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자키 준이치로 산문집 hh서평
그늘에 대하여, 원제목은 음예예찬
들어가기에 앞서 1930~45년까지 일본인에 의해 쓰인 에세이라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매우 비이성적, 비인권적으로 쓰인 부분이 있다. 이런 점을 일일이 비판하고자 서평을 적는 게 아니라, 저자의 문체와 생각의 표현력에서 느낀 점에 대해 서평을 적는다. 왜 잘못되었는지 서평을 쓰려면 훨씬 어렵겠더라고..
생물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주어진 환경의 한계 안에서 살아야 한다. 주어진 것이 적을수록 더 처절하게 환경에 순응한다. 그 처절한 미, 그늘에 잠길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그 속에서 치열하게 찾아낸 미가 있다. 역설적이게도 한계 속에서 인간이기에 가질 수 있는 창의성, 적극성과 모순점은 어떤 미추를 넘은 만족을 찾아낸다. 왜 그것이 우리를 편안하게 하는가? 왜 나는 지금 괴리를 느끼는가? 왜? 왜? 누군가는 그 생각을 집요하게, 아름답게 정리해야만 했다. 수천 년을 그렇게 살아온 이유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정리한다는 것은 그 나라의 미와 그 나라 사람들의 미 인식을 정립한다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 기록은 우리가 언제든 우리를 되돌아볼 수 있게 하는 담담한 자기 위로를 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기록은 한계를 전복시키는 힘과 한계에 순응하며 살던 힘이 맞부딪히면서 생기는 괴리에서 탄생한다. 뭐든지 지난 다음에야 깨닫는다. 한계를 전복시킬 수 있는 욕망이 전 세계적으로 확장되면서, 자연의 속박과 제한을 없애는 것이 더 생산적, 나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것은 서구적인 것에 대한 찬미로 번지고 사대주의로도 나타난다. 예전 것이 무조건적으로 더 좋다는 수구적인 태도는 아니다. 분명 그 예전 것에 담겨있는 우리가 수천 년간 자연과 관계하며 살았던 흔적들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뒷간의 담담한 향에 대해서, 닳아서 반들반들해진 문고리에 대해서, 정말 칠흑 같은 밤에 빛나는 달빛, 별빛, 금색, 저 멀리 들리는 맹수의 울음소리의 공포, 이런 구전동화들.
문명의 이기라는 말을 초등학교 때 들었던 기억이 난다. 뜻이 어감과 달랐던 게 신기해서 유독 생생하다. 문명의 이기는 우리를 더 생산적이게 한다. 그 생산적이라는 것이 지속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수요를 뛰어넘는 욕망을 만들어 내야 한다.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물품을 1개를 만드는 생산을 넘어 10개를 생산해서 10명을 필요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욕망은 자원의 축적과 비대칭을 가속화하고 터전을 파괴한다. 뭐 그렇다고 내가 성인군자는 아니다. 이토록 푹신한 의자에 앉아 밤 11시에 손가락 까딱까딱으로 유식한 척 떠벌리는 것도 다 문명의 이기 덕분이다. 편안..
다시 책 얘기로 돌아가서 일본의 미에 대해서 깊고 아름답게 담아낸 몇몇 가지들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그건 내가 경험해봤기 때문에 더 그렇다. 정말 가로등 빛 하나 없는 시골의 밤은 정말 밤 그 자체다. 휘황찬란한 달빛, 달빛에 기대어 같은 표현은 지금 절대 그대로 느낄 수 없다. 그리고 진짜 어둠에서 빛나는 금빛... 과도기에 살던 천재적인 문인이 한국적인 것에 대해서 기록을 해놨더라면 더 좋았으련만 별 수 없지. 어렵고 별로였던 부분이 있는 책이지만, 지독하게 와 닿는 몇몇 아름다운 표현 덕분에 일본의 미가 아직까지 유지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