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혼양재, 일본 예술은 어떻게 서구 예술에 편입했는가?
항상 궁금했던 것이 있다. 일본 예술은 어떻게 세계적인 흐름에 자리 잡았을까?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일본 예술은 어떻게 서구에 안착했을까? 일본의 선도적인 근대화(서구화)라는 알기 쉬운 이유에 앞서 좀 더 원천적인 해답을 짚어줄 만한 그림이 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지정된 후지산의 등재기준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특히 19세기 초반 호쿠사이와 히로시게가 제작한 우키요에(浮世繪) 양식의 판화에 등장하는 후지산의 모습은 서양 미술의 발달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고, 장엄한 후지 산의 형태가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는데 기여하였으며 이러한 생각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가장 먼저 서구에 자리 잡은 일본 예술, 우키요에는 무엇일까? 우키요에는 浮(뜰 부)世(인간 세)繪(그림 회) 자를 쓰는, 간단히 말하자면 가벼운 세상에 대한 그림이다. 도쿠가와막부의 성립과 함께 에도가 일본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하자, 많은 인구들이 모여들고 내수가 확대되며 조닌 계급이라는 서민층이 성장하게 된다. 조닌 계급은 이 넘쳐나는 새로운 ‘부’를 통해 즐길 거리가 필요했다. 풍속점이 늘어나고 환락가가 생겨나면서, 기녀와 배우들이 대중문화의 일부분으로 자리 잡았고 저속하지만 돈이 되는 서민중심문화는 화려하게 폭발하기 시작한다.
우키요에는 이런 배경 아래, 처음에는 단순한 싸구려 이야기책의 삽화에 그칠 뿐이었다. 그러다 히시카와 모로노부라는 자가, 서민들을 자극하는데 한 치의 부족함도 없는 자신의 춘화들을 널리 퍼뜨리고자 문득 기발한 생각을 해낸다. 그가 한 번만 최선을 다해 그의 붓을 놀리고 나면, 그 그림을 무한정 찍어낼 수 있는 목판화 방식을 떠올린 것이다. 싸게 많이 제공하는 대량생산은 대중을 공략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덕목이다. 그렇게 그는 그가 연마한 독특한 화법이 이야기책에 메이는 것 또한 싫었는지, 한 장의 그림으로 독립을 선언한다.
모로노부가 고안한 독립된 매체로서의 우키요에는, 새로운 풍속화이며 동시에 배우와 기녀의 인물화로 자리 잡는다. 대량생산이라는 미덕을 통해 현재의 브로마이드와 포스터 역할을 겸하며 대중문화의 홍보물이자 대중문화 그 자체로 자리 잡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상한 반란의 기운이 싹튼다. 풍경화를 그리는 이가 나타난 것이다. 호쿠사이와 히로시게라는 두 명의 마스터는, 지금까지 많은 이들이 쌓아온 우키요에 노하우를 한껏 적용시킨 풍경화를 그려낸다. 이들의 풍경화는 안타깝게도 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진 못했지만, 일본의 개항 이후 우연히 흘러들어 간 서구에서 그들이 죽을 때까지 알지 못했고 알 수도 없었던 열광적인 호응을 얻게 된다.
그 전에도, 동양의 신비와 아름다움이라는 서구인들의 로망은 도자기와 서투른 여행기를 통해 전해져 왔다. 그러나 일본이 개항함과 동시에 흘러들어온, 자기 따위의 포장지에 불과했던 이 그림들이 서구의 단순한 로망을 진지한 조형원리와 미의식의 탐구로 확장시킨다. 자포니즘이라고 불리는 일본에 대한 탐미는 우키요에의 어떤 부분에서 온 걸까?
서양인들이 바라본 우키요에는, 첫 번째로는 강렬한 색채, 두 번째로는 중심에 대한 이탈, 마지막으로 비현실성과 미완결성을 들 수 있다. 그때까지 그들의 회화를 지배하는 법칙은 너무도 확고했다. 원근법에 의한 완전한 구도와 비례를 기반으로 한 그들의 화법에는, 단순하면서 확고한 색채는 있을 수 없으며, 그림의 중심에 실려야 할 힘을 다른 쪽으로 마구 밀어내 때로는 생략시키기까지 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이 단순하면서 화끈한 그림들은 서구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고, 마침 아카데믹한 화법에 갇혀 답답함을 호소하던 반항아들에게 힘을 불어주는 계기가 된다. 인상주의가 등장한 것이다. 인상주의는 기본적으로 지금까지의 회화 법과는 전혀 다른 노선을 택한다. 정밀하면서도 확고한 붓터치로 분명한 정경을 묘사해낼 것을 거부한다. 그들은 역사적, 신앙적 주제나 초상화가 최고의 덕목으로 여겨지던 때에 이젤을 들고나가 살아있는 삶과 풍경을 담아내기로 한다. 무엇보다 강력하게 주창한 것은 빛의 양과 각에 따른 변화, 즉 색의 변화다. 빛의 양과 각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해와 함께 변한다. 그 빛이 비춘 것들 또한 끊임없이 변한다. 색은 절대적인 것이 아닌 상대적인 것이다. 짧고 얇아져 선명하게 보이는 붓 터치 속에 미완성으로 그친 것만 같은 흐릿한 정경은, 그 안에 품고 있는 빛의 순간적인 아름다움을 정확하게 강조하는 묘사를 한다. 이것이 인상주의라는 어떤 비평가가 붙인 경멸적인 이름의 이유이며 동시에 그 이름을 모네가 대담하게 받아들인 이유이다.
(그렇다면 인상주의는 정말 우키요에에서 비롯되었을까? 낭만주의와 인상주의 사이에는 이젤을 들고 뛰쳐나간 밀레로 대표되는 바르비종파, 리얼리즘의 선례가 있었을뿐더러, 가장 중요한 빛에 대한 묘사에 관해서는, 그 아름다움을 끝까지 밀어붙여 낭만주의의 끝을 장식한 윌리엄 터너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사진의 등장과 함께 회화에서의 정경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방향성이 필요했다. 예술도 역사도 어느 하나를 계기로 획기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천천히 쌓아 올려진 것이다. 우키요에가 인상주의자들에게 강력한 지지를 받았으며, 미술이 지금까지의 법칙을 떠나서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키요에가 없었으면 인상주의도 없었을 것이라 보기는 힘들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이야기로는 우키요에가 일본 예술의 ‘서구화’를 설명할 해답을 내놓는 것 같지 않다. 답을 듣기 위해서는 서구인들이 우키요에를 쉽게 받아들인 이유가 필요하다. 우키요에는 서구에 없는 혁신이었는가? 아니다. 오히려 우키요에 이전의 일본화가 서구는 흉내도 못 낼 새로운 것들이었다. 동양화로 대표되는 한중일의 미술은 일반적으로 수묵화로, 서양에서 무엇보다 중요시하며 발전시킨 원근법을 전혀 상정하지 않는다. 이들이 표현하는 정경은 일종의 수련으로써 한번 보고 품었던 정경을 화지에 단번에 그려내는 것이 목표다. 즉 원근법의 목적인 ‘입체를 평면에 성공적으로 담아내는 것’ 같은 건 애초에 동양화의 목표와 하등 상관이 없다. 그래서 일종의 동양화에서는 공통적으로 구도도 비례도 미적 형식이 아니다.
그렇다면 호쿠사이와 히로시게의 우키요에는 어떠한가? 그들의 그림에는 분명하게 원근법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중심이탈과 생략은 있을지언정 구도를 전적으로 거부하던 과거와 다르다. 그들은 원근법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은 개항 이전에도 나가사키 등지에서 서구와의 제한적 무역을 해왔다. 이 전설적인 두 마스터는 그때 흘러들어온 서양화를 통해 서양 화법에 대해 연구하고 자신의 그림에 적용했다. 서구가 두 사람의 우키요에를 특히 사랑한 것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들의 그림은 분명히 다른 것이지만 그러면서도 비슷하고 익숙한 것이다. 이것이 서구가 일본 예술을 빠르고 안정적으로 받아들인 이유다.
일본 예술에는 화혼양재(和魂良才)라는 강력한 특색이 작용한다. ‘일본의 것을 혼으로 하여, 서양의 것을 받아들인다’는 화혼양재는 일본 예술에만 한정된 것이 아닌 일본 전반에 있어 강력한 문화적 특색이다. 일본은 쉽게 남의 것을 받아들이지만 특유의 배경을 잃지 않는다. 서양 예술의 형식과 양식을 흡수하고 적용하며 서양과 친숙하면서도 다른 예술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특색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빠른 속도로 근대화를 이루면서 가속화되는데, 그들은 오히려 구 일본 예술과의 의도적 단절을 하면서까지 서양 예술의 형식과 양식을 흡수하는데 적극적이었다. 문학에서의 나쓰메 소세키의 등장과 미술에서의 구로다 세이키의 등장은 그 분류와 단절을 통해 일본 예술이 서구의 틀에 맞춰 새롭게 탄생했다는 것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