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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tsu Aug 04. 2020

<24 프레임> 시각적 예술과 운동성에 관하여

24 Frames - A film by Abbas Kiarostami

 “I’ve often noticed that we are not able to look at what we have in front of us, unless it’s inside a frame.” - Abbas Kiarostami


 

영화가 시작되면서부터 영화가 가진 특별한 힘은 많은 이를 매료시켰고, 관객들의 소소한 감동부터 시네필의 열광적인 연구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거치며 발전해왔다. 영화사 아래 수 없이 많은 거인들의 발자취를 거론할 수 있겠지만 그중에 주목하고 싶은 것은 영화를 예술로 편입시키려는 특별한 노력, 영화 그 자체에 대한 고민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이제야 120년을 넘긴 짧으면서도 굵직했던 영화의 역사에, 현재 가장 마지막으로 이름을 남긴 사람일 것이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2016년, 세상을 떠나며 마지막으로 남긴 ‘24 프레임’은 그가 지금까지 가져다준 영화의 의의에 대한 고찰과는 다르게 예술에 대한 조금 더 근본적인 화두를 던져준다. 그가 찍은 24장의 사진에 각각 디지털 작업으로 만들어 낸 움직임을 더한 이 실험영화는 아이러니하게도 영화가 갖는 운동성이 영화 고유의 것이 아닌 이미지를 바라보는 인간의 사고에 관한 것임을 논증한다.


 

한 장의 이미지를 바라보는 인간의 사고는 그 정경에서 비롯되는 관념에 다다르기 위해 정경에선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덧붙이기 시작한다. 예를 들자면 밀레의 ‘양치는 소녀와 양 떼’를 바라보며 소녀가 가진 표정과 꼼지락거리는 귀여운 손을 통해 소녀가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상상하는 것이다. 그런 상념에 대한 유추는 소녀를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걸 시작으로, 명확한 수평선이 균형을 만든 평온하고 고요한 풍경으로 발산한다. 그러고는 명암 안에 갇힌 양 떼들과 양치기 개를 거쳐, 저물어가는 햇빛에 어렴풋 비춘 어떤 알지 못할 서글픔으로 수렴한다.


 

이미지가 주는 정서는 인간의 사고 속에서 운동성으로 치환된다. 그 과정을 거쳐야만 시각적 예술이 주는 관념이 완전히 우리에게 와 닿는다. 프레임에 갇힌 고정된 하나의 이미지가 오히려 그 프레임에 의해 우리 머릿속에서 마음껏 뛰어놀게 되는 것이다.


 

프레임에 갇힌 이미지라는 개념은 카메라를 통해 설명하면 좀 더 명확하게 와 닿는다. 카메라 렌즈에 비친 모습이란, 반대로 말하자면 시각을 카메라의 렌즈 아래 제한한다는 뜻이다. 사진과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카메라 렌즈 속에 가둬진 이미지다. 작가의 의도 아래 시각을 제한시켜 만들어낸 이미지. 그것이 사진과 영화다.


 

프레임에 갇힌 이미지가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하나다. 시각을 제한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걸을 때처럼 우리의 주위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우리의 시각에 들어오든 벗어나든 아무 상관이 없다. 하지만 프레임에 갇힐 경우 그 안에 가둔 모든 것이 우리에게 의미가 된다. 한 번이라도 카메라를 들고나가 렌즈에 눈을 담아본 사람이라면 느꼈을 것이다. 그 안에 갇힌 세상은 분명 똑같은 세상인데 뭔가 다른 특별한 세상처럼 느껴진다.


 

머릿속으로 이미지 그 너머를 바라보고 만들어내는 것. 시각적 예술의 운동성은 이처럼 명확하게 표현된다. 이런 운동성이 매번 다르게 발휘될 경우, 그 작품은 뛰어난 예술로 인정받는다. 무엇보다 풍부한 관념을 품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운동성을 영화에서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영화란 처음부터 특별한 경우였다. 지금까지 등장한 어떤 예술이나 매체와도 다른 완벽한 모방이었기 때문이다.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태초의 영화가 움직이는 기록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라. 그럴 경우, 영화는 현실의 복제이자 기록에 불과하다. 살아 움직인다는 것이 당연한 영화에 있어, 그것만으로 예술의 한 부류로 끼어들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눈에 보이는 운동성만으론 어떤 관념도 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는 멜리에스로부터 기록에서 환상으로 변신하기를 택했고, 영화는 그 환상을 어떻게 더 정교하게 전달할지 고민하며 발전했다. (물론 기록과 환상 사이에서 영화가 갖는 딜레마는 영화 그 자체에 대한 또 다른 의의를 고찰하게 만들고, 그에 관해 가장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이가 바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다. 하지만 그에 관해서는 나중에 따로 다루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단순한 움직임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닌, 장면 전체로부터 어떤 상념이 표현된다는 것을 깨달으며 초기 영화미학이 발전할 수 있었다. 결국 영화는 시각적 예술과 동일한 형태의 미학적 특징을 가진다. 관념이 이미지에서 오는 운동성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는 태초부터 다른 의미의 운동성도 가진다. 말 그대로 끝없이 살아 움직이는 운동성 말이다. 그리고 영화의 발전사를 거치며 환상을 전달하는 완벽한 기술들도 갖추게 되었다. 그 결과, 영화는 인간의 상상력을 완전히 지배하는 형태로 변모했다. 모든 매체가 영화적이기 위해 노력한다. 운동성 그 자체인 영화가 이야기의 전달에 있어 더없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발전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고취시키는 예술의 한 분류로서 우뚝 서게 만들었다.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이 무언가로부터 어떻게 관념을 취해야 하는지 잊게 만들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세상에서, 보이는 것만을 믿게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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