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8년 브래드퍼드 사건
달콤한 박하사탕의 쓰디쓴 비극: 1858년 브래드퍼드 사건
자 오늘은 사탕 이야기입니다. 영국의 어느 슈퍼나 가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이 사탕의 이름은 험벅(humbug)입니다.
"바, 험벅!(Bah, humbug!)"
혹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을 원문으로 읽어보신 분이라면 이 대사를 기억하실 겁니다. 1843년 디킨스가 창조해 낸 희대의 구두쇠 스크루지 영감이 인간의 따뜻한 온정과 자선이란 위선이요 속임수라며 경멸적으로 내뱉은 단어였죠.
아니 그런데 왜 달콤한 사탕에 이런 이상한 이름이? 이 험벅 캔디는 색깔도 그렇고 뭔가 캐러멜 맛이 날 것처럼 생겼지만 무심코 입에 넣으면 깜짝 놀랄 만큼 강렬하고 시원한 페퍼민트 향이 터져 나옵니다. 이처럼 겉모습과 다른 반전의 맛이 마치 사람을 놀리는 속임수 같다고 하여 '험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네요.
험벅은 19세기 초부터 영국에서 만들어진 전통적인 박하사탕의 한 종류입니다. 보통 페퍼민트 오일로 맛을 내며, 단단하고 반투명한 질감이 특징입니다. 이 사탕이 정확히 어느 지역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주로 잉글랜드 북부, 특히 요크셔와 랭커셔 지방에서 널리 사랑받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산업 혁명 시대에 공업지대로 발전하면서 노동자들이 즐겨 먹는 저렴하고 열량 높은 간식 문화가 발달했던 지역들이지요. 고된 노동에 지친 노동자들이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기운을 내기 위해 꺼내 먹던 위안물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 사탕이 끔찍한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을까요?
1858년, 잉글랜드 북부의 공업 도시 브래드퍼드
굴뚝 연기가 하늘을 가리고, 고된 노동에 지친 사람들은
주머니 속 작은 사탕에서 달콤한 위안을 찾던 시절이었습니다.
이 도시의 한 제과업자, 조셉 닐은
더 많은 이윤을 남길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설탕은 너무 비싸단 말이야..."
당시 설탕은 사치품이었기에,
많은 제과업자들은 '대프트(daft)'라 불리는
값싼 석고 가루를 설탕에 섞어 양을 늘리곤 했습니다.
누구나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죠.
10월 30일, 닐은 약제상 찰스 호지슨의 가게에
험벅 사탕에 쓸 '대프트' 12파운드를 주문했습니다.
하지만 그날, 약제상 호지슨은 병상에 누워 있었고
그를 대신해 조수 윌리엄 고다드가 주문을 처리했습니다.
그는 이름표도 없는 통들이 가득한
어두컴컴한 다락방 창고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하얀 가루를 포대에 담았습니다.
아무런 의심 없이…
그것이 석고 가루가 아닌,
성인 두 명을 즉사시킬 수 있는 치명적인 맹독,
삼산화비소(Arsenic trioxide)라는 사실을 모른 채 말입니다.
닐의 공장에서는 이 하얀 가루를
40파운드의 사탕 반죽에 섞였습니다.
완성된 사탕은 모양도, 색깔도 어딘가 이상했지만,
닐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험벅 빌리에게 싸게 넘겨야겠다."
'험벅 빌리'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시장 노점상
윌리엄 하더커는 이 사탕을 싼값에 사들여
신나게 팔기 시작했습니다.
사탕은 순식간에 팔려나갔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브래드퍼드는 끔찍한 비명으로 가득 찼습니다
사탕을 먹은 200명 이상이 중독 증세를 보이며 쓰러졌고,
그중 21명(대부분 어린이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각 사탕에는 어른 두 명을 죽일 수 있는 양의 비소가 들어있었습니다.
"독이 든 사탕을 먹지 마시오!"
시내 곳곳에서 종을 울리는 사람들의 외침이 울려 퍼졌지만,
비극을 막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자 제과업자 닐, 약제상 호지슨, 그리고 그의 조수 고더드는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그러나 법원의 판결은 영국 사회에 더 큰 충격과 분노를 안겼습니다.
법원은 이들의 행위에 '과실'은 명백히 존재하지만, 당시에는 독극물 판매 자격이나 식품 첨가물에 대한 명확한 법률이 부재했기에 '불법'으로 처벌할 법적 근거가 부족하다며 무죄 또는 기소 취하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 판결은 갑작스러운 법의 허점이 아니라, 이미 예견된 비극의 필연적 결과였습니다. 사건 발생 6년 전인 1852년, 왕립 약사회를 중심으로 의약품과 독극물 판매를 자격을 갖춘 전문가에게만 허용하는 '약사법' 제정이 추진된 바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법안은 '자유 무역'이라는 19세기 영국 사회의 거대한 시대정신 앞에서 좌절되었습니다.
당시 의회에서는 "특정 집단에 부당한 독점을 부여한다", "상품의 자유로운 유통을 막는 '무역에 대한 부당한 제약'이다"라는 반대 논리가 쏟아졌습니다.
결국, 강력한 반대 여론에 밀려 1852년에 통과된 약사법은 '독극물 판매 행위 자체의 제한'이라는 핵심이 제외된 채, '약사(Pharmacist)'라는 명칭 사용만을 제한하는 유명무실한 법이 되고 말았습니다.
즉, 자격 없는 사람이 비소를 팔아도 스스로를 '약사'라고 칭하지만 않으면 불법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브래드퍼드 법정의 충격적인 판결은 바로 이 실패가 낳은 결과였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10년간의 끈질긴 논쟁 끝에, 1868년 마침내 영국 의회는 '약국법(1868)'을 통과시켰습니다. 이 법은 비로소 약사의 자격을 국가가 공인하고, 특정 독극물의 판매를 자격을 갖춘 전문가에게만 허용하도록 규정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프랑스와 프로이센 등 유럽 대륙 국가들은 영국보다 훨씬 앞서 중세 시대부터 약사의 자격과 약국 운영을 국가 차원에서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이 다른 주요 국가들에 비해 약학 분야의 법제화가 상당히 늦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어린이들의 희생이 현대 의약품 안전법의 기틀을 마련한 유사한 사례는 1937년 미국에서도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의 '순수 식품 및 의약품법(1906)'은 의약품 라벨의 '진실성'만을 따졌을 뿐, '안전성'이나 '효능'을 입증하도록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법의 허점 속에서 별도의 안전성 테스트 없이 부동액의 주성분인 맹독성 물질을 용매로 사용한 어린이용 시럽 '엘릭시르 설파닐아미드'로 인해 100명 이상의 어린이들이 목숨을 잃는 끔찍한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미국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이듬해인 1938년, '연방 식품, 의약품, 화장품법’’이 제정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법의 핵심은 "모든 신약은 시장 출시 전, 제조업체가 반드시 그 안전성을 입증하고 FDA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원칙의 확립이었습니다.
이 두 사건은 수많은 무고한 희생이 더 안전한 사회를 향한 고통스러운 진보를 이끌어낸 역사적 사례입니다. 물론 인류의 발전 과정에는 희생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습니다. 당장 인류가 독이 든 식물이나 동물을 구별해 내고, 삶거나 말려서 독을 제거하는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도 수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희생이 이미 역사로 기록된 지금, 우리는 전혀 다른 출발선에 서 있습니다. 독버섯의 위험을 알고도 ‘나는 예외일 것’이라는 오만으로 그것을 다시 입에 대는 행위는 앞서간 이들의 고통을 무의미한 죽음으로 전락시키는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든 진보에는 희생이 따른다며 비극을 당연시하는 태도 역시, 예방할 수 있었던 참사를 불가피한 과정으로 포장하고 시스템의 결함이나 개인의 탐욕에 면죄부를 주는 위험한 변명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도 누군가는 현재의 비극 앞에 과거의 비극들을 켜켜이 쌓아 올리며 우리를 무력한 절망으로 이끌려합니다. 그러나 역사의 비극은 현재의 비극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아니라, 다음 비극을 막기 위한 지혜로 활용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희생을 최소화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라는 이 어려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그 답을 찾기 위해 고심하는 노력이야말로, 과거의 희생자들 앞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예의이자 다음 세대를 위한 책임 있는 태도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