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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광웅 Jun 20. 2016

100일 내가 본 유럽-프로방스

특징, 희망

2015년 10월 17일

  

가르교 앞에서


특징- 가르교

           

아비뇽에 도착했을 때는 내가 유적지에 온 줄 알았다. 건물들이 모두 세월의 흔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서지고 휩쓸린 흔적들과 흙벽돌로 쌓아서 황톳빛을 띠어서 더 그랬다.

유적지 같은 건물들은 많이 봤었다. 에든버러의 로슬린 채플을 시작으로 최근에는 리옹의 로만 갈로 유적지까지. 하지만 도시 전체가 유적지 같은 것은 처음이었다.

전체적인 건물 모양은 프랑스 양식을 따라가려고 했었다. 하지만 빨간 지붕과 흙빛 벽돌 그리고 부서진 벽들이 새로운 느낌을 가져다주었다.  

'유럽 100일 여행 中 D-63'                                           


오랜만에 느끼는 따뜻한 바람이었다. 단순히 기후적 차이뿐만이 아니다. 깎여지고 부서진 건물들 속에서 세월의 흔적들이 느껴졌다. 나는 아비뇽에 도착한 순간 오래됨에 대한 기준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2차 세계 대전의 피해를 받지 않은 유럽 내륙의 건물들은 대부분 몇백 년을 내려올 정도로 오래됐지만 남프랑스 지역의 건물들에 비하면 명함도 못 내민다. 로마시대부터 이어져 온 이 곳의 건축물들은 설명이나 안내문 없이는 용도를 파악하지 못한다.


로마의 흔적은 프로방스 지방의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물을 끌어오기 위해 만든 거대한 가르교는 그 모습 자체만으로도 압도가 될 정도로 거대했다. 아레나는 콜로세움보다 작았지만 검투사 경기가 여러 도시에서 개최되었다는 것을 입증해주었다. 퐁텐 정원은 파리의 정원과 비슷했지만 주변의 나무들과 무너진 터로 인해 또 다른 느낌을 일으켰다. 로마 제국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프로방스 지방은 파리, 리옹과는 또 다른 곳이었다.


아비뇽 교황청
아비뇽 교황청
생 베네제 다리


언어, 기후, 역사, 종교, 지리와 같은 여러 가지 요인들에 의해 같은 국가에 있는 도시라도 전혀 다른 특징이 나타난다. 대한민국의 경우 한반도 안에서 한민족이라는 이념 하에 이어져왔기 때문에 언어, 역사, 기후의 차이가 크지 않다. 관광지로 많이 찾는 서울과 부산을 비교하면 내륙과 해안지방이라는 지리적 차이만 있을 뿐이라 상대적 이질감은 적다. 하지만 내가 방문했었던 프랑스의 도시들의 경우에는 상황이 달랐다. 파리, 리옹, 프로방스 지방은 언어와 종교는 같지만 기후, 역사, 지리가 각자 다르기 때문에 각각 다른 특징이 나타난다. 다시 말해 도시가 나라로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그 도시 자체로서 인식이 가능해진다.


유럽여행은 돈과 시간의 투자가 상당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짧은 기간 동안 최대한 많은 것을 보고 오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시를 위주로 경로를 짜야한다. 관광지를 선정할 때도 나라보다는 도시를 느낄 수 있는 관광지 위주로 선정해야 다채로운 여행이 될 수 있다. 항상 새로움을 찾고 배워야 하는 장기여행의 경우에도 도시 선정은 매우 중요하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나의 여행도 각 도시마다 특징이 뚜렷했기 때문에 훨씬 더 풍성한 여행이 될 수 있었고 기억에 많이 남게 됐다.


멀리서도 크게 보이는 가르교

2015년 10월 18일


엑상프로방스 중심의 로톤데 분수


희망- 블라블라카

                 

오늘은 내 계획대로 되는 날이 아니었다.

크레타로 가는 항공편이 취소되어 대체 항공편도 없었고 엑상프로방스에 왔지만 한인교회 예배도 못 드렸다. 블라블라카로 싸게 니스로 가는 차를 예약했지만 그것도 실패했다.

모든 계획이 무너지고 나는 여행을 때려치우고 싶었다. 내가 이 고생하면서 여행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먹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버스터미널로 돌아갔다.

버스를 타려고 이동하는데 앞에 남색 폭스바겐 차량이 있었다.

'유럽 100일 여행 中 D-64'


유럽 전역, 특히 프랑스 내에서는 블라블라카라는 카풀 시스템이 활성화되어있다. 사이트를 이용하기 위해서 우선 서로 만날 장소를 정한 후 운전자가 제시한 금액으로 결제를 한다. 이 금액은 바로 운전자에게 입금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목적지까지 정확히 도착한 후 사이트에서 발급한 코드를 건네주어야 돈이 지급된다. 블라블라카는 일반적인 교통수단보다는 저렴하면서 히치하이킹보다는 안전하기 때문에 점점 이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나도 블라블라카를 이용해 님에서 엑상프로방스, 엑상프로방스에서 니스로 가는 구간을 신청했다.


엑상프로방스는 남프랑스에서 주일예배를 드리기 위해 추가한 도시였다. 주일 예배는 한인교회에서 드리고 싶었고 엑상프로방스는 니스로 가기 전에 들를 수 있는 도시였다. 엑상프로방스까지 가는 구간은 무난했다. 운전자가 영어를 못했지만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별 탈 없이 엑상프로방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로 찾아갔지만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알고 보니 금주 예배는 다른 곳에서 연합예배로 드려졌던 것이었다. 여기서부터 계획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현지 교회를 찾아갔다.


엑상프로방스에 도착하자마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프랑스어라고는 'Merci' 밖에 모르는 내가 예배를 제대로 드릴리는 없었다. 결국 예배시간 내내 꿈나라와 현실을 오고 가며 꾸벅꾸벅 졸았다. 다행히도 4시간 후에 영어 예배가 있었고 나는 배낭을 맡기고 남는 시간 동안 엑상프로방스를 둘러보았다. 계획은 한번 더 틀어졌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가게들은 모두 문을 닫았다. 유명하다던 엑상프로방스의 시장도 일요일에는 모두 쉬었다. 도저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비가 와서 바깥에 계속 있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가게들은 모두 문을 닫았기 때문에 구경할 것도 없었다. 우울했던 내 기분은 모든 건물들을 잿빛처럼 만들었다.


영어 예배를 드리는 중에도 나는 집중을 할 수 없었다. 비는 점점 쏟아지고 지중해의 날씨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니스로 가는 블라블라카를 신청했었기 때문에 나는 예배를 마치고 서둘러 신청장소였던 버스터미널로 이동했다. 버스터미널 앞에서 나는 배낭을 메고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운전자가 알려준 남색 폭스바겐 차량을 기다렸다. 혹여나 운전자가 나를 알아보지 못할까 봐 나는 버스터미널로 차량이 올 때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차종이 무엇인지 확인했다. 약속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많은 차량들이 버스터미널 쪽으로 들어왔지만 남색 폭스바겐 차량은 들어오지 않았다. 시간이 30분쯤 지나자 나는 블라블라카 마저도 실패했음을 직감했다.



블라블라카는 실패했지만 니스까진 가야 했다. 나는 버스터미널에서 니스로 가는 버스 시간표를 확인했다. 다행히도 아직 막차가 남아있었고 그때까지 시간이 있었다. 나는 일단 허기부터 달래기 위해 시내 쪽으로 들어갔다. 값싼 길거리 음식이라도 먹고 싶었지만 역시나 엑상프로방스의 가게들은 모두 문을 닫고 일부 값 비싼 식당들만이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몇 푼 아끼려고 블라블라카를 신청한 거였는데 여기서 비싼 음식을 먹으며 돈을 쓰는 게 아까웠다. 하는 수 없이 다시 터미널 쪽으로 돌아왔다.


한인 교회 예배도 못 드리고 엑상프로방스 관광도 못하고 모든 것이 실패했다고 느끼고 있던 순간 나는 기적적인 순간을 경험했다. 버스터미널 앞에 남색 폭스바겐 차량이 주차되어있던 것이다. 주변에는 블라블라카를 신청했던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운전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물어봤다. 운전자는 고속도로에서 약간의 사고가 있었고 그래서 늦어졌다고 설명을 했다. 영화 속 극적 반전처럼 모든 상황이 뒤집어졌다. 깜깜한 프로방스 지방을 지나 코트다쥐르의 화려한 불빛들이 나타나자 나의 마음속에서도 희망의 불빛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희망의 불빛. 니스빌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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