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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tsu Aug 03. 2020

영화의 의미는 이야기와 이미지
가운데 어디에서 오는가?

영화에서 미학적 의의를 찾기 위한 가벼운 정리

 시나리오는 영화를 어떻게 서술할까? 외부적이고 디테일한 것. 인물뿐만 아닌 배경과 사물의 묘사, 째깍거리는 시계, 텅 빈 거리, 빗방울이 흐르는 흔들리는 차창. 시나리오는 영상으로 표현되는 이야기를 구축해야 하며, 영화는 극적인 구성의 시각화를 통해 진행된다.



 소설은 인물과 세계의 내적인 시선, 희곡은 배우의 대사와 표정을 서술함으로써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반면, 영화는 카메라에 포착된 영상이 이야기를 진행한다. 장 뤽 고다르는 ‘영화는 영화 자신의 언어를 진화시켜 왔으며, 우리는 영상을 읽어내는 법을 연구해야만 한다’라고 말했다. 영화에서의 영상이 문학에서의 언어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문학이 언어와 언어의 조합으로 빚어진 관념이라면, 영화는 장면과 장면의 조합이 빚어낸 관념이다. 누벨바그는 산업적으로 찍어낸 영화에 의해 잠식된 이미지, 의미가 아닌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린 영화라는 관습에 반기를 취한다.


 

프랑스어로 '빛'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뤼미에르 형제는, 사람들이 살아있는 듯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는 시네마토그라프라는 영사기를 만들어 처음으로 극장에서 상영하기 시작했다. 그저 신기한 움직이는 '기록'에 불과했던 필름은 1895년, 마술사였던 조르주 멜리에스를 통해 시각적 환상으로 다시 태어난다. 하나의 장면을 영화 미술로 시각적인 구성에 맞춰 그려내고, 그렇게 그려낸 여러 장면들을 카메라로 담아 하나로 이어 붙이는 마술을 부린다. 조르주 멜리에스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존재하는 것처럼 눈 앞에 보여주는 '영화'라는 언어를 처음 정립한다. 조르주 멜리에스의 영화 언어는 미국으로 건너가 단조로운 장면에서 다채로운 장면으로 진화했고, 데이비드 그리피스는 1915년, 거듭된 연마를 거친 장면들의 연속이 3시간이 넘는 대서사를 전달하는 매체가 될 수 있다는 걸 ‘국가의 탄생’이라는 첫 장편 상업영화를 통해 보여준다.



이 등장은 거대한 대중적 성공을 통해 미국의 스튜디오 시스템이 세계 영화의 중심임을 선언했으며, 동시에 영화라는 환상의 상업화와 영화산업의 진정한 시작을 일깨웠다. 한편 미국과 정반대의 소비에트에서는, 그리피스를 비롯한 할리우드의 고전적 연출가들이 빚어낸 장면과 장면의 결합들로부터, 젊은 이론가들이 서로 다른 두 개의 장면이 대조되면서 느껴지는 완전히 다른 상호작용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상호가 결합하여 새로운 관념을 연상시키거나 극적인 구조에 따라 장면들을 병렬시켜 만들어내는, 각각의 장면으로서는 가질 수 없었던 종합성, 이로부터 비롯된 몽타주 이론은 영화 미학의 시작이었다.


 

초기 영화의 발전과정을 통해 영화의 미학적 의의는 서사가 아닌 장면에서 나온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어째서 영화가 갑자기 이미지를 홀대하고 이야기에 취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영화의 상업성과 예술성이 끝없이 소리 없는 전쟁을 벌이는 곳, 할리우드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할리우드는 철저히 대중적인 영화를 원한다. 대중성은 상업성의 동어이며, 대자본으로 이루어진 할리우드 시스템은 상업성을 떼어놓을 수 없다. 산업은 영화가 갖고 있는 미학적 가능성보다 상업적 가능성을 따진다. 영화산업을 위해서는 영화가 그저 대중들을 위한 환상에 머무는 편이 좋다. 연속된 장면들을 통한 관념의 전달은 복잡하고 어렵지만 서사를 전달하는 것은 쉽고 효과적이다. 관객들은 영화에서 무언가를 찾기보다 영화를 통해 즐거워지길 원한다. 따라서 할리우드는 이야기에 종속된 이미지, 영상을 통한 서사의 전달에 집중하게 된다. 



대중성을 위한 이러한 선택들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할리우드를 예술의 가능성이 펼쳐지는 무대가 아닌 단지 놀이공원과 같은 산업현장으로 바꿔버린 것일까? 다행히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출중한 감독들이 서사를 위한 영상을 만드는 과정에서 끝없는 표현의 진화를 이루어냈다. 찰리 채플린의 코미디에서부터 존 포드의 웨스턴, 알프레드 히치콕의 스릴러까지. 대중과 서사를 위해 장르라는 틀에 갇히면서도 영화는 카메라를 통해 빚어내는 또 다른 미학적 의의들을 진화시켜왔다. 그리고 오슨 웰스는 1941년, 당대의 영상 표현들을 집적한 '시민 케인'을 내놓으며 영화라는 매체의 장을 새로 열 모든 바람들의 기원이 되었다.


 

영화는 장면으로 이루어진다. 훌륭한 영화는 장면과 장면이 결합하면서 만들어지는 운동성이 자연스럽게 일렬의 연상으로 이어지며 어떤 관념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어떤 영화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운동성이 직접적으로 작용하며 연상을 완전히 소거해버린다. 그러한 영화는 게으른 영화이며 나쁜 영화일 것이다. 영상은 운동성이 가지는 역설에도 끊임없이 발전해왔다. 하나의 장면, 또는 장면과 장면의 조합이 어떤 연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 계속해서 고민해온 사람들 덕분이다. 모든 장면이 결국 하나의 서사를 위한 것일지라도, 그 서사를 어떤 장면의 조합들로 표현할지 고민해야 한다. 따라서 좋은 이야기가 좋은 영화를 만드는 건 아닐 것이다. 좋은 영화는 이미지가 나에게 무언가를 직접적으로 전달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떠오르게 만든다. 그것이 영화를 예술 중 하나라 부를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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