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슈피커만 - 타이포그래피 에세이 서평
해외여행 중 무심코 만나는 글자들은 언제나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알 수 없는 언어로 쓰인 귀여운 글자를 카메라로 담으며 이국임을 실감한다. 글자가 담긴 사진엔 순식간에 그 나라와 그곳의 분위기가 함께 녹아난다. 공항인지, 골목인지, 레스토랑인지 시장인지 유추할 수 있다. 글자는 그 자체로도 많은걸 담고 있지만, 이렇듯 어딘가에 쓰일 때 큰 힘을 내뿜는다. 글자에는 의미와 인상이 함께 담겨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도저히 의미를 캐낼 수 없는 낯선 글자에서 그 인상을 더 생생하게 느낀다. 처음 만난 외국인의 억양과 손짓, 표정, 인상착의 등의 모습으로부터 그 사람의 말에 의미를 파악해 내는 모습과 정말 똑같다.
글자에는 의미와 인상이 함께 담겨 있다. 필연적으로 한글에서 의미를 먼저 캐치하는 우리는, 글자가 가지고 있는 '인상'엔 그다지 큰 관심을 주지 않았다. 다른 의미 전달수단에 비해 정확하고 분명하게 의미가 전달되기 때문에 그 의미만 파악하고 나머지 것들은 의식되지 않는다. 좀 아깝지 않은가? 영양소를 섭취해야 한다고 해서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비타민 등을 캡슐로만 먹고살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글자가 지닌 '인상'을 캐치한다면, 더 다채롭고 생생한 의미를 향유할 수 있다. 글자의 풍미, 질감, 목소리.... 같은 의미의 연애편지라도 프린트한 것보다 직접 쓴 편지가 더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글자의 인상을 느끼고 파악하는 재미를 느끼면 좋은 점이 몇 가지 더 있다. 바로 글자가 언제 어디에서 간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텍스트로 넘쳐나는 이 세상에서 글자의 인상을 느낀다는 것은 새로운 기호품으로 손색없다. 꽤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글자는 세상의 거의 모든 것에 반응한다. 그래서 글자의 인상을 파악하는데 괜찮은 비유와 예시가 많다. 다만 친절하게 묶어서 알려주지 않을 뿐이다. 그런 면에서 타이포그래피 에세이는 글자의 맛을 설명하기 위해 친절하고 괜찮은 비유를 많이 들어준다. 폰트 패밀리 설명에선 정말 감탄했다.
같은 의미의 단어라도 어떤 사람이 어떤 억양으로 어떻게 어디서 말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천지차이로 달라진다. 웅변과 발표 스킬을 배우면 청중을 압도할 수 있는 것처럼, 글자를 잘 쓸 수 있다면, 의미 전달 외에 여러 가지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눈이 덜 아픈 글자, 위급 시 재빠르게 알아채야 하는 글자, 시선을 사로잡는 선동 포스터처럼 말이다. 타이포그래피 에세이에서도 한 지면에서 이 목소리 저 목소리로 다양한 목적과 의도로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
인상을 구분하는 것은 인식과 관련이 있다. 선입견, 편견, 문화적 배경들이 인상을 해석하는데 많은 영향을 준다. 우리가 영어권 글자를 보고 그들과는 다른 인상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인류가 공통적으로 느끼는 부분 외에도 특정 문화의 배경을 알아야만 그렇게 느껴지는 게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른 인종의 얼굴들을 미세하게 구별하기 힘든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글자는 태생적으로 인간의 인식체계가 깔려있다. 그리고 그 글자는 물리적 세계와 반응하면서 구체화된다.
새로운 컨셉의 글자가 이 세상에 탄생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뛰는 일인지 실감 난다. 의미를 표현할 수 있는 다채로운 인상이 하나 더 생겨난다. 교향곡을 연주할 새로운 악기가 생긴 것이다. 이 세상에 여러 가능성을 가진 새로운 아이가 태어나는 것에 비유할 수도 있겠다. 이제 출퇴근길, 산책길,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글자들이 각자 목소리로 그 공간에 존재감을 내뿜는 것을 느끼는 쾌감을 많은 사람들이 공유했으면 좋겠다. 취향이 아니면 별 수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