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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tsu Oct 20. 2022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결론은 하나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그 긴 제목처럼 시작부터 꽤나 흥미롭다. 복잡하게 왔다 갔다 하면서도 다분히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흘리며 몰입시키는 다중적 시점을 제공하는 편집, ‘무언가 있다’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관객들에게 각인시키는 이러한 시도는 이미 관객들이 지금의 여러 상업영화를 통해서 많이 경험해왔던 것들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단순히 괜찮은 상업영화 그 이상의 특별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 현란한 편집이 전부가 아니어야 할 것이다.


이 영화는 노골적으로 뭔가 있어 보이는 듯한 편집을 통해 어떤 어두운 분위기를 조성했지만, 영화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이상하기 짝이 없어진다. 이 뭔가 '딥다크하고 밝혀져선 안될 것 같은 분위기'는 어느새 끈적하고 농후해지는 컬트적 코미디에 묻혀버린다. 딜도와 애널 플러그가 최강의 무기와 비장의 각성기가 되는 것은 둘째 치고, 멸망의 베이글이라든가, 머리 위에 라쿤이라든가, 조부 투파키의 어이없는 패션센스가 남발하는 이 영화는 아무리 봐도 그 어두운 비밀은 단순한 맥거핀이었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그렇다면 영화 시작과 함께 설정한 어두운 분위기는 정말 맥거핀일 뿐인 걸까? 이 영화는 단순히 상업영화적 기술과 컬트영화적 포인트를 결합시킨 재밌는 영화인 걸까? 그렇다고 보기에는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개의 바위 씬과 영화 마지막에 올라오는 감정을 설명하기 어렵다. 이 영화의 장면 장면이 내 기억에 깊이 박혀버린 것은 잘 짜인 동시에 빈틈을 마구마구 노출해주는 느슨하기 짝이 없는(말 그대로 이 영화 같은) 연출이 빚어내는 영화적 마법임이 분명하다.


이 영화의 형식을 만들어나가는 것은 단연 이블린의 삶이다. 키워드를 이블린의 삶으로 놓고 확장하는 방식으로 보았을 때, 가장 첫 번째 연결되는 다른 키워드는 멀티버스의 이블린이 아니라, 조이의 삶이다. 조이의 삶은 사실 이블린의 삶의 또 다른 멀티버스와도 같다. 단순히 자신을 받아들여주지 않는 대상이 아버지에서 어머니로 그리고 성적 지향이 이성애에서 동성애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블린은 조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것은 온전히 조이의 잘못이다. 이블린은 대학을 관두고 동성애자임을 커밍아웃하는 것이 모두 조이의 본모습이 아닌 그녀의 일탈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블린은 조이라는 존재가 자신의 말을 잘 따르는 착하고 바른 아이라는 객체로 생각할 뿐 하나의 주체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리고 딸에 대한 그러한 잘못된 믿음은 일종의 자신에 대한 환상이자 후회의 반향이다. 자신의 삶에 대한 의심이 조이를 교도하려드는 자신의 모습을 정당화시키는 것이다. 영화가 초반부에 고의적으로 만들어내는 어두운 분위기와 숨겨진 무언가를 강조하는듯한 연출은 이로부터 맥거핀이 아닌 훌륭한 영화적 양식의 역할을 부여받는다. 이블린은 자기도 모르는 새에 자신의 주변을 모두 파괴하고 있었다. 남편이 품 안에 숨긴 이혼신청서부터, 딸의 극단적인 외로움까지.


이블린이 자신의 삶을 불행하고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며 마음속에 품어왔던 의심들은 알파 웨이먼드와 조부투바키의 등장으로 멀티버스를 마주하고 확신으로 바뀌어간다. 이블린이 알파 웨이먼드의 남자다운 모습에 다시 사랑에 빠지는 것을 연출하고 잘못된 길을 걷는 조부 투바키, 자신의 딸을 교도 할 수 있다는 믿음은 다시 한번 강조된다. 이 과정이 앞서 말한 것처럼 매우 코믹하게 이루어지지만, ‘에브리씽’의 결말이 결국 이블린의 죽음과 비슷하게 끝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물론 이블린이 '에브리웨어'에서 자신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다소 낙관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웨이먼드가 언제나   물러서서 소극적이고 유약해 보이지만 사실 그러한 포용으로 삶이라는 싸움을 계속해왔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나,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극단적인 단절을 소망하던 딸을 결코 잃을 수는 없다는 강력한 사랑이 그녀를 지금의 그녀로도 충분하게 만든다는 이야기는 물론 단순하고 낙관적이다. 심지어 지금의 그녀가 아닌 멀티버스의 핫도그손가락을 달고 있는 괴상망측한 이블린이라도, 곁에 있는 디어드리와 서로 사랑하고 포용한다면 누구보다 행복할  있다고 보여주지 않는가?


그러나  단순하고 낙관적인 결론, 사랑과 포용만이 사실 삶을 지속할  있는 유일한 원동력이라는 이 결국엔 무엇보다 분명한 진실이지 않을까? 멀티버스의 어디라도 사랑과 포용이 없다면 결국 삶은 비극적일 것이고, 가장 하찮고 모든 것에 실패한 ‘멀티버스의 모든  중에 최악의  하더라도, 사랑과 포용이 있다면 삶을 견딜  있다.


그래서  영화의 결론은 쉽고 낙관적으로 보이면서 동시에 감동적이고 이상적인 것이 된다.  세계의 어딘가, 아니 멀티버스의 어느 이라 하더라도 사랑과 포용이 있다면 자기 자신을, 삶을 지속해 나갈  있다. 그러나  지극히 평범하고 낙관적인 결론조차 실현되기는 너무도 어렵다. 바위가 바위에게 다가가는 것처럼, 이루어질  없는 무언가를 해내야 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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