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클림트
2015년 11월 12일
아스트리드의 집은 생각보다 작았지만 아스트리드만 사는 집 치고는 꽤 큰 편이었다.
그녀는 오전에 일을 하고 오후에도 일을 하는데 점심시간에 나를 위해서 집에 들렀다.
그녀는 호박죽과 감자튀김을 해줘서 나에게 주었다. 방금 먹긴 했지만 항상 배고프니 음식이 안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녀는 고추도 키우고 있었다. 유럽 사람 같지 않게 매운 것을 좋아한다니 깜짝 놀랐다. 그녀도 여행을 좋아하는데 역시 일 때문에 잘 못 다니다 보다.
'유럽 100일 여행 中 D-89'
여행자가 바라보는 도시의 모습은 그 도시의 본모습이 아닐 수도 있다. 여행자가 가지고 있는 시간의 제약은 도시의 본질을 파악하기 어렵게 만든다. 여행자가 바라보는 모습은 도시의 일부분이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해가는 한 부분에 지나지 않다.
여행자가 도시에서 만났던 사람, 장소, 느낌 등의 모든 것들은 여행자가 바라보는 도시의 모습을 만들어준다. 이는 짧은 시간 내에 많은 것들을 만드는 과정이기 때문에 불완전하고 무너지기 쉽다. 그래서 이 과정은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도시에 대한 배경지식은 이 과정을 한결 수월하게 만들어준다. 도시에 대한 정보가 많을수록 도시를 만들 수 있는 재료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카우치서핑을 하다 보면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외국인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가장 중요한 정보는 무엇보다 자신의 출신 국가다. 국가는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할 수 있는 개념이므로 자신의 출신 국가를 설명함으로써 자신을 소개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자신의 나라를 이해해야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
빈에서의 호스트, 아스트리드와의 첫 만남 동안 나는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빈에 대한 소개와 그녀의 취미와 카우치서핑 경험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그녀의 일 때문에 오랜 시간 동안 이야기할 수 없었지만 나는 그녀에 대한 감사한 마음 때문에 나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다음날 나는 그녀와 길게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나를 소개하기 위해 대한민국을 소개해 주었다. 외국인들이 관심이 많은 남북문제는 물론이고 현재 한반도의 상황, 대한민국 내 여행 도시와 서울의 관광지들 그리고 대학생활에 잠시 휴식을 가지고 여행을 하고 있는 내 이야기들까지.
한식에 대한 소개도 빠지지 않았다. 나는 특별히 그녀를 위해 아침부터 마트에 달려가 비빔밥 재료를 구입했다. 나물은 없었지만 최대한 비슷하게 야채들을 구입한 후 같은 날 저녁 요리를 시작했다. 야채들은 채 썰어 기름에 볶고 밥은 물에 불린 후 익혔다. 그 후 밥과 야채를 그릇에 정갈하게 담고 부친 계란과 프라하에서 받은 김과 고추장을 예쁘게 올려놓았다. 음식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그녀는 한 입 맛보더니 맛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오랜만에 맛보는 비빔밥이라 한톨도 남김없이 맛있게 먹었다. 특별히 그녀는 김을 좋아해서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김을 그녀에게 선물했다. 그녀는 나를 통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배경지식이 생긴 것이다.
외국인과의 만남은 우리나라를 알리는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나도 우리나라에 대해서 배워나갈 수 있었다.
2015년 11월 13일
하지만 역시 하이라이트는 클림트의 키스다.
클림트의 작품을 키스만 봤다면 이게 왜 대단한 작품인지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클림트의 작품을 보고 나서 이 작품을 보니 왜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벨베데레 궁전에서 행복한 유럽여행의 마지막 미술관 기행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유럽 100일 여행 中 D-90'
미술사 박물관 중앙 계단을 차지하고 있는 그림들, 그림 속에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여인들, 여인들은 모두 다르지만 비슷한 느낌을 풍겨낸다. 클림트의 여인들은 빠져들게 하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배경과 인물의 부조화는 어색함을 발생시킨다. 기술의 발달로 누구나 손쉽게 사진 편집이 가능해진 요즘 인터넷 상에서 수많은 합성사진들을 접하게 된다. 편집된 사진들의 대부분은 커뮤니티 사이트의 유머 소스로 활용되고 있다. 이런 사진들은 합성의 과정에서 배경과 인물의 모순을 발생시켜 새로운 의미를 이끌어낸다. 배경과 인물은 어울리지 않지만 외려 이런 모순 속에는 새로운 차원의 즐거움이 생성된 것이다.
나는 레오폴드 미술관에서 클림트의 그림이 주는 느낌이 무엇인지 느끼기 시작했다. 클림트의 그림을 마주치는 순간 느꼈던 부자연스러움은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클림트의 그림들 속 여인들은 배경과 어울리지 않았다. 배경은 배경대로 인물은 인물대로 따로 놀았다. 마치 신문 속에 인물만 잘라서 붙여놓은 것처럼 말이다.
첫째 날 빈에서의 일정이 늦었던 터라 레오폴드 미술관을 마치고 나온 내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미술관을 나와 박물관 단지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날이 깜깜해져 있었고 주변의 박물관들은 하나둘씩 문을 닫고 있었다. 더 이상 미술 작품을 감상하기에는 무리였고 아무것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클림트의 작품이 주는 의미보다 클림트라는 화가가 주는 의미 때문에 억지로 작품을 감상했었다.
클림트와의 만남은 다음날 벨베데레 궁전에서 다시 이루어졌다. 벨베데레 궁전은 궁전보다는 미술관에 가까웠다. 궁전은 빨간색 지붕의 하궁과 에메랄드색 지붕의 상궁으로 나뉘어있다. 나는 하궁에서 다시 클림트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의 작품을 보면 볼수록 그의 그림은 내 마음에 조금씩 다가왔다. 부자연스러웠던 배경도, 비슷하게 보였던 여인들도 찬찬히 살펴보니 배경을 통해 인물에 더 집중할 수 있었고 여인들도 클림트만의 방법으로 개성 있게 묘사되어 있었다.
벨베데레 상궁에서는 하궁보다 더 많은 미술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여기에는 중세 미술부터 바로크, 사실주의, 인상주의, 낭만주의, 신고전주의,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서양 미술 역사의 모든 것을 총괄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곳엔 클림트 작품의 하이라이트인 「키스」가 전시되어 있다. 그림은 지금까지의 작품들과는 다른 분위기를 내뿜으며 그림 속 배경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황금빛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배경은 그림 속 남녀와 분리되어 있지만 동시에 그 둘을 더욱더 밝히 비춰준다. 배경의 꽃밭은 인물들의 옷과 뒤섞여 알록달록한 빛을 내뿜는다. 여인의 표정은 말로 표현할 길 없을 정도로 평온하다. 둘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정적이지만 동시에 살아 움직인다. 키스, 그림은 그 짧은 순간을 긴 공간으로 전환시켜 진한 여운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