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크리스마스 시즌이 다가오면 극장들의 모습은 뚜렷한 변화를 보입니다. 셰익스피어나 현대극, 때로는 실험적인 연극이 올라가던 무대는 화려한 색감의 의상과 과장된 몸짓, 그리고 누구나 알 만한 동화 이야기로 채워집니다.
단연 크리스마스 시즌의 하이라이트라 할 만한 이 공연을 영국인들은 판토(panto)라고 부릅니다. 보통 무언극으로 알려진 판토마임(pantomime)의 줄임말이지요. 영국에서 판토는 조금 특별한 공연 장르인데, 포스터를 보면 아이들을 위한 가족극 같지만 실제로 공연을 보면 절대로 아이들만을 위한 오락거리는 아닙니다.
스토리는 다 다르지만 모든 판토는 남성 배우가 여성 역할을 맡아 과장된 대사와 슬랩스틱 코미디로 웃음을 유발합니다(사실 이 슬랩스틱(slapstick)이라는 단어 자체가 판토에서 유래했습니다). 무대 위의 인물들은 관객에게 틈틈이 말을 걸며, 대사 속에는 아이들은 알아듣지 못하고 어른들만 눈치챌 수 있는 농담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렇기에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공연 내내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해 공연장에는 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판토는 영국의 고유한 문화적 전통일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16세기 이탈리아의 '코메디아 델라르테'에 닿는데 이 코메디아 델라르테는 고정된 인물 유형과 즉흥 연기를 특징으로 하는 민중극으로, 언어보다는 몸짓과 상황 코미디가 강조되는 특색이 있었습니다.
코메디아 델라르테 스타일의 공연은 곧 유럽 각지에서 유행했고 17세기에는 영국에도 소개되었으나, 당시 영국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이탈리아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17세기 후반 왕정복고 이후, 영국 정부는 연극을 잠재적으로 위험한 매체로 인식했습니다. 연극은 군중을 한자리에 모을 수 있었고, 풍자와 정치적 암시를 담기 쉬웠으며, 사회 비판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컸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식은 18세기에 들어 더욱 제도화되었습니다. 1737년 제정된 '연극허가법(The Licensing Act)'은 모든 연극은 공연 전에 왕실 검열관의 대본 검열을 받도록 규정했고, 그 과정에서 정치적·사회적 풍자는 삭제되거나 금지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법은 ‘말’은 규제했지만 ‘몸짓’은 규제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사가 없는 공연, 혹은 대사가 최소화된 공연은 검열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무언극(pantomime)이 정치적으로 안전한 공연 형식으로 부상하게 된 것이지요.
본래 판토마임은 그리스어 판토미모스(παντόμιμος)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이는 “모든 것을 흉내 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고대 그리스에서 말없이 몸짓과 표정만으로 신화 이야기를 표현해 내는 연기자를 의미했습니다.
이 전통은 로마 시대에는 라틴어 'pantomimus'로 명칭이 바뀌어 유지되다가 중세 시대로 넘어가면서는 그 명맥이 끊겼습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부터 간간이 다시 등장했고, 1702년 존 위버가 런던의 Drury Lane Theatre에서 말 없는 무용과 연기로 이루어진 공연을 선보이며 이를 “pantomime”이라고 명명한 이후로는 무언극을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습니다(프랑스에서는 '전체'를 의미하는 'pan'이 빠지고 흉내 내다는 뜻의 마임(mime)만 남아 현재에 이릅니다).
18세기에 들어서서 판토마임은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몸짓 중심 연기, 과장된 캐릭터, 시각적 코미디와 결합하였고, 음악과 춤, 무대 장치를 더해 영국만의 독자적인 장르로 발전했습니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에 이르러 판토는 대사를 다시 받아들이지만, 그 언어는 직접적인 정치 비판 대신 암시와 유희, 과장된 표현에 머물게 됩니다. 이러한 언어 사용 방식은 이후 판토의 특징으로 자리 잡는 ‘이중적 의미’의 토대가 되었는데 뒤에서 다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빅토리아 시대에 들어서면서 판토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형태로 정착합니다. 산업화와 도시화는 대중 오락에 대한 수요를 크게 늘렸고, 극장은 가족 단위 관객을 주요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 판토는 동화와 민담을 각색한 이야기 구조를 채택하고, 선과 악이 분명한 서사와 해피엔딩이라는 안정적인 틀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판토가 크리스마스 시즌과 결합한 것도 이 무렵인데, 이는 딱히 종교적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학교 방학, 가족 중심의 연말 문화, 그리고 극장의 흥행 전략이 맞물린 결과로 보는 편이 좀 더 설득력이 있다고 봅니다.
자, 그럼 무려 20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며 현대까지 이어져온 판토만의 매력을 살펴볼까요?
판토를 구성하는 중요한 핵심 요소들 가운데 하나는 관객의 참여입니다. 판토에서 관객은 조용히 앉아 우아하게 감상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악당이 등장하면 관객은 소리를 지르고, 무대 위 인물은 그 반응을 즉각적으로 받아칩니다. 이러한 상호작용은 판토를 단순한 관람이 아닌, 함께하는 집단 놀이로 만듭니다. 이는 비슷한 시기에 성행했던 셰익스피어식 연극의 전통과도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판토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데임(Dame)입니다. 데임은 전통적으로 남성 배우가 연기하는 여성 코미디 캐릭터로, 보통 주인공의 어머니나 계모 같은 조연입니다. 판토에서 데임은 단순한 웃음 담당이 아니라, 관객과 무대를 연결하는 핵심 인물입니다. 즉흥적인 농담, 지역 사회에 대한 언급, 그리고 성인 관객을 위한 이중적 의미의 농담은 대부분 데임을 통해 전달됩니다.
데임이 남성 배우에 의해 연기되는 전통 역시 정치적·제도적 맥락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초기 영국 연극에서는 여성 배우의 활동이 제한적이었고, 과장된 희극 캐릭터는 남성 코미디언의 영역이었습니다. 또한 남성이 연기하는 여성 캐릭터는 처음부터 현실적 재현이 아닌 ‘희극적 장치’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과장과 풍자가 실제 여성에 대한 조롱으로 직결되지 않도록 하는 완충 역할을 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판토가 온 가족을 위한 극으로 유지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중적 의미의 절묘한 사용입니다. 판토의 대사에는 종종 애매한 표현이 등장하는데, 예를 들어 “I’ve never had anything like this before!”라는 문장은 문자 그대로는 새로운 경험에 대한 감탄일 뿐입니다.
어린이에게는 이 의미 외에 다른 해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인 관객은 말의 모호함과 연기자의 억양, 그리고 무대 상황을 종합해 다른 의미를 떠올리며 웃게 됩니다. 즉, 의미는 문장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관객의 경험과 해석 능력에 따라 생성됩니다.
이러한 이중적 의미는 어린아이들과 함께 즐기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앞서 언급한 판토의 역사적 조건과도 연결됩니다. 검열을 피해 ‘말하지 않는 연극’으로 출발했던 판토는, 다시 말을 회복하면서도 직접적인 의미 전달을 피하는 방식에 익숙해졌습니다. 암시와 중의성은 정치적 위험을 낮추는 동시에, 관객에게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효과적인 장치였습니다. 이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판토의 농담이 노골적인 성적 표현이 아니라 암시와 유희에 머무는 이유가 됩니다. 즉, 판토의 언어적 모호함은 단순한 웃음을 위한 장치가 아니라, 검열과 통제를 우회해 온 역사적 경험의 산물인 셈이지요.
물론 판토는 현대에 들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데임 캐릭터의 성 역할 패러디나 외모 조롱은 시대 변화에 따라 재검토되고 있으며, 일부에서는 판토의 유머가 구시대적이라는 지적도 나옵니다. 이에 대응해 많은 극장에서는 농담의 수위를 조절하고, 캐릭터를 보다 존중받는 존재로 재구성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토가 여전히 영국에서 강한 생명력을 유지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판토는 예술적 실험이나 정치적 메시지를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공동체적 경험을 제공하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아이에게는 단순하고 명확한 이야기와 시각적 즐거움을, 어른에게는 일상의 긴장을 풀어 주는 가벼운 웃음을 제공합니다. 한 공간에서 서로 다른 세대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웃을 수 있다는 점이 판토의 가장 큰 강점입니다.
마지막으로 판토는 매우 지역적인 장르이기도 합니다. 보통의 연극 작품들은 어느 지역의 어느 극장에서나 같은 대본으로 공연되며 상연 장소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판토는 공연하는 도시, 혹은 동네의 정서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작년에 제가 케임브리지에서 본 공연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2024년 12월 케임브리지의 판토는 신데렐라 이야기였습니다. 이 공연에서 신데렐라는 귀족의 딸이 아니라 케임브리지의 한 작은 컬리지 학장의 딸입니다. 왕자는 유럽 어느 나라에서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유학 온 신입생입니다.
이 공연에는 장면마다 케임브리지 주민들과 학생들만 눈치챌 수 있는 여러 장치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외부인들은 일개 학교 무도회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실 케임브리지 Trinity College May Ball은 1,000여 명이 넘는 인원이 참석하고 입장 티켓 가격만 해도 200-300파운드가 되는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무도회 중 하나입니다.
신데렐라의 언니들이 매일 시내에 나가 바리바리 들고 오는 쇼핑백들은 모두 지역의 대표적인 가게들의 것입니다. 물론 협찬이겠지요. 중간중간 정치적 메시지도 등장하는데, 현직 정치인들의 이름이 조연이나 가십 대상으로 심심치 않게 인용됩니다. 당연히 인기가 없는 정치인은 악역으로 등장합니다.
한편 이 오래된 대학 도시에는 전통적으로 대학 구성원들과 도시민들의 갈등이 존재합니다. 소위 '타운 앤 가운(Town and Gown)'의 갈등입니다. 대학은 시내 중심부의 땅을 대부분 소유하고 있고, 집값과 물가 상승의 주된 원인이 됩니다. 게다가 학기 중에는 몰려들었다가 방학 때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학생들의 존재는 지역 경제의 지속성에 영향을 줍니다.
술에 취한 펍에서는 대학생들과 지역 청년들의 충돌도 종종 발생하는데, 몇 년 전에는 살인사건까지 일어나 도시에 충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도시민 태반이 대학 덕분에 먹고 산다고 할 만큼 대학의 역할이 크므로, 대학은 마냥 미워할 수도 좋아할 수도 없는 애증의 대상입니다.
이러한 감정들은 판토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는데, 극 말미에 하버드 대학에서 입학 허가를 받은 신데렐라는 왕자와 아버지, 케임브리지 대학을 모두 뒤로하고 꿈을 찾아 도시를 떠납니다. 케임브리지는 신데렐라를 품을 만한 그릇이 못 된다는 의미겠지요. 아마도 평소에 잘난 척하는 케임브리지 학생들을 비호감으로 여겼을 관객들은 신데렐라의 결정에 모자와 장갑을 흔들며 환호를 보냅니다.
2026년 케임브리지의 판토는 '잠자는 숲 속의 공주'입니다. 올해는 또 어떤 모습으로 우리의 연말을 즐겁게 해 줄지 기대가 됩니다. 이번에는 과연 어떤 캐릭터가 데임이 될지 궁금해지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