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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광웅 Jun 01. 2016

100일 내가 본 유럽-체르마트

아찔

2015년 10월 10일


고르너그라트 전망대에서


아찔- 마테호른 

                                                                                                                                          

숙소에 들어와서 그냥 뻗었다.

오늘 수고한 양말은 이제 다 해져서 버리게 되었다.

오늘은 결과적으로 의도하지 않게 고르너그라트에서부터 체르마트까지 하이킹을 하게 되었다. 오늘 일을 생각하면 아찔하면서도 특별했던 경험이었다.  

 '유럽 100일 여행 中 D-56'                                        


이때 일을 생각만 하면 아직도 온몸에 소름이 돋아


이야기를 하기 전에 마테호른 지도를 설명해 줄게. 마테호른을 올라가는 방법은 3가지가 있어. 첫째 지도의 오른쪽에 보이는 마테호른 글라시어 파라다이스(Matterhorn glacier paradise)에 올라가 정상을 밟는 것, 두 번째 중앙에 보이는 고르너그라트(Gornergrat)에 올라가 좋은 전망을 감상하는 것, 세 번째 왼쪽에 조금은 낮지만 로트호른-수네가(Rothorn-Sunnegga)에 올라가 주변의 호수를 하이킹하는 것이야.


왼쪽부터 오른쪽 위 방향으로 로트호른-수네가, 고르너그라트, 마테호른 글라시어 파라다이스
기차에서 바라본 마테호른


스위스는 10월부터 케이블카 점검 기간이라 일부 구간은 운행을 중단해. 내가 갔었을 때는 마테호른 글라시어 파라다이스와 로트호른까지 가는 케이블카가 운행을 안 했지. 결국 내가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은 고르너그라트에 올라가는 방법 아니면 수네가까지 케이블카를 타고 5대 호수 하이킹을 하고 다시 돌아오는 방법이었어. 근데 나는 한 곳만 다녀오기에는 뭔가 아쉽더라. 그래서 나는 고르너그라트까지 올라가서 지도에 보이는 24번 하이킹 코스를 거쳐서 그륀 호수(Grünsee)부터 5대 호수 하이킹을 한 후 수네가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오는 걸로 계획을 세웠어. 나는 그냥 지도만 보고 계획을 세운 거야. 지도에 길이 표시되어 있길래 간단할 줄 알았지. 근데 그게 아니었어...


시작은 순조로웠어. 일본인 관광객들로 가득 찬 기차를 타고 고르너그라트에 올라갔어. 사진으로 많이 봤었지만 막상 눈 앞에 보이는 마테호른의 자태가 얼마나 압도되던지. 어떤 산도 마테호른의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로운 산세를 지녔고 뾰족한 봉우리는 높게 솟아있었어. 구름 한 점 없이 없는 맑은 날씨는 마테호른을 감상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최고였어. 고르너그라트에 잠시 숨을 고르고 나는 바로 이동했어. 하루 안에 5대 호수도 들러야 했기 때문에 서둘렀어. 처음에는 15번 하이킹 코스로 잘못 이동해서 다시 땀을 뻘뻘 흘리며 고르너그라트까지 다시 올라가야 했었지. 솔직히 올라가는 길은 마테호른이니까 어렵다고 예상은 했었어.


고르너그라트 역
마테호른과 까마귀. 고르너그라트


하이킹을 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게 뭔지 아니? 그건 바로 눈과 얼음이야.


지도에 빨갛게 표시된 것은 그 코스가 상급자 코스라는 뜻이야. 여기서 나는 정말 죽을 뻔했어. 지금 생각해도 내가 왜 그렇게 미친 결정을 했는지 모르겠어.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는 게 어떤 것인지 이곳에서 뼈저리게 느꼈지. 아무런 안전 장비 없이 손과 발만을 이용해 산을 내려와야 하는데 길이 너무 미끄러워서 이동하기가 어려웠어. 바로 밑은 낭떠러지라서 내가 발을 조금만 헛디뎌도 죽음이었지.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정신이 아찔하더라. 눈과 얼음 때문에 길이 미끄럽고 마테호른에서 죽을 수는 없으니까 두 손 두발로 기어 다니고 누워 다니고 살기 위해 갖은 노력은 다했지. 그렇게 죽을 뻔한 고비를 몇 번 넘기니까 겨울의 마테호른은 사라지고 가을의 마테호른이 나타났어.



 5대 호수 하이킹은 그륀 호수(Grünsee), 무스이예 호수(Moosjisee), 라이 호수(Leisee), 그린드예 호수(Grindjisee), 슈텔리 호수(Stellisee) 순서로 이동했어. 5대 호수 하이킹에는 생명의 위협은 없었지만 체력적으로 한계였어. 등산을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올라갈 때는 허벅지가 땅기고 내려갈 때는 발바닥이 쑤셔. 호수에 들를 때마다 틈틈이 쉬었지만 마테호른은 보통이 아니더라. 그래도 각 호수에 비치는 각기 다른 모습의 마테호른을 보니까 포기할 수 없었어.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지만 정신력으로 계속 이동했어. 마지막 슈텔리 호수에 도착하자 힘이 쫙 풀리더니 잠이 오더라. 왠지 모를 뿌듯함이 느껴지고 고르너그라트 등반과 5대 호수 하이킹을 둘 다 해냈다는 성취감이 들었어.


'드디어 오늘 일정이 끝났구나'라고 생각이 들었지.



로트호른 케이블카 운행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서는 수네가까지 이동해야 돼. 나는 로트호른 케이블카 역에서 케이블카 선만 잘 따라가면 수네가 케이블카 역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고 무작정 따라갔었어. 처음에는 갈만하다고 생각돼서 계속 내려갔는데 가면 갈수록 뭔가 이상했어. 더 이상 길이 안 나오고 가시밭, 돌길에 케이블카 선과 계속 멀어지고 있는 거야. 길이 가파를 때는 바람막이를 엉덩이에 깔고 누워서 이동했고 바위와 나무들로 막혀있는 구간은 바람막이로 내 몸을 둘러싸고 통과했어. 저 멀리 순록들까지 보이니까 갑자기 불안한 느낌이 들더라. 구글 지도를 켜도 위치를 못 잡고 길을 잃었다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내가 왜 괜한 모험을 했는지 후회가 몰려왔어.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작정 밑으로 내려가는 것뿐이었지.



어느 정도 내려가니까 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가 나왔어. 정확한 위치는 모르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수네가 옆에 있는 투프테른(Tufteren) 근처였던 것 같아.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갔고 산은 깜깜해지기 시작했지. 수네가 케이블카 역을 찾아야 하는데 방향을 모르니까 더 이상 다른 곳으로 움직일 수가 없었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산을 무사히 내려갈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뿐이었어. 그런데 갑자기 반대쪽 길에서 사람들이 걸어오는 게 보였어. 할머니와 어린아이 그리고 젊은 남자가 보였는데 아이의 아버지였지. 스위스 사람들이 언어에 능통해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 나는 곧바로 영어로 이야기할 수 있었어. 그분들도 수네가 케이블카 운행이 끝나서 걸어서 체르마트로 이동하고 있다는 거였지. 이런 우연이 있나! 다행히 나도 그분들을 따라서 체르마트로 이동할 수 있었어. 그분들의 이름은 모르지만 아직도 그분들께 고마워.


투프테른부터 체르마트까지 구간은 숲 속이었어. 할머니가 계셨기 때문에 빠른 속도를 낼 수 없었고 천천히 천천히 이동했어. 아이는 초등학생으로 보일 정도로 어렸지만 꿋꿋하게 산길을 잘 헤쳐나가더라. 점심에 샌드위치 하나만 먹어서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중간에 쉬면서 할머니가 주신 바나나와 아저씨가 주신 에너지바는 큰 힘이 되었어. 이렇게 쉬고 있으니까 산이 완전히 어둠에 덮였어. 온도도 급격하게 떨어지고 바람이 많이 불었어. 나는 바람막이를 입고 플래시를 켰어. 밤의 숲 속은 정말 춥고 아무것도 안 보여. 그분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도 숲 속에서 헤매고 있었겠지...



2시간이었나 3시간이었나,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한참을 내려가니까 산 밑에서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어. 마을에서 나오는 불빛이었지. 저 멀리서 체르마트가 보이니까 힘이 나기 시작했어. 아저씨는 체르마트까지 가는 지름길을 알려주셨어. 자신은 아이와 어른이 있기 때문에 가지 못하지만 나는 그곳을 통과하면 더 빨리 체르마트에 갈 수 있다고 알려주셨지.


그리고 마침내 내가 고르너그라트에 올라간 지 12시간 만에 체르마트에 도착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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