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섬 & 베를린 문화포럼
박물관섬
유럽은 어디를 가나 큰 박물관이 있다. 물론 제국주의의 결과물이라 비판하는 시각도 존중해야 하지만, 아무튼 인류의 유산을 만나려면 유럽의 큰 도시로 가면 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또한, 유럽은 어디를 가나 큰 미술관이 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미술에 조예가 깊지 않아도 괜히 빠져들게 만드는 역사 속 ‘거장’의 작품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진다.
영국 수도 런던에 대영 박물관과 내셔널갤러리가 있듯, 프랑스 수도 파리에 루브르 박물관과 오르셰 미술관이 있듯, 독일 수도 베를린에도 그러한 인프라가 있지 않을까? 물론이다. 베를린에서는 아예 대형 박물관과 미술관을 한곳에 모아 거대한 캠퍼스를 완성했다. 마치 서울 여의도 같은 하중도(河中島)에 자리 잡고 있어 박물관섬(Museumsinsel)이라 부른다. 요즘 표현을 빌리자면 ‘박물관 클러스터’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후딱 관람하면 족히 서너 시간은 소요될 대형 박물관‧미술관이 무려 다섯 개. 여기에 방문자 센터를 겸하여 새로 만든 갤러리까지 총 여섯 곳의 전시관이 마련된 박물관섬은 1박 2일로 작정하고 보아야 할 정도로 넓고 대단하다. 고대 이집트, 고대 로마, 고대 바빌로니아, 고대 페르가몬 왕국 등 2천 년을 상회하는 시간을 품은 유적이 있고, 수백 년의 시간 동안 인류가 만든 어마어마한 걸작이 가득하다. 관람에 지쳐 아픈 다리를 두드리며 K가 말한다. “너무 커서 내가 뭘 봤는지도 잊어버릴 지경이야.”
물론 이 엄청난 콜렉션은 제국주의가 낳은 결과물이다. 독일은 영국 등 주변국보다 한발 늦게 제국주의에 눈을 떴다. “결국, 그 힘과 힘이 충돌한 게 제1차 세계대전이고, 패전국의 비루한 현실 위에 싹튼 증오가 광기로 변질하여 터져버린 게 제2차 세계대전이거든.” 다리가 아프기는 마찬가지여서 열심히 스트레칭을 하던 J가 일러준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독일은 분단을 받아들여야 했지.”
박물관섬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페르가몬 박물관(Pergamonmuseum)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고대 페르가몬 유적이다. 페르가몬 신전 대제단을 튀르키예(터키)에서 통째로 뜯어 와 베를린에 전시한 곳. 그런데 J가 들려준, 군데군데 빈틈이 보이는 대제단의 뒷이야기는 유쾌하지 않다. “원래 베를린에 처음 공개된 페르가몬 제단은 완벽한 모습이었어.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중 폭격을 피하지 못해 이렇게 된 거라고 해.”
튀르키예에 있어야 할 유적이 제국주의의 결과로 독일로 옮겨졌다. 그리고 제국주의가 뿌린 씨앗으로 터진 두 차례의 잔혹한 전쟁의 결과 유적은 파괴되고 말았다. K가 혼잣말로 되뇐다. “순리를 거스르면 결국 아이러니한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더라고.”
J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덧붙인다. “재미있는 건, 제2차 세계대전 후 박물관섬의 유물이 수없이 약탈당했다고 해. 승전국인 소련에 의해서 말이지. 힘의 논리로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는 제국주의의 공식은 오늘날까지도 유효하다고 봐.”
K는 뉴스에서 보았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런데 튀르키예에서도 유적을 돌려달라고 요구한다며?”
“독일은 유적을 무단으로 약탈한 게 아니라 당시 오스만 제국의 허가를 받고 발굴한 거라고 주장하고 있대. 나도 진실은 모르겠어.” J가 중립 기어를 넣고 답한다.
독일은 1990년 통일을 이루었다. 이후 동서로 나뉘어 보관 중인 귀중한 유적과 유물의 재배치 속에 다시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박물관섬은 199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그리고 박물관섬의 최종 복원이 끝난 건 2009년. 다시 말하면, 아직 복원까지 10년이나 남은 곳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는 뜻이다. “분단된 문화를 다시 합치는 그 과정이 더욱 가치 있는 세계문화유산 급으로 느껴진 것은 아닐까?” K는 자기 생각이 옳은지 유네스코에 물어보고 싶어졌다.
베를린 문화포럼
박물관섬을 나와 J가 K를 데리고 간 곳은 또 다른 ‘박물관 클러스터’였다. 베를린 문화포럼(Kulturforum Berlin)이라는 이름으로 거대한 박물관과 미술관이 모여있는 곳. 르네상스 시대와 바로크 시대부터 이어지는 공예품이나 악기 등을 전시한 여러 박물관이 있고, 박물관섬에 뒤지지 않는 거장의 작품이 즐비한 대형 미술관이 있다.
더는 못 걷겠다는 듯 의자에 주저앉아 K가 말한다. “박물관섬에 다 모아두면 될 텐데, 왜 이런 곳이 한 도시에 두 개나 있는 거야?”
운영하는 사람으로서도, 관람하는 사람으로서도, 이렇게 두 개로 나뉜 클러스터는 비효율적이다. 가뜩이나 실용을 중시하는 베를린에서 과연 이게 최선이었을까?
J가 답한다. “불과 몇십 년 전에는 베를린이 두 개의 도시였잖아. 그러니까 박물관 클러스터도 둘이어야지.” 그렇다. 박물관섬은 동베를린에 속했고, 베를린 문화포럼은 서베를린에 속했다.
전쟁 중 독일인은 폭격에 대비해 값진 유물과 귀중한 유산을 도시 곳곳에 분산시켜 포화로부터 보호하였다. 페르가몬 대제단처럼 도저히 따로 옮겨두지 못할 거대한 유적은 어쩔 수 없지만, 대부분의 박물관 콜렉션과 미술 작품은 포화를 피했다. 전쟁이 끝난 뒤 이들은 다시 박물관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그때 베를린은 둘로 쪼개진 뒤였다. 서쪽에 보관한 유물은 서베를린에서 따로 박물관을 만들고, 동쪽에 보관한 유물은 동베를린에서 따로 박물관을 만들었다. 그리고 베를린이 하나로 합쳐진 지금, 이 도시에는 두 개의 박물관 클러스터가 존재한다. 마치 1+1 행사처럼.
“물론 관람의 효율을 위해 통일 후 소장품의 재배치는 이루어졌어. 가령, 박물관섬의 고대 이집트 유적은 원래 베를린 문화포럼에 있던 것들이야.” J가 부연한다.
박물관섬의 신 박물관(Neues Museum)에서 보았던 인상 깊은 네페르티티의 흉상(Buste der Nofretete)도 실은 서베를린에 있던 것이 다시 원래의 자리인 동베를린 지역으로 되돌아간 셈이다. 박물관섬과 베를린 문화포럼은 직선거리로 약 3km 정도 떨어져 있다. 이게 뭐라고, 역사적인 인류의 유산이 집을 떠나 수km를 배회하도록 만들었을까.
조금씩 마음이 무거워지는 K는 베를린 문화포럼의 한 미술관에 눈길이 간다. 흔히 여행자가 많이 찾는 회화관(Gemaldegalerie)이 아니라 신 국립미술관(Neue Nationalgalerie)이다. K는 박물관섬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거기에 구 국립미술관(Alte Nationalgelarie)이 있었다. “그래도 신구는 용케 잘 나눴네.”
구 국립미술관에는 중세부터 근대까지의 미술이 주로 모여있고, 신 국립미술관에는 현대미술이 주로 모여있다. 신구 모두 인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거장의 작품들이다. 당연히 그 수준은 매우 빼어나다.
J는 신 국립미술관의 건축가 이름을 알려준다.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 건축과 디자인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레전드’로 인정하며 동경하는 바우하우스(Bauhaus)의 계승자로서 나치를 피해 망명을 떠나 미국에서 바우하우스 정신을 꽃피운 바로 그 미스 반 데어 로에. “그의 유작이 바로 여기야. 독일에서 시작한 바우하우스 정신이 미국에서 완성되었는데, 자신의 뿌리를 잊지 못하고 마지막을 여기로 택한 거지.”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처럼,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마지막을 장식한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색이 진하게 남은 신 국립미술관은, 전쟁의 비극, 그리고 서베를린과 서방 세계의 연계를 적확하게 보여주는 건축물로 꼽힌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원래 바우하우스가 태동한 도시 바이마르(Weimar)나 바우하우스 2기 도시 데사우(Dessau)는 모두 동독에 속했기 때문에 미스 반 데어 로에를 받아들일 수 없는 곳이었다. 이 세계적인 거장이 독일에서 바우하우스의 마지막을 장식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베를린 외에 다른 선택지를 찾지 못한 이유는 분단 때문이었던 셈이다.
분단이라는 게 이러하다. 어릴 적 책상에 선을 그어 여기로 넘어오지 말라고 짝꿍과 티격태격하던 식으로 두 패가 옥신각신하던 게 아니다. 가족도 나뉘고, 정부도 나뉘고, 문화도 나뉘었다. J는 다시 부연한다. “보통 분단이라고 하면 눈에 보이는 영토의 구분만 이야기하지. 그런데 나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도 나뉘고 민족의 문화와 역사까지 강제로 찢어버리는 게 분단의 가장 큰 비극이라고 봐.”
<리뷰를 보고 싶어서>
국민학교(초등학교가 아님)에서 숱하게 반공 포스터와 통일 포스터를 그렸고, <간첩 잡는 똘이장군>을 보며 자란 세대입니다. 독일 통일을 TV 뉴스로 보았던 어렴풋한 기억이 있습니다. 18년 동안 독일을 여행하면서 자연스럽게 수많은 역사의 기록과 기억을 접하는 가운데 통일이라는 주제를 한 발 떨어져 제3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내가 본 리뷰입니다. 특별히 베를린에서 본 통일의 리뷰를 여행 에세이의 형식을 빌려 전합니다.
(매주 화,목,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