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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양동 고양이

부탁

록희아줌마가 나에게 유난히 반갑게 인사를 건넨 이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당시 보리는 잠깐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다고 한다. 아줌마 말로는 지난 가을만해도 몸매가 날렵한 꽃미모 어린냥이었는데 겨울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푹 퍼져서 뚱땡이 아저씨처럼 되어 1동 앞에 있는 것을 데려왔다고 한다. 록희아줌마도 나도 맘먹고 밥을 챙겨주지는 않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보리는 밥상을 찾아 떠났던 것 같다. 사실 겨울 동안 가장 햇빛이 잘 비추는 곳이 1동이다. 록희아줌마 말로는 거기는 겨울에도 물그릇에 물이 잘 안 언다고 한다. 아침에 햇빛이 베란다 쪽으로 쫙 비추는데 여기저기에서 길고양이들이 앉아서 해바라기를 한다고 말이다.  아무튼 거기서 보리를 보고 우리동으로 가자고 손짓을 하니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선뜻 따라왔다고 한다. 미리 말해 두지만 보리의 지능은 장난이 아니다. 아무래도 단체생활을 하는 것보다 우리동에서 특별대우를 받는 게 나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줌마는 몇번 대화를 나누시더니 갑자기 "혹시 고양이 밥 좀 주지 않을래요?"하고 운을 떼셨다. 나는 갑작스럽기도 하고 당시 생활이란 게 너무 피곤해서 거기에 뭘 더 얹는다는 게 무척 부담스러웠다. 또 언제 이사 갈지 모른다는 걱정도 앞섰다. 아줌마는 내 얼굴을 뚫어져라 보시며 활짝 웃고 계셨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셨지만 속은 무척 타들어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못한다..."는 말을 하기엔 이미 늦었음을 직감하고 아줌마가 주말을 맡는대신 평일을 맡기로 했다.  


그렇게 길냥이를 위한 밥셔틀이 시작되었다. 사실 보리밥을 챙긴다기보다는 우리동쪽에 나타나는 너댓마리의 밥을 챙기는 일이었다. 보리는 항상 상주하며 밥을 먹었고 어린 얼룩이와 몸집이 작은 검은 냥이와 노랑이도 있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보리는 약 2살 가까이 되는 남자고양이였고 중성화 수술이 되어있었다. 나중에 보리가 다쳐서 근처 병원에 데려갔을 때 보리는 차에 타기만 해도 경기를 일으켰는데 아마도 어릴 적 포획되어 차에 실려가 중성화 수술을 받고 풀려난 트라우마가 아닌가 싶다.  


보리의 지능이 장난이 아니란 것은 여러가지로 증명이 되었는데 특히나 비상계단을 통해 총 14층을 오르내리며 마치 제 집 드나들 듯 자유자재로 생활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오늘 6층에 짜장면이 배달되었다 하면 그릇을 내놓을 때쯤 쓱 접근해서 남은 짜장을 맛보는 것이었다. 한번은 옆집에서 잠깐 내놓은 수박껍질을 맛깔나게 먹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보리 몸매가 통통함을 넘어 물방울 모양이 된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그러니 우리집을 찾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혹시나 저녁에 캔이 없거나 특별히 할 일이 없거나 하면 보리는 우리집에 찾아와서 현관문을 긁거나 야옹~ 소리를 한번 내곤 했다. 처음엔 무척 황당했지만 나중엔 "어? 내가 캔을 안줬나?" 했다


날이 거의 풀릴 때쯤 나무 밑에서 보리 밥을 챙겨주고 있는데 웬 여자분이 나타나셨다. 보통 주부 같지는 않고 세미정장을 입은 한 여자분이 저만치서 보고 있다가 슬슬 다가오셨다. 그러더니 보리를 가리키면서 "이 고양이가 여기서 밥을 먹나요?" 하고 물으셨다. 그렇다고 하니까 반가워하시며 "1동에서 밥 주던 사람인데 갑자기 안 보여서 한번 찾아보는 중이었다"고 하셨다. 그 여자분은 1동에서 어린이집을 하는 원장님이었는데 거기 1층 베란다 아래에 냥이들이 모였고 그래서 밥을 꼬박꼬박 챙기셨다고 한다. 그분은 보리를 보더니 "밥을 정말 잘 먹는 애기냥이었다"라고 하셨다. 왜 아니겠나.... 아무튼 어디 가서 밥은 굶지 않는구나 싶으셨는지 발걸음이 가볍게 오던 길을 가셨다.

  

그런 와중에도 통통한 배를 자랑하며 부지런히 밥을 먹고 있는 보리를 보니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리야, 넌 대체 집사가 몇 명이냐?" 길냥이가 배 한번 곯지 않고 근 2년을 지내오다니... 이 녀석이 타고난 복이구나 싶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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