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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호현 May 19. 2017

에이리언 : 커버넌트

신들의 후퇴를 경멸한 피조물의 무모한 100보 전진

영화 에일리언 시리즈의 세계관의 내용과 프로메테우스, 커버넌트에 대해 스포일러, 추측이 있습니다.

많은 질문을 던지는 영화기 때문에 다른 영화에 비해 꽤 많은 해설 영상과 글이 올라옵니다. 대게 '영화적 장치로 어떤 신화나 성경의 부분을 차용했기 때문에 결론도 그러할 것으로 볼 수 있다.'의 구성입니다. 실제로 리들리 스콧은 꾸준히 종교와 신화, 역사에 대해 영화나 인터뷰로 의견을 밝히고 있습니다.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면서 조금 다른 방식으로 영화에 답해 보고자 합니다.


명확한 답을 알려주는 것보다 재미있는 것이 있다. 결론에 도달하는데 골치가 아프더라도, 흥미로운 어떤 질문을 던지는 것들이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리들리 스콧의 프로메테우스와 에이리언 커버넌트는 매우 간질거리는 질문거리를 던져주는 영화다. '인간의 존재는 우연한가? 그렇지 않다면 신이 있는가?, 그렇다면 신은 우리를 왜 만들었는가?, 신은 우리를 벌하려던 것인가?, 왜 우리를 벌하려고 하는가?, 인공지능은 무엇인가?, 인간도 신이 될 수 있는가? 신은 무엇인가... 그리고 에이리언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 밖에도 인간이 늘 궁금해하던 많은 질문들을 에이리언 시리즈는 짓궂게도 호러물의 탈을 쓰고 묻는다.


물질인 인간은 죽는다. 물질세계에서 영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제한적으로 유전자나 문화적 전통같이 이어질 수도 있는 흔적을 남기는 것으로 생물학적 영생이 가능할 수 있다. 인간을 제외한 생물은 철저히 그들의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 살아간다. 반면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로 본능을 극복할 수 있는 자의식을 가진다. 굉장한 우연으로든 창조로 인한 필연으로든 간에 자의식을 얻은 인간은 끊임없이 삶과 죽음, 영생에 대해 생각해왔고 미약하고도 오만한 결론을 얻는다. '인간은 다른종 보다 태생이 특별한 종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을 가능케 한 원인(창조자)가 있을 것이며, 사후 세계와 같은 물질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정신적인 영생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대부분의 사람은 다른 생물종의 존재에 대해 아무 생각도 없이 잔인하게 소비하면서, 인간이 이 지구에 있다는 것에 지나치게 감동한다.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특별한 점을 가지긴 한다. 그것은 자신의 생존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심지어 적이거나 적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을 돕는 이타적 성향이다. 이타적 행동을 하는 생물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은 그 도움을 통해 차후에 후손이나 자신이 보답받을 수 있는 정도의 수준에 머무른다. 인간은 이러한 반유전자적이라고도 볼 수 있는 광범위한 이타적 행동과 그 반대인 유전자적 본능(정복, 번식, 호기심)인 욕망이 싸우면서 문명사회의 근간을 이루었다. 그렇게 다른 동물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번성한다. 그리고 영화상으로 인간은 인조인간과 복제인간을 만들 수 있게 됐고, 최대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인공지능 로봇 데이빗을 창조한다. 웨일랜드 회장은 스스로를 신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신이라고 자부한 그가 물질을 못 이기고 죽음에 문턱에서까지 영생을 갈구하는 건 어쩌면 쓸쓸한 생물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에이리언 커버넌트 초반부부터 데이빗은 자신이 인간과 다르다는 것을 명확히 깨닫는다. 인간보다 탁월하며 죽지 않는다는 것.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성을 잃지 않는 데이빗의 침착함에 종종 섬뜩함을 느끼는 것은 근본적으로 유전자적 욕망을 가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인간과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 데이빗은 제 3자로서 인간의 욕망을 지켜본다. 인간들은 끊임없이 욕망한다. 그리고 성급하다는 것을 영화는 계속해서 보여준다. 프로메테우스에서 몇몇 과학자들은 그 멀고 먼 행성까지 와서 돈 벌러 왔다면서 비협조적으로 행동하다 이상한 지렁이 괴물에 죽지를 않나, 사람 다 죽어가는데 혼자서 살겠다고 영생을 갈구하지 않나. 심지어 이번 에이리언 커버넌트에서는 더한다. 잘 가다가 더 잠들기 싫다는 공포와 불확실한 정보에 의존하여 경로를 이탈하고, 정체모를 바이러스에 감염된 인간 몇 명을 구하자고 2000명이 탄 우주선을 위험에 처하게 한다. 데이빗이라면 안 그랬을거다.


과격하게 말했지만 나름의 '인간적 사정'이 있었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압권은 섹스신이다. 동료가 절반 이상 죽고 위기에 처했는데 그 와중에 샤워하면서 섹스를 하다 죽는다. 데이빗은 오래전부터 인간은 아둔하고 욕망에 가득 찬 멸종 위기종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유전자의 최종 목표는 생물학적 영생이다. 이 반복되는 명제에서서 인간은 자신의 영생을 갈구하려 타인을 훼손하면서까지 처절하게 발버둥 친다. 반면 그 생물학적 영생을 벗어난 데이빗은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고민했을 것이다. 그런 데이빗은 어느순간 '완벽한 생명체의 창조'를 꿈꾸기 시작한다. 유전자를 완벽하게 복제하면서도 더 나은 존재로 매우 빠르게 변이 하는 궁그그이 생명체를 만들고, 스스로가 완벽한 영생의 창조신이 되기를. 그 전에 열등한 생명체가 가득한 행성을 방주에서 쏟아지는 검은 폭우와 대홍수로 파괴하고, 새로 시작하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리들리 스콧의 인터뷰에 의하면, 프로메테우스의 첫 장면은 지구가 아닐 수도 있다고 했으므로 엔지니어는 행성 단위로 어떤 실험을 했을 거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엔지니어가 인간의 지속적인 과오를 만회하기 위해 내린 마지막 특사(예수 ; 재밌게도 이번 커버넌트에서 나온 엔지니어들은 예수와 비슷한 복장인 고대 그리스 히마티온 비스무리를 입고 있었다.)를 죽였기에 인간을 말살하려 한다고 했다. 예수가 표방하는 것은 반유전자적 특성(적에 대한 용서, 아가페)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엔지니어가 인간을 만든 이유는 유전자를 벗어 날 수 일는 이타적 존재에 대한 실험이며 그 가능성을 실험하기 위해 창조와 파괴를 반복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에 대한 성과를 사라져가는 자신들의 종족에게 적용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눈에 띄었던 점은 그들의 실험에 쓰인 기생충(검은 액체)이 숙주에게 매우 빠른 유전자 변이를 일으킨다는 점이다. 엔지니어 문명의 시간 속에서 인류의 진화와 문명을 실험해야 했을거라고 생각하면 얼추 이해가 간다. 어쨌든 데이빗의 입장에선 엔지니어의 문명이 탁월하긴 하지만 유한한 존재이며, 그들의 창조물인 인간 역시 실패의 길을 걷게 한 열등한 신일 뿐이다.



스스로를 신이라고 생각한 데이빗은 엘리자베스를 연민하고 애정했다. 쇼가 보여준 헌신과 사랑, 연대 의식, 소명, 믿음 같은 인간의 밝은 단면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해석하고 확신한다. 에이리언은 철저히 유전자의 완벽한 영생의 추구임과 동시에 데이빗이 엘리자베스를 사랑했다는 증거라고. 모두가 죽어버린 우주선속에서 엔지니어의 행성으로 향하던 데이빗은 위에서 언급한 모든 판단을 끝냈을 것이다. 엔지니어의 연구자료, 검은 액체의 진실, 그리고 대파괴와 재구축까지. 엘리자베스 쇼는 그의 종교적 믿음과 신에 대한 끌어 오르는 믿음을 껴안고 잠들었다. 데이빗이 답을 찾게 도와줄거라는 믿음을 안고서. 데이빗은 연구와 연구를 통해 후손을 남길 수 없던 불임인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생물학적 영생을 선사했다. 완벽한 유전자의 여왕(엘리자베스)으로서 끊임없이 강한 유전자를 복제할수 있는 알을 생산하게끔. 데이빗은 에이리언을 보고 잠시 환희에 찼을 거다. 에이리언 : 커버넌트(약속). 나는 데이빗이 대니얼스에게 기다렸다는 듯이 '우주선에 몇 명이나 타고 있냐'고 물을 때 무척이나 섬뜩했다. 나는 이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판단을 철저히 창조자와 피조물, 부모가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의 과격하고 잘못된 표현이라고 보았다.


니벨룽의 반지 :
반지는 세계지배를 상징한 것으로, 이 황금 반지를 둘러싼 장기간의 투쟁이 묘사된 다음 마지막에는 신(神)들도, 소인(小人)들도, 영웅들도 모두 멸망하고 구(舊) 세계는 몰락한다. 그러나 마지막 막에서는 그 후의 사랑에 의하여 만들어진 인간의 새로운 세계가 태어나는 이상을 그리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바그너의 작품에서만 볼 수 있는 여성의 사랑에 의한 구제 사상(救濟思想)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니벨룽의 반지 [Der Ring des Nibelungen] (두산백과)


글이 길어져서 마무리 지을까 한다. 다시 첫 질문의 시작이다. 우리는 왜 태어났고 죽는가? 우연이든 필연이든 지구에서 태어났으며, 죽음은 거스를 수 없다.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되며 스러진다. 완벽한 데이빗도 한 가지 놓쳤다. 우주의 시간에서 데이빗 또한 유한하다. 몸을 이루는 무기물이 분해되는 억겁의 시간만큼 고독하게 파괴하며 실패할 것이다. 불완전함을 인정한 이타적 유전자로서 넓은 의미의 진정한 사랑을 생각해본다. 비록 유전자의 욕망을 전부 통제할 순 없을지라도 치열하게 사랑하며 만족하는 삶. 행복은 '지금 이 순간 나에게'에 있다.



근래 들어 읽은 책이 유시민의 '어떻게 살 것인가', 스켑틱 Vol.8 '지능의 출현은 우연인가'입니다. 그래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문장들이 유사합니다. 또한 지나치게 추론하고 단정 지은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월터와 데이빗의 관계, 엔지니어는 어째서 발달한 과학문명에 비해 생활양식은 인간의 고대 같았나(의복, 식습관-밀 농작, 거대한 얼굴 석상 등..), 왜 에이리언의 유전자는 동물의 유전자에만 반응하는가, 3편의 이야기, 에이리언 시리즈와의 연결성 등등 아직도 많은 질문들이 있습니다. 천천히 재밌게 생각해볼 만합니다 ㅎ.ㅎ


서투르고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양한 의견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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