된다. 그 시간이 우울하다거나, 슬프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빛을 낼 수 없다는 어쩔 수 없는 무기력함, 밝음 속에 가려지는 어둠에 대한 아쉬움이 그 허전함의 전부다.
그 허전함이 나를 갉아먹지 않는 이유는, 하루도 빼먹지 않고 매일 찾아오는 아침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그 시간이 나의 방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간의 정전일 뿐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정전의 시간이야 말로 내가 빛나는 시간을 더 가치 있게 해주는 기다림의 시간이라는 것도 안다. 그것이 매일 아침마다 바래고 저녁이면 밝혀지며 내가 배운 한 가지. 하루 종일 빛나야 한다는 의무감으로부터 해방되어, 한낮의 여유를 관찰하는 즐거움을 챙겼던 것은 그 부재를 긍정하고 난 뒤부터였다.
그리고 이 교훈을 공감할 수 있는 친구들이 내 곁에 있다.
나무들의 겨울은 나의 낮이다. 가장 낭만적인 꽃나무라는 자부심이 있는 오동나무들에게 겨울의 의미는 유독 가혹하다. 나에게 밤의 의미가 그렇듯 그들에게도 반드시 봄이 찾아온다는 약속이 있지만, 잎의 부재에서 찾아오는 허전함은 애써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가 않는 공백일 터. 몸으로 느껴지는 쓸쓸함과 겉모습의 초라함을 애써 부정만 할 수는 없을 거다. 수십 번의 나이테를 긋고 나서야 오동나무도 이제는 안다. 그 부재의 시간이 그에게 짙은 나무 테를 한 줄 새겨 넣는 것 이상을 뜻한다는 것을.
건물들이라고 다를 게 없다. 주인이 외출을 하거나, 바캉스를 가 버리고 나면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방이 된다. 그들을 채우던 사람의 온기가 떠나버리면 주인이 벗어놓고 간 옷가지나, 어제 신었던 신발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애써 부재를 잊어가겠지. 분주했던 아침에 미쳐 마시지 못하고 가버린 커피 향의 위로도 그들을 감싸주는 무언가가 된다. 그러나 그 커피가 식어가는 것이 서운하지 않은 이유는 그만큼 그들을 반겨줄 주인이 돌아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뜻하기 때문일 거다.
이렇게 우리는 모두 같은 결의 허전함을 공유하고 있다. 우리에게 허전함이란 태생적인 결핍이 아닌 일시적인 부재에서 오는 감정이어서, 그것에는 희망이 있고 낙천이 있다. 나에게 밤이, 나무에게 봄이, 방에게 주인이, 찾아올 거라는 믿음. 그리고 그 뒤엔 또다시 아침이, 겨울이, 외출이 있다는 걸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이 사실 덕에 우리는 세상 누구보다 상대의 허전함을 잘 이해해주는 사이가 되어 서로를 꼭 끌어안는다. 그 포옹이 만들어내는 따뜻한 온기가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건 아닐까?
때문인지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거대한 광장 속 익명의 누군가로 침몰되지 않는다. 누구도 희미해지지 않는다. 그 누구라도 우리의 시선과 애정을 받을 수 있다. 오히려 이곳에선 그들의 존재가 더 또렷해져서 마치 자신이 이 장소의 주인공이 된듯한 느낌까지 받을 수 있다. 누구도 몰아붙이지 않는 소박하고 인간적인 크기의 광장이기에 누구도 소외되는 일이 없다. 어디를 둘러봐도 넘침이 없고 그 누가 이곳에 와도 조화를 이루며 장소에 녹아들 수 있다. 우리는 작아서 기울일 귀가 많고, 마주칠 눈이 많고, 보듬어줄 손이 많다. 나무들의 숱한 잎사귀와 다정한 창문들은 손님을 타인으로 맞이하는 법을 모른다.
거창하게 나열해보았지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너무 좋아’라고 말해버리고 마는. 이 광장의 매력은 어쩌면 정말 그 ‘너무 좋아’가 다 일지도 모르겠다. 자꾸만 오게 되는, 이따금 자연스럽게 들르고 싶어 지는. 미끄러지듯 자꾸 이 광장을 기웃거리게 되는 그 마음을 ‘좋아서’가 아닌 다른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
밤이 오면, 이 광장은 다른 매력을 갖게 된다. 대낮의 이곳이 밝고 번잡한 생재르맹 사이의 그늘과도 같은 쉼터였다면, 밤의 퓌스탕베르는 유혹의 전당으로 변한다. 광장의 구석에서 피어나는 애정과 유혹의 기운들은 이곳에 그날만의 색을 뿜고 그날만의 분위기를 만든다. 서로의 마음을 언어로 빚어내지 않아도 촉촉한 눈빛에서 다 느껴지는 그 살랑거리고 간질간질한 분위기. 덤덤했던 감정에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조심스러웠던 어색함에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이 작은 광장의 마법을 가능하게 하는 건, 어둡지도 너무 밝지도 않게 광장을 비추는 나의 아늑한 불빛도 한몫할 것이다.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사이에 상대방의 목에 두 팔을 걸고 아무 말 없이 바라보게 하는 용기를 갖게 하는 힘이랄까? 눈부시게 밝은 햇살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이 가로등 밑에서는 보이는 신비로움은 경험해 본 사람만 안다. 어둠이 두렵지 않고, 밝음이 완전한 가시성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도, 가로등 불빛의 매력이다. ‘보임’과 ‘안 보임’이 ‘밝음’과 ‘어두움’의 탓이 아닌 ‘솔직함’의 농도로 결정된다는 것을 알아채는 선수들은 그래서 늘 내 곁으로 그들이 유혹하고자 하는 대상을 데리고 온다.
숱한 유혹의 현장을 목격하다 보면 이젠 눈빛만 봐도 그 사람의 진실성 같은 게 보인다. 오늘을 위한 유혹인지 이 계절을 위한 유혹인지 아니면 평생을 위한 유혹인지 알게 된 것이다. 묘하게 느껴지는 애정의 차이를 읽게 된 지도 꽤 됐다. 눈빛에는 그런 것들 것 모두 담겨있다. 모두를 평등하게 안아주는 게 우리 광장의 신념 같은 것이지만 나도 모르게 그 눈빛의 진실성에 따라 불빛을 달리 내비칠 때가 있다. 그들이 그것을 어떻게 인지할지는 아직 확인된 바 없지만… 조금은?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평생을 건 유혹을 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바라는 것은 소박하지만 한 가지다. 그들이 언젠가 이 떨리는 순간을 추억할 때, 가슴 한 켠에 이 은은한 불빛이 남아있기를. 그들의 가장 뜨거운 시간을 아름답게 조각하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기를. 그들이 흔한 길거리가 아니라 파리의 가장 아름다운 광장에서 가장 아름다운 불빛을 받으면서 사랑을 속삭였던 시간이 있었다는 사실에 잠깐이라도 마음이 반짝이기를…
유혹의 장면은 물론 늘 흥미롭지만 내가 정말 좋아하는 밤의 광경의 색은 조금 다르다. 내가 가장 반기는 손님은, 우리처럼 ‘허전함’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이다. 이별, 실패, 거절의 경험을 몸과 마음으로 익힌 사람들. 가장 소중한 것이 온몸을 빠져나가는 그 고통의 순간을 아는 사람들. 손을 꽉 움켜쥐어도 그 사이로 미끄덩한 촉감의 허무감들이 계속해서 온 몸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껴본 사람들… 산다는 것은 여러 감정을 배워가는 과정이라지만, 상실감이라는 감정을 배우는 일은 누구에게도 쉽지가 않다. 처음으로 상실감을 경험하는 시기야말로 첫 성숙의 시기다.
그것이 부재에서 오는 상실감이든, 결핍에서 오는 상실감이든, 차이에서 오는 상실감이든, 그것을 처음으로 겪어내야 하는 시기에는 커다란 공허감에 짓눌려 제대로 앞을 보지 못한다. 그 상실의 시기가 비움의 시기였고 또다시 채울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도, 새로이 채워지는 것들의 풍미를 결정하는 것은 내게 상실을 안겨준 대상이 아닌 그 상실을 대하는 나의 태도라는 것도 그때는 절대 알지 못한다. 알 수도 없고 알아도 웃긴다. 떨어지는 잎들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시한부 인생처럼 매일을 간절하게 붙잡던 오동나무의 첫가을이 그랬고, 매일같이 찾아오는 악몽 같은 아침에 경악하던 나의 첫 계절이 그랬다. 아침이 오면 내가 사라져야만 한다는 것을 익히는 데에는 꼬박 계절을 써야 했다. 수많은 계절들을 보내고, 방전의 시간이 나만의 고민이 아님을 알게 되고 나서야, 서로의 상실과 부재를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된 이제야, 우리는 누군가에게 위로를 전할 수 있게 되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이 곳에 들어온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우리도 매일이 상실의 과정이라는 작은 위안뿐이다. 그 위안이 그의 텅 빈 공간을 데워 다시 작은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면, 그걸로도 충분하다. 당신이 겪고 있는 지금 이 시기가, 마치 대낮에 꺼져 있는 가로등의 시간처럼, 방전이 아닌 정전임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 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빛을 잃은 채 하루의 반을 보내지만, 내가 빛나지 않는 그 시간 동안도 나는 내 위치에서 밤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그리고 밤이 오면 누구보다 다감한 빛으로 사람들을 쓰다듬는다.
파리의 어떤 광장도, 이런 위로를 전해줄 수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광장은 자신감으로 충만하고, 흠을 감추니까. 그러나 우리는 모든 흠을 드러내어, 그 흠을 우리의 위로로 메우는 법을 안다. 그래서 이곳을 찾아오는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다는 것보다 우리를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다. 이 광장은 서로의 부재를 공감하며 울려 퍼지는 위로 그 자체이며, 모자란 부분을 함께 채워가는 과정이야 말로 충만의 과정임을 알기 때문이다.
파리에서 가장 작은 광장이지만, 가장 꽉 찬 광장에서 나는 당신에게 건 낼 가장 따뜻한 위로를 짓기 위해 오늘도 어떤 부재를 견뎌내고 밤이 오길 기다린다.
Ps- David hockney의 place Furstenberg paris 1985 콜라주 작품에 이 장소가 나와요. 처음 이 작품을 발견하고 얼마나 신나고 놀랐는지 몰라요. 도서관에서 호크니 책을 보다가, 제 눈을 의심하면서 호크니와 나의 연결고리라도 찾은 마냥 좋아했어요. 그리고는 바로 이곳으로 찾아왔던 기억이에요. 비록 호크니의 작품에선 저 사랑스러운 가로등이 빠졌지만, 어쩌면 이 작품이야말로 가로등의 시점에서 본 이 광장의 분위기가 아닐까 싶네요.
에펠 근처에 살았던 저에게, ‘산책’의 목적지는 늘 이곳 쁠라스 퓌르스땅베르였어요. 가장 사랑하는 선생님이, 본인이 파리에서 가장 사랑하는 장소라고 데려온 이 곳은 그 날 이후로 저에게도 가장 소중한 곳이 되었어요. 그래서 이곳에 오면 신비롭게도 마음이 놓였어요. 집에서 십오 초만 걸어가면 커다란 에펠타워가 반짝이고 있었는데, 정작 안정감을 얻는 것은 삼십 분은 걸어야 나타나는 이 작은 광장이었죠. 좋아하는 사람들, 아름다운 것을 보여주고 싶은 사람들이 있으면 꼭 데리고 이리로 왔어요. 더운 날엔 아이스크림을 먹었고, 추운 날엔 슈를 먹었어요. 그렇게 이 장소에서 내가 만들어낸 추억을, 가로등이 모두 보고 있었을 것을 생각하면 조금 부끄러워지기도 해요. 얼마나 많은 날을 이 곳에 와서 하염없이 앉아 있었는지. 햇살이 아무리 강한 날이라도, 이곳에 오면 그 햇살이 폭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고, 아무리 캄캄한 밤에도 이곳의 어둠은 두려움으로 느껴지지 않았어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장소를 꼽으라면 저는 아마도 이곳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파리에 들른다면 생제르맹을 간다면 잊지 말고 이곳이 주는 아늑한 위로를 만끽하세요.
[1]
Musée Eugène Delacroix (Eugène Delacroix, 1798~1863)
이 동화 같은 광장의 구석에 작은 문을 터고 있는 들라크루아 박물관은, 외젠 들라크루아의 마지막 집이기도 해요. 그가 이곳에서 아주 가까운 생쉴피스(제가 파리에서 가장 사랑하는 성당 중에 하나)의 장식을 맡았아서 근처에 세 들어 살았던 집을 개조해서 박물관으로 만들었답니다. 들라크루아의 걸작이라고 불리는 작품들을 보려면 루브르로 가는 것이 맞겠지만, 엄청난 다독가이자 유난히 일기를 많이 썼던 들라크루아의 내면까지 읽고 싶다면 이곳에 들러 시간을 보내는 것은 후회 없는 선택일 것입니다. 특히 이 안의 작은 정원은 이 광장만큼이나 아늑하고 소박한 쉼터가 되니 길게 줄을 서야 하는 파리의 박물관에 지쳤다면 이곳을 들러보세요. (매주 화요일 휴무)
[2]
La palette ( 43 rue de seine 75006),
생제르맹의 클리쉐는 되마고나 카페플로르가 아니라 어쩌면 바로 이곳일지도 모르겠어요. 밤이면 멋쟁이들이 몰려서 아페로를 한 잔 마시는 곳. 시끌벅적함 사이에서 품위를 잃지 않는 곳. 사랑이 싹트고 유혹이 피어나는 파리의 가장 사랑스러운 카페. 생제르맹의 갤러리들 사이에서 가장 매력적인 모습으로 스스로의 색을 유지하고 있는 카페. 느슨하게 풀어질 것 같지만, 절대로 풀어지지 않는 묘한 긴장감을 갖게 하는 곳. 커피는 맛없고, 음료는 비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제르맹에 오면 하염없이 앉아있게 하는 매력이 있는 빨레뜨는 지나치지 말고 꼭 들러주세요.
[3]
예전 사진을 찾아보면, 구형을 한 다섯 개의 아름다운 달이 떠 있는 모양의 가로등이었습니다. 이 장소를 소개해준 선생님은 매번 갈 때마다 예전이 가로등이 더 아름다운데, 안목이 없는 구청 직원의 지시로 볼품없는 가로등이 장소의 완벽함을 망친다고 흉을 보셨지만, 현재의 모습이 더 익숙한 저로서는 모자를 쓴 지금의 모습도 나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