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드디렉터 안젤라가 바라보는 세상
우리 속담은 해학적이고, 풍자적이며 시대가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참 재미있다. 어른들 말씀 틀린 것 하나 없다고 하는데, 부모님의 꾸지람이나 속담을 보면 ‘그렇지’라는 생각을 하며 머리를 끄덕이게 된다. 속담 중에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라는 속담이 있다. 가늘게 내리는 비는 조금씩 젖어들기 때문에 여간해서 옷이 젖는 줄을 깨닫지 못한다는 뜻으로,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것이 거듭되면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크게 됨을 비유하는 말이다. 이를 외식에 적용해보면 더 무시무시한 일이 생긴다. 메뉴 1품 당 단가가 낮은 식당에 가면, 부담 없이 이것도 시키고, 저것도 시키다 보면 5~6만 원을 훌쩍 넘어버리는 경우를 경험해본 적 있으신지? 애초부터 가격이 정해진 코스 메뉴를 시키면 마음의 준비 (?)가 되어 있지만, 이런 경우에는 지갑이 홀쭉해져 버리고, ‘내가 살게’라고 했던 사람이 표정관리가 하기 힘들어진다. 하지만 그만큼 맛도 있고,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 안젤라의 푸드 트립 서른일곱 번째 주제는 가랑비에 옷 젖는 미식가의 맛집이다.
오픈하기 직전부터 미식가들이 버킷 리스트에 담은 모던 오뎅. 신사동 가로수길에서 숙성 사시미와 창작 요리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재패니즈 다이닝 네기의 세 번째 작품이다. 기존에 운영하던 레스토랑 네기는 기본 단가가 높은 편이고, 와인, 사케, 고급 소주 등을 먹어야 할 것 같은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와 분위기다. 하지만 모던 오뎅은 도쿄에 있는 JR선 역전에 있는 식당같이 작고, 소박한 ㄷ 자형 식당이다. 저녁 장사만 하고 있고, 6시부터 오픈을 하는데 5시 20분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어떻게 보면 어묵집인데 줄까지 서서 기다릴 게 있나 싶지만 메뉴 구성과 맛을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평균 30분 ~ 40분을 기다리고 난 뒤 들어가니 젓가락을 씹어도 맛있을 것 같다. 시장이 반찬인 상태로 시작해 메뉴판을 살펴본다. 아삭한 파가 들어간 파 어묵, 양파의 은은한 단맛이 있는 양파 어묵, 우엉의 진한 향이 감도는 우엉 어묵, 표고버섯에 새우살을 갈아 넣어 튀긴 새우 표고 어묵. 모두 3,000원 ~ 5,000원 사이다.
들어간 재료가 서로 다르니 다 맛은 봐야 할 것 같고, 10개를 주문해도 3만 원 ~ 4만 원이니 부담이 없다. 하지만 창작 요리를 기반으로 맛집의 대열에 오른 네기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녹진한 아보카도에 새콤달콤한 초된장 소스를 곁들인 아보카도 스미소, 닭다리살을 닭 육수에 저온 조리하여 깨소스를 더한 냉채 방방지, 부드럽게 만든 일본식 계란말이를 소 힘줄 소스와 함께 먹는 요리 등 일품요리를 비롯해 화요와 산토리 생맥주로 만든 9,000원 모던 쏘맥, 하이볼, 사케를 함께 먹다 보면 7만 원선까지 훌쩍 올라가게 된다. ‘어묵만 먹고 가겠어’ 다짐을 했던 사람도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오래된 곳이다. 을지로의 역사와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오래되었고, 남녀노소 불문하고 두터운 단골층이 있는 곳이다. 원조 녹두라는 큰 간판 앞에서 인증샷을 찍고, 들어간다. 오후 5시에 들어가도 이미 막걸리를 마시고 얼굴이 빨개진 사람들이 앉아 있다. 이 곳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10가지 이상의 전을 직접 부쳐주는 할머니의 손 맛이라고 할 수 있다. 언제 가도 작은 체구의 벙거지를 쓴 할머니께서 직접 철판에 기름을 두르고 전을 부치고 있다. 나름 요즘 물가가 올라서 가격이 올랐는데, 올라도 10,000원 ~ 11,000원이다. 해물파전, 해물 녹두, 굴전, 동태전, 굴파전, 굴 녹두 등 신선할 수밖에 없는 재료들을 할머니가 직접 만든 반죽에 넣어 정성스럽게 부친다. 양도 어찌나 많은가 하면 셋이 와서 두 개 정도만 시켜도 충분하다.
하지만 문제는 막걸리. 막걸리와 전은 불변의 진리 아닌가? 하루 종일 전을 기름에 지지듯이 부치는 곳이기 때문에 소주보다는 시원한 탄산이 느껴지는 청량한 막걸리를 찾게 된다. 하지만 장담컨대 파전 하나에 막걸리 두병 또는 막걸리 한 병에 소주 한 병은 기본이다. 파전의 양도 많지만, 막걸리를 먹기 위해 태어난 맛처럼 막걸리가 술술 들어간다. 알코올 보충을 하기 위해 소주를 먹을 수 있지만 그래도 정답은 막걸리다. 밥 대신 막걸리를 먹는다는 핑계로 원조 녹두에 와서 실컷 막걸리를 들이켜는 을지로 직장인 여성들도 많이 볼 수 있다.
압도적이다. 진진 역시 오픈 직전부터 미식가들이 버킷 리스트에 넣은 곳 중에 하나다. 진진은 사부의 사부, 중식의 대가로 알려져 있는 왕육성 사부가 그의 제자인 황진선 셰프와 함께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는 중식집이다. 망리단길이 뜨기 전에 서교동, 망원동은 미식가보다는 지갑이 얇은 대학생들이 오가는 곳이고, 특별한 상권이 형성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매의 눈으로 ‘뜬 곳’ 보다 ‘뜰 곳’을 찾아낸 왕육성 사부는 식재료와 조리법은 40년간 호텔 중식당에서 근무하여 체득한 방식을 유지하되, 가격은 누구나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합리적인 수준에서 제공하겠다는 일념으로 진진을 오픈했다. 대표적인 새우살을 다져 식빵 사이에 끼운 뒤 튀겨낸 멘보샤, 속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대게살 볶음, 여성들이 좋아하는 아삭한 소고기 양상추 쌈, 해물 짬뽕 등이 있다. 오픈 후 1년 만에 세계적인 미식 평가서 미쉐린 가이드의 1 스타를 받는 영예를 얻었고, 현재는 총 4개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맛도 물론 훌륭하고, 사부님의 푸근한 미소를 볼 수 있다는 것도 특징이지만 진진이 성공적인 식당이 될 수 있었던 비법은 바로 ‘회원제 운영’이다. 진진의 회원제는 진진에서 식사를 하고 난 뒤에 30,000원을 내면 모든 매장에서 평생 20% 할인 (주류 제외)를 받을 수 있다는 시스템이다. 1년에 한 번씩 갱신할 필요 없이 본인의 이름과 전화번호만 말하면 평생 할인이다. 그래서 메뉴판을 보면 가격이 두 개로 나눠져 있는데, 정상가와 회원가로 구분이 돼있다. 상당히 심리적인 만족감을 가져올 수 있는 부분은 회원인 사람이 ‘나랑 가면 진진에서 20% 할인받을 수 있어’라고 이야기하고, 모임을 주도할 수도 있고, 약간 으스댈 수 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진진의 회원이 된 고객들이 진진을 자연스럽게 알리게 되고, 신규 고객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여기서 다시 ‘가랑비에 옷 젖는’ 이야기로 돌아오면, 회원가 기준 오향 냉채 14,800원, 멘보샤 6개에 14,000원, 물만두 5,600원, XO볶음밥 6,600원 등으로 상당히 저렴한 가격이다.
하지만 중국 현지 식재료를 사용해서 향신료와 기본 간이 강한 편이라 맥주보다 중국 고량주나 바이주와 잘 어울리는 요리이다. ‘나랑 가면 할인받을 수 있어!’라고 말하고, 할인받은 만큼 더 주문해서 먹게 되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글 | 사진 푸드 디렉터 김유경 (안젤라) (foodie.angela@gmail.com)
푸드 디렉터 김유경 (필명 안젤라) 은 디지털 조선일보 음식기자 출신으로 MBC 찾아라 맛있는 TV, KBS 밥상의 전설, KBS 라디오 전국일주와 같은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왔고, 테이스티코리아 유튜브 채널을 통해 한국의 맛을 전 세계에 알리고 있다. 최근에는 안젤라의 푸드트립 채널을 통해 세계 음식과 술, 그리고 여행지를 국내에 알리고 있으며, 네이버 포스트와 네이버 TV를 통해 만날 수 있다. 요리는 오감을 깨우는 여행이라는 철학으로 오늘도 맛있는 기행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