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초등학교 역사 교육 관찰기(1)

by Alfius Historographus

영국 초등학교 역사 교육 관찰기(1)


한국에서도 영국사를 공부했고, 영국으로 건너와 20년 가까이 살고 있지만, 아이로 인해 경험하는 영국 사회의 단면은 항상 새롭습니다. 교과서 없는 수업 방식도, 교장선생님이 바뀔 때마다 확연히 달라지는 학교 분위기도, 학부모가 보조 교사 노릇에 학교 발전기금 모금 행사까지 주도해야 하는 상황도 낯설지만, 아이들이 역사를 배우는 방식은 다소 생소하면서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영국 초등학교는 학교마다, 교사마다 공부하는 방법이 다 다르다는 점입니다. 오늘의 글은 특정 학교의 공부 방법에 대한 관찰일 뿐, 영국 초등 교육 전체에 대한 분석은 아닙니다. 청소년 역사책을 쓰기 전에 GCSE 역사 과목의 교과과정과 평가 방식을 살펴본 적은 있지만, 초등 교육은 그저 제 아이를 통해 관찰한 바가 다입니다.


편의상 알피라고 부르겠습니다. 알피의 학교는 역사와 지리 과목이 묶여 있고, 내용상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1-2, 3-4, 5-6학년의 교과과정은 서로 묶여 있어서, 같은 주제를 어느 해에는 1학년이, 어느 해에는 2학년이 배우는 식입니다. 예를 들어 Year A에 1학년이 런던 대화재 사건을 배웠다면, Year B에는 새뮤얼 피프스에 대해 배웁니다. 2학년은 반대가 되겠지요.


알피는 Year B에 해당하여 1학년 때 새뮤얼 피프스를, 2학년 때 런던 대화재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처음 아이의 입에서 새뮤얼 피프스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응? 그 새뮤얼 피프스? 네가 어떻게 알아?"라고 반문했던 기억이 납니다.


피프스는 17세기 영국의 고위 행정가였으나, 그 자신의 업적보다는 1660~1669년까지 10년 정도 거의 매일 쓴 일기로 더 유명한 인물입니다. 사생활 보호를 위해 암호로 쓰인 그의 일기는 개인사뿐 아니라 당시의 여러 사회적 현상들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어,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입니다. 이 일기 덕분에 그는 영국의 2파운드 주화에까지 새겨지는 영광을 누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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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해도 1학년의 첫 역사 수업을 새뮤얼 피프스로 시작하다니? 당시 아이가 그에 대해 얼마나 이해했는지는 사실 지금도 잘 모릅니다. 학년말에 집에 가져온 노트에서 그가 누구였고, 어떤 사건들에 대해 일기에 적었다 정도의 내용을 확인한 것이 다입니다(알피의 학교는 모든 수업 자료와 공책을 학교에 두고 집에 가져오지 않습니다. 학년말에 성적표와 함께 돌려주지요. 공책 및 모든 필기구는 학교에서 제공하므로, 집에서 가져가는 것은 물통과 간식, 학교 급식을 먹지 않는다면 도시락이 다입니다).


2학년이 되어 1666년 런던 대화재 사건을 본격적으로 배우면서 다시 새뮤얼 피프스의 이름이 나왔습니다. 그의 일기에서 관련 내용을 발췌하여 사건을 재구성하고, 지도를 통해 불길이 번져 나간 경로를 공부합니다. 교과서는 아니지만, 책을 한 권 정해서 선생님이 읽어줍니다. 불이 처음 난 빵집에서 일하던 한 소년의 눈에 비친 화재 현장을 실감 나게 서술한 책입니다. 일종의 히스토리 픽션물입니다.


수업 시간마다 한두 장씩 읽어주니, 감질이 난 알피가 책을 사 달라고 졸랐지만 선생님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알피의 학교는 아이들이 수업 시간에 기대감을 갖게 해야 하므로, 선행을 허용하지 않는 방침을 고수합니다. 다음 학기의 주제도 아이들에게는 미리 알려주지 않습니다. 물론 부모들은 홈페이지에서 확인이 가능합니다.


런던 대화재를 공부하는 동안 아이들이 받은 과제는 런던의 대화재 기념비 The Monument를 방문하는 것입니다. 런던은 하루에 다녀올 수 있는 거리라 아주 무리한 편은 아닙니다. 알피도 학기 중간의 하프텀 기간을 이용해 처음 화재가 시작된 푸딩 레인과 대화재 기념비에 다녀왔습니다. 높이 62미터에 달하는 기념비는 걸어서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가 있는데, 311개의 계단을 다 오르면 인증서를 줍니다. 아직도 잘 간직하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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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학년과 4학년에는 고대 이집트와 마야 문명에 대해 배웠습니다. 이 시기부터는 아이들이 글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으니, 참고 서적의 범위가 넓어집니다. 아이들은 수업과 관련된 내용의 책을 집에서 가져올 수 있습니다. 가져온 책에는 이름을 쓰고, 한 학기 동안 교실에 비치합니다.


한 학기에 한 번 모두에게 돌아가는 show and tell 시간에는 물건이나 기념품을 가져와서 자랑할 수도 있습니다. 알피는 엄마가 이집트 여행에서 가져온 파피루스를 들고 가 신나게 설명했다고 합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로 한 번도 꺼내 보지 않았지만 오래 간직한 보람이 있네요.


알피의 학교는 학기가 시작하면 항상 부모들에게 공문을 보냅니다. 학부모들 중 해당 학기에 공부하는 주제에 대한 전문가가 있다면 일일 교사로 와 달라는 내용입니다. 학부모의 친척이나 친구도 가능한데, 신기하게도 대부분의 주제에 지원자가 있습니다. 뉴스레터를 통해 근처 대학의 이집트학 교수님이 한 시간 정도 특강(?)을 해 주었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역사뿐 아니라 과학이나 지리 과목도 대부분 한두 명의 깜짝 일일 교사가 있습니다. 누군가의 부모일 경우는 해당 아이에게도 비밀로 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아직까지는 부모가 학교에 오면 좋아할 나이라, 대부분은 엄마나 아빠의 얼굴을 보면 매우 기뻐합니다. 때로는 해양생물학자 할머니가 오시는 경우도 있지요.


이 학교의 특징은 해당 학기의 주제가 정해지면 여러 과목에서 입체적으로 다룬다는 점입니다. 고대 이집트가 주제라면, 역사 시간뿐 아니라 영어 시간에도 이집트 관련 책을 읽고, 미술 시간에는 이집트식 장신구 만들기와 상형문자 그리기 수업을 합니다. 수학 시간에는 이집트식 숫자 읽기를 배우고, 음악 시간에는 이집트 전통 음악을 들려줍니다.


상형문자의 매력에 푹 빠진 아이들은 여기저기에 상형문자로 이름을 쓰고, 자신들만의 비밀문서를 만듭니다. 한 학기에 두 번 정도 있는 오픈데이에 교실을 방문해 보니, 온갖 이집트 문양의 그림들과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의 포스터들이 벽에 가득합니다. 물어보니 아이들이 상형문자로 쓴 시라고 하네요.


3학년이 되면 지역의 박물관으로 한 학기에 한두 번 정도 견학을 갑니다. 4학년에는 편도 1시간, 5학년이 되면 2시간 거리 정도까지도 갑니다. 런던 내셔널 갤러리나 자연사박물관 등을 방문하신 분들은 대부분 형광색 조끼를 입은 한 무리의 어린이들을 보신 경험이 있을 겁니다.


시내에 마침 이집트 미라를 볼 수 있는 박물관이 있어서 다 같이 견학을 갔습니다. 작은 도시라 3학년쯤 되면 이미 여러 번 가 봤을 곳입니다. 그래도 친구들과 함께 가서 박물관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니 재미가 있었나 봅니다. 견학이 있던 그 주말에 엄마를 끌고 다시 가서 신나게 이것저것을 보여줍니다. 알피는 사람보다도 뱀과 고양이를 비롯한 동물들의 미라를 매우 좋아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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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에서는 좀 더 심각한 주제로 이어지는 고학년의 공부와 역사 공부 방식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다뤄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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