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보며 상상하는 쾌감
세계를 지도로 인식하는 순간, 우리의 시선은 배가 되고 비행기가 된다. 어릴 적 으레 상상하듯 시꺼먼 바다 위의 해저 등고선을 타고 내려가 미지의 괴물과 만난다.
위 예시가 환원주의라곤 할 수 없다. 다만 무엇인가와 거리를 두고 달리 보는 경험이 우리의 생각을 어떻게 확장하는가에 대한 다른 예로 볼 수 있겠다. 복잡한 세계를 지도라는 작게 보기를 통해 창의적인 상상이 펼쳐지고, 합리적인 예상이 가능하다. 가보지 않아도 남미가 더울 것을 예측하고, 높은 산은 추울 것을 아는 것처럼 말이다.
책을 읽다 문득 나에게 강력한 감정 반응을 일으킨 작품을 떠올렸다. 나는 유독 절과 불교에 신비로움을 느껴왔는데, 이러한 관심이 대학교 때 불상을 배우면서 더 극대화됐다. 여러 가지 불상 중에서 가장 크게 영감을 받은 것이 반가사유상이었는데, 상징적, 관습적으로 축약된 조각 요소들과 알 수 없는 미소는 나의 상상력을 엄청나게 자극했다. 나의 고민과 인간의 고민, 그리고 미륵의 고민까지. 반가사유상의 추상 표현엔 이렇듯 감상자의 몫이 굉장히 많이 남아있었다.
추상미술은 전적으로 해석의 영역이다. 작품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고, 작가마다의 세계관이 달라 이해할 수 있는 어떠한 단서를 못 찾을 때도 많다. 하지만 이러한 점이 감상자가 적극적으로 ‘추론과 상상’을 집어넣을 수 있는 틈이 된다. 추상적인 것을 볼 때, 환원된 미술 요소들을 볼 때 뇌가 어떻게 그것을 해석하는지 설명하는 이 책은 그래서 어떤 의미로는 해방구가 될 수도 있겠다.
다시 나의 경험으로 돌아가, 위대한 예술가들이 어떻게 나에게 영감을 주었는지 이제야 실마리가 잡힌다. 그들이 표현하고자 했던 세계, 그들이 겪었던 세계, 그들을 찬양하는 비평가, 예술가답게 표현해내는 지점들이 나를 매료시킨다. 다자이 오사무, 이토 준지, 칸딘스키, 존 케이지, 바스키아, 모딜리아니. 이 사람들의 세계관과 나의 세계관이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느끼면서, 그들이 열어 놓은 틈으로 내가 적극적으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지각 과정을 이해하고, 내가 누굴 왜 좋아하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이 나의 심상을 이해하는 큰 도움이 됐다.
책에서 감각 피질에서 피부 표면이 어떤 비율로 표상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체성 감각 호문쿨루스라는 이미지가 나온다. 가장 민감한 감각 부위가 크게 그려진 인간의 모습인데, 보통 손가락, 눈, 입이 크게 그려진다. 이런 이미지는 사람과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하는데, 일찍부터 현악기를 연주한 연주자 그룹은 왼쪽 새끼손가락의 피질 표상이 더 크다고 한다. 이런 정보를 접하고,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집을 봤을 때 느껴지는 전율은 너무 대단했다. 쿠사마 야요이는 모든 감각을 점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야요이 본인은 몸에 있는 각종 구멍, 모공, 땀구멍, 감각 점등의 인식이 남들보다 훨씬 과장되게 느꼈던 것은 아닐까? 그녀의 작품을 볼 때 순간, 온몸의 땀구멍이 순식간에 확장되는 서늘함을 느끼면서, 동시에 수많은 구멍의 확장으로 순식간에 생기는 인력을 느꼈다. 그 구멍 속으로 들어가면, 내가 있고 극도의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 나는 나의 점을 인식하고, 그 점안에 다시 내가 있게 되는 이상한 경험이다. 감각 피질의 정서적 표상이라는 어려운 말로 설명이 가능할 것 같다.
개인적인 경험과는 별개로 같은 환원적 요소나 추상 미술을 보더라도 공통적으로 회상하는 것이 장해져 있는 것은 아마 시대, 시간, 문화적 경험이 우리에게 깔려있기 때문이겠다. 세대 차이란 결국 각자의 시대 경험의 다름에서 나오는 현상의 해석 및 관점의 차이가 아닐까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세대 기억은 너무 빠르게 무너지고 의도적으로 빠르게 강화된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선 더 많은 인내와 시간이 필요하다. 세대 간의 경험 외에도 미술 작품이나 자연을 보고 숭고함과 위대함을 느끼는 것은 우리가 진화하면서 영향을 받았던 자연의 조합의 발현이 아닐까 싶다.
시각이 뇌에 미치는 영향만큼이나 후각과 청각 등 이미지가 없는 것들이 어떻세 뇌과학 관점으로 설명이 될지도 궁금하다. 이미지라는 상이 없어서인지, 음악, 향수, 질감 등의 감 갓이 우리의 상상(하향 처리)을 더 격하게 한다.
급진적 환원주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위 말하는 '수준과 교양'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문득 미술작품을 온통 교과서에서 접하는 우리가 추상미술에 수준과 교양을 언급하며 거부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다. 정답을 알려주는 교과서에서 정답을 맞히지 않으면 안 되는 미술을 배우는 우리로서는 '무엇을 얻어내야 한다'는 강박감이 추상미술을 기피하게 만드는 지점인 듯하다. 더군다나 낮은 해상도로 빳빳하게 인쇄된 작품이라니. 실제 미술관에서 작품의 질감과 스케일을 보며 어떤 점이 느껴지는지를 교육하면 더 좋으련만. 화가의 의도를 알아채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고, 감상자의 몫을 오롯이 즐겼으면 좋겠다.
끝마치며 환원주의와는 별개로 끊임없이 상상하고 달리 보는 노력은 미식에도 적용된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안다는 말, 매우 좋아하는 말이다. 고기의 부위를 끊임없이 구분하고, 요리법을 달리하며, 다양한 음식과 곁들이는 재미는 맛 그 자체에도 있지만, 그것을 향유하는 분위기와 창의력에도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커피와 와인, 향수의 '노트'는 스스로의 경험에 비추어 상상하며 곱씹을수록 떠오르는 것이지, 그냥 먹기엔 어쩌면 떫거나 쓴맛밖에 아닐 수도 있다. 커피에서 진짜 딸기맛이 날리도 없고, 느타리버섯에서 재스민 향기가 날리는 없을 테니까. 누군가는 지나친 상상력이라 할 수도 있게다만, 그 영역이 충분히 개발될 수 있음은 분명하다. 그래서 품질보다도 각자의 취향이 더 중요하다.
많은 질문을 던지는 작품은 언제나 황홀하다. 오래간만에 엄청난 책을 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