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견 모드로 살아가기

by EURA

“그거 알아? 네가 가진 다섯 가지 감각 중 하나에 온전히 집중하면,
네 안의 불안이를 안심시킬 수 있어.”



언젠가 육아서를 읽다가 아이가 불안해하면 꼭 이렇게 말해주려고 적어 둔 문장.

결코 실천이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다 큰 어른인 나도 ‘불안’을 다루는 법이 익숙하지 않다.

마흔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삶의 구석구석에서 그동안 점검한 적 없었던 불안이 고개를 들고 나타나는 순간이 많다. 나이 때문만은 아니다. 최근 들은 세미나에서도 전 세계 불확실 지수가 코비드 시기 만큼 높아졌다고 했다. 방황과 불안을 경유해야만 도달하는 감정의 스펙트럼이 있다는 걸 알지만, 조금은 단단해지고 싶다. 실체 없는 불안과 공포에 휘둘리는 대신 한 번쯤은 불안을 매몰차게 외면하며 “어쩌라고”를 외쳐볼 수 있을까?


올해 나를 살린 건 손바닥만 한 일기장. 불안이 스멀거리고 올라올 때마다 무언가를 썼다. 어지러운 마음을 펜으로 열심히 쓸었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집 앞을 매일 빗자루로 쓸어내는 정갈한 마음가짐으로 내 마음을 다뤘다. 어젯밤에 일어난 작은 동화들과 오늘 아침에 있었던 작은 발견을 적었다.

오랜만에 카푸치노에 시나몬가루를 잔뜩 뿌려 먹는 아침은 꽤 근사했다.

어젯밤 달님에게 아이는 친구의 알러지가 낫게 해달라고 빌었다.

아침출근길 엄마는 '네가 있어 더 행복한 하루 보내기를'이라고 보냈다.

출근 길에 입고 가는 트렌치 코트가 유난히 마음에 들 때. 그 코트를 물려준 할머니를 한참 동안 생각했다.

컨디션 안 좋은 나를 배려해서 티 내지 않고 아이와 둘이 나갔다 들어오는 남편의 다정한 보살핌 같은 작은 기쁨들을 발견해 모으다 보니 마음을 헤집는 불안의 먼지가 조금은 달아났다.


노트는 어느새 네 권으로 불어났다. 매일 꼬박꼬박 적다 보니 등장 인물과 생명들을 더 유심히 바라보고 싶어졌다. 그동안 무심코 지나쳐 온 생활의 구간과 구석들을 바라보는 일이 날 고요하게 해주리라는 믿음. 별거 없는 평범한 동선 속에서 내가 미쳐 눈길을 나누지 못한 고마운 사람들은 누가 있지?

퇴근길에 타는 버스 기사님들의 얼굴을 내가 알아볼 수 있을까?

버스를 탈 때마다 습관적으로 하는 인사지만 그분들의 얼굴을 알려고 한 적이 없다.

막연히 다시 볼 리 없다고, 알아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매일 같이 인사를 했지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에 기억나는 얼굴이 하나도 없었다.


조금만 더, 살짝만 더 주의를 기울여보자고 다짐하고 바라보기 시작했다.

처음엔 모두가 낯설게 느껴졌다. 눈을 마주치기 어려운 기사님도 많았고, 특징을 구분하기 어려운 분들도 많았다. 그러더 어느날 평소와 다름 없이 별 기대 없이 인사를 하면서 얼굴을 바라보는데 아주 멋지고 단정하게 정리된 콧수염이 내 눈에 들어왔다.

감탄할 만큼 아름다운 콧수염이었다.

오랜 시간 공들여 기르고 가꾸고 관리하고 계시는 ‘작품’이 분명했다.

저렇게 멋진 콧수염을 관리하시는 분이라면 반드시 운전도 다르게 하실 것 같아 매 정거장이 설 때마다 그분의 운전에 주의를 기울여보았다.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어떤 기사님은 검은 뿔테 다리 중간에 흰색 줄이 그어져 있는 독특한 디자인의 안경을 쓰신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형태의 뿔테인데, 어떤 이유로 그 안경을 고르신건지 모르겠지만 나름의 고집과 개성이 느껴져서 볼때마다 응원의 마음이 차오른다.


이제 나는 그 두 분을 명확히 알아본다. 오늘은 콧수염 기사님, 오늘은 줄무늬 뿔테 기사님. 내적 친밀감이 생겨 내 인사도 좀 더 경쾌하고 친밀해지고, 버스를 타는 일도 좀 더 신난다.

이제 콧수염 기사님은 내가 인사를 하면 콧수염이 조금은 씰룩이는 것 같다.

뿔테 기사님은 무표정이지만 차갑지 않다.

‘구체적인 얼굴’을 안다는 발견의 기쁨 때문에 그들이 다 내 동료 같다.



그 경험이 내 ‘보려는 마음’을 키게 만들었다.

더 멀리 더 자주 더 오래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우선 내가 자주 가는 길에 놓인 자연의 얼굴들도 관찰해보기로 했다.

올가을에는 거리를 굴러다니는 도토리들과 사랑에 빠졌다.

도토리는 엄마 나무가 누구냐에 따라 모양이 다 다르다.

졸참나무는 땅콩처럼 얼굴이 길쭉하고, 떡갈나무는 밤송이 같은 가시 속에 감춰져 있다.

갈참나무는 우리가 생각하는 바로 그 '모자 쓴 도토리'의 모양을 하고 있다.

아마도 학창 시절에 배웠다가 모조리 잃어버린 것 같지만,

들판에 굴러다니는 열매들의 엄마를 아는 것만으로도 도토리에게 각별한 애정을 생긴다.

“너는 상수리 엄마 밑에서 태어났구나, 너는 엄마가 떡갈나무구나” 하고 바라보면 안 그래도 귀여운 도토리가 더 귀여워 보인다.

대부분의 도토리는 동물들의 좋은 먹이가 되겠지만 운이 좋다면 바람에 실려 언젠가 나무가 될 수도 있겠지? 도토리 한 알이 늠름한 상수리나무로 자라날 가능성을 상상하면 우주의 정교한 질서에 괜히 안심하게 되고, 내 하찮은 불안은 별일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사실이 그렇다.


무엇보다 누군가를 동료로 느끼고,

도토리를 귀여워하는 마음을 가슴에 채워 넣고 길을 걷다 보면 불안이 머물 자리가 줄어든다. 편협하고 좁은 나의 마음에 새로운 얼굴들이 피어난다.

불안이 아닌 아름다움에 주의를 기울이자 마음이 유연해진다.

단단해지는 게 답이라고 생각했는데 유연해지는 것이 불안에 맞서는 나만의 방식이였다.


그렇다면 지난 1년간의 방황이 헛되지 않다. 겸허한 마음으로, 내가 지나쳐 버린 아름다움에 주의를 다시 기울이는 건 소진되었던 나를 회복하는 일이기도 하니까.

매년 달라지는 불안의 모양 속에 맞서 나는 새로운 저항의 안무를 발견해낸다.

이번에 내가 꺼내든 안무가 “아름다움을 발견하자”라니,

돌고돌아 도돌이표같아 허탈하지만 그럼에도 대견하고, 이렇게 태어난 나를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


어느덧 겨울. 버스 창문엔 김이 서리고, 도토리는 다람쥐의 겨울 창고에 들어갈 것이다. 이번 겨울에도 그동안 몰랐던 겨울의 냄새와 생명의 목소리를 새로이 알아차릴 수 있을까? 불안이 날 갑자기 떠나갈 리 없겠지만, 이렇게 아름답게 저항할 수 있다면 우린 어쩌면 꽤 괜찮은 동행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도 너무 날 자주 날 찾아오진 말았으면. 그리고 부디 내가 만난 무수한 도토리 중 단 하나의 도토리라도 겨울을 견뎌내고 싹을 틔우며 나무로 자라나는 기적과 함께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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