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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로파 May 23. 2023

팬지꽃

닫다. 그리고 닿다

벽 아래 지하에서 종이의 윤곽을 더듬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오로지 양초 하나와 전등 하나만 켜고서 아주 오래된 폐지를 모아 묶는 사람이었다. 언제 어디에서 나온 종이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함부로 버리기에는 찜찜한 종이들이 하루에 한 번 그의 앞에 도착했다. 종이 꾸러미에는 꾹꾹 눌러쓴 편지와 할 일을 휘갈긴 메모지, 마스킹된 기밀 자료와 고백적 에세이 따위가 섞여 있었다. 한때 사람 사이에서 맴도는 말 중에 신중히 골라 종이에 담은 것일 테다. 그러나 글자 모양새와 그 안에 담겨있던 관계는 이내 바스러져 원형을 잃었다. 뭉개진 글자들은 낮은 조도 아래에서는 더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에게 종이는 이미 소멸한 단어의 부스러기 같은 것이었다. 손끝으로 종이의 크기와 두께를 가늠하여 비슷한 것들을 그러모아 어딘가로 보낼 뿐이었다.

     

지하는 눈으로 끝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컸지만 또 눈에 보이는 만큼 좁았다. 종일 사락거리는 소리뿐, 적적하고 고요했다. 그가 종이를 매만지는 속도는 느리지 않았지만 벽을 지나치는 신발들은 언제나 그것보다 서둘렀다. 빨간 꽃 장식이 붙은 작은 구두, 광을 낸 갈색의 옥스퍼드화, 줄이 그어진 회색 운동화, 지익 지익 끌리는 검은 슬리퍼, 아슬아슬한 노란색 스트레토힐.

     

그는 세간의 시선에서는 항상 외로운 사람이었다. 가끔은 다른 사람이었다. 자주 틀린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팬지꽃 한 송이를 알고 있었다. 어느 날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창살이 벌어진 틈 사이로 팬지꽃에서 보라색 꽃잎 하나가 떨어지고 있었다. 그날부터 그는 그 꽃을 보며 오늘은 햇빛이 어떤지, 충분히 비가 오는지, 땅이 촉촉한지를 알아차렸다. 창살 바로 아래에는 딛고 올라설 의자 하나를 놓아두었다. 며칠간 비가 오지 않아 이파리가 끝부터 말라가면 의자에 올라 창살 틈 사이로 손을 뻗고 마시던 물을 뿌려 주었다. 한해살이 꽃이었던 그것이 시든 후에는 한 계절을 기다렸다가 꽃씨 한 봉지를 사서 같은 자리에 심었다. 돌바닥 사이 흙에 손가락으로 구멍을 내어 씨 몇 개를 꼭꼭 숨겼다. 첫 싹이 나기까지 촉촉이 땅을 유지하고 춥지 않은지 종종 손을 뻗어 흙바닥의 온도를 체크하곤 했다. 빠르게 지나치는 신발 사이에서 새싹은 벽에 바짝 붙어서 살아남았다. 보라색 봉오리를 하늘로 솟아냈다. 그렇게 5월, 비가 한차례 오고 난 뒤 나비가 벽을 따라 날아왔다. 모든 것이 멈춰있는 벽에서 팔랑이는 나비는 사람들의 시선을 잠시 붙잡았다.

     

“이런 데 꽃이 피어있었네?”     


그는 그 이야기를 들었을까. 살며시 웃으며 또 윤곽을 더듬어 종이를 정리했다.



Wall-마주침/stone, mixed media, oil on canvas/65.2X91.0cm/2019


<작가 소개>

김영신 (Young Shin Kim)

개인전 17회, 국내외 아트페어 및 단체전 다수

현 한국미술협회, 한국전업미술가협회 등 대표


작가 작품 인터뷰 영상

"벽에 꽃을 피우고 이끼도 얹어 생명을 흐르게 하고 싶다.” by 김영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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