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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양동 고양이

보리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인연이 있다지만 동물과의 인연 역시 각별한 것이다. 보리 녀석을 만난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과천 별양동에 사는 사람들은 셀 수 없이 많고 그곳을 터 잡아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길가의 고양이들도 수없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필이면 그 녀석이 내가 살고 있는 5동 앞에 자리를 잡고 살고 있었다는 것은 특별한 인연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보리는 그리 만만한 녀석이 아니다. 길냥이 답지 않게 통통한 배를 자랑하는 물방울형 몸매의 보리는 다리가 짧아서 더욱  눈길을 끌었다.

 

'아, 길냥이가 저렇게 통통할 수 있나?" 처음에 그렇게 생각했다. 주인이 있는 고양이일수도 있겠다 여겨졌다. 당시 1살 정도 되었던 보리는 신수가 훤했다. 배 못지않게 통통한 얼굴은 찐빵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살짝 눈꼬리가 올라간 녹색눈을 빛내고 있었다. 녀석은 우리동 앞 자전거 보관대에 거처를 마련했다. 버려진 자전거 안장은 녀석에게 훌륭한 낮잠 장소를 제공했다. 그곳은 사람이 가끔  오갈 뿐 나무가 군데군데 서있어 쾌적하고 옆으로는 잔디밭이, 위로는 작은 동산이 있었다. 잔디밭은 쥐구멍도 몇 개 있어서 심심할 새가 없다.


한편, 우리동 11층 아줌마는 유명했다. 아줌마가 우리동에 이사 오신 것은 1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특유의 활달함으로 경비원 아저씨를 비롯해 입구 옆 벤치를 장악하고 앉아있는 70-80대 할머님들을 사로잡으셨다. 본인 역시 90세 가까운 노모를 모시고 다녔는데 매일 지치지도 않는지 하루에도 열두 번씩 함께 아파트 앞 상가를 왔다 갔다 하거나 연식이 된 SM5를 몰고 어딘가를 다녀오고 다시 나가곤 했다. 물론 아줌마가 아무리 싹싹하시다고 해도 난 인사를 할 시간도 없을뿐더러, 설사 인사를 했더라도 그날의 뇌에 그 정보가 입력되지 않았을 정도로 피폐한 상태였다. 일도 힘들었고 집에 우환도 있었다. 하지만 록희는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록희는 아줌마의 분신과도 같은 반려견이었다. 항상 어딜 가든 록희를 대동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어려서부터 아침저녁으로 산책을 해와서 비가 오건 눈이 오건 아줌마는 록희를 산책시켜야만 했다. 내 눈에 아줌마의 모습은 들어오지 못했지만 하얀 강아지 록희는 눈에 확 들어왔다. 덩치가 좀 있는 하얀개로 얼핏 보면 말티즈 같기도 하고 또 발바리 같기도 했다. 록희가 나를 보고 꼬리를 치자 아줌마는 재빨리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그때 록희아줌마 얼굴을 처음 봤다. 우리동네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미모였다. 당시만 해도 과천의 분위기는 그랬다. 아줌마들은 한결같이 화장기 없는 얼굴에 바로 앞 뉴코아아울렛에서 산 무난한 옷을 주로 입었다. 하지만 아줌마는 매일 구루프를 말아서 만든 둥글둥글한 웨이브 머리에 날렵하고 과감한 컬러의 원피스를 입으시고는 큰 키를 뽐내시며 활발하게 누비고 다니셨다. 아무튼 록희 덕분에 안면을 튼 이후로 나는 아줌마를 만날 때면 가벼운 목례 정도는 했다.


생각해보니 내가 20년이 넘게 별양동에 살고 있건만, 이렇게 이웃과 인사를 하며 지내는 것도 처음이었다. 기막힌 일이었다. 20년을 그렇게 살았다니! 아줌마와 안면을 튼 이후로 왠지는 모르겠지만 경비원 아저씨와도 오며 가며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벤치에 모여있는 우리동 할머니 군단과 록희 아줌마를 보았다. 할머니 군단과 안면을 트는 것은 너무 모험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몰래 지나치려 했는데 록희가 나를 알아보고 마구 짖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록희가 짖는 것은 나 때문이 아니었다. 벤치 뒤편으로 뭔가 통통하고 하얀 물체가 꼬리를 휘익휘익 돌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개가 짖건 말건 여유 있게 쓱하니 걸어 나오는 것이었다. 보리였다.


7킬로가 넘는 개가 옆에서 짖는데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통통한 꼬리를 슉슉 돌리며 록희 아줌마 주위를 슬슬 돌고 있는 보리. 아줌마는 준비됐다는 듯 고양이 캔을 하나 꺼내더니 보리에게 던져주었다. 그러자 보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허겁지겁 캔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록희아줌마가 눈을 반짝이시며 나에게 "너무 귀엽죠? 이름은 보리예요, 보리!" 하셨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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