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가 추천해 준 팟캐스트 <을들의 당나귀 귀>를듣다가 제가 이렇게 말하자, P는 자기가 책을 사 줄 테니 읽고 나서 제 생각을 리뷰로 써보라고 합니다. 제가 이 책을 읽고 어떻게 생각할지, 어떤 느낌을 가지게 될지, 무슨 말을 하게 될지 궁금하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가족 호칭 개선 투쟁기'라는 부제가 붙은 배윤민정 작가의 책 <나는 당신들의 아랫사람이 아닙니다>를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P는 저의 아내입니다. 저는 글을 쓸 때 '아내'라는 말보다 그냥 객관화된 'P'라는 기호가 더 좋습니다. '아내'라는 단어 속에 숨어있는 '안과 밖'의 구별과 그 속에 내포된 차별의 논리에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듭니다.
배윤민정, <나는 당신들의 아랫사람이 아닙니다>
배윤민정 작가의 이 책은요약하자면, 우리나라 가족 호칭에 묻어있는 남녀차별적인 요소와 불편함을개선하고 싶었던 작가의 경험담을 1여 년 동안 기록한 그녀의 이야기(story), 즉 '역사(herstory)'입니다. 처음 이 책을 집어 들었을 때 저는 우리나라 가족 호칭 문제의 불평등성이라는 문제가 요즘 핫한 주제이고, 저자가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에 속하는 편이라 이 책은 가족 호칭 문제를 둘러싼 소규모 분쟁을 성공적으로 해결한 사례를 다룬 책일 거라 생각했더랬습니다. 구세대에 속하는 시가 쪽 부모님들을 저자가 어떻게 설득시켜 호칭 문제를 해결했는지를 보여주는 책이 아닐까 예상하면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마치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긴장감과 의외의 충격으로 단숨에 끝까지 읽었습니다. 퇴근 후에 저녁 먹고 읽기 시작해서 3시간 동안 정말 단 한순간도 지루함을 느낄 수 없었고, 어떤 대목에서는 혼자서 엄청 킥킥 대기도, 어떤 대목에서는 가슴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한숨을 쉬어가면서 읽었습니다.
이 책은 호칭 문제를 둘러싼 가족들 간의 작은 에피소드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이 책은 우리나라 가족 호칭제도 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남녀차별적 구조와 가부장제의 서열관계가 어떻게 언중들의 언어 사용을 통해 내면화되고 구조화되며, 가족들 간의 수평적이고 평등한 인간관계를 가로막는 지를 일상의 사례를 통해 철저하게 해부한 사유의 궤적이었습니다.
결혼을 통해 여성은 가족질서에 포섭된다
사실, 남자인 저로서는 여성들이 가족관계에서 겪는 호칭 문제로 인한 불편함과 모멸감을 직접 몸으로 체험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나름의 사고와 판단력에 근거하여 '도련님'이나 '아가씨', '새아가', '아주버님', '시댁', '처가', '올케'(오라비의 계집이라는 뜻) 등등의 호칭과 용어가 갖는 차별성과 불합리성을 어렴풋이 자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머릿속으로만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할 뿐 저 자신이 당사자가 되어 본 적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호칭들이 '이상하다'고는 생각하지만 '불편하거나 모멸적'이라고 지각하지는 못합니다.
"호칭 대신 이름에 ~님 자를 붙여서 불러보면 어떨까요?"
모든 것은 저자의 이 한마디에서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그 사랑의 경이로움에 기뻐하고, 그 인연이 맺어준 가족들과 함께 사랑을 나누며 살고 싶어 했던 저자가 결혼을 통해 한 가족의 구성원이 되면서 처음 맞닥뜨린 호칭 문제는 불편했고, 차별적이었고, 수직적이었고, 그리하여 문제적이고 모욕적이었습니다. 우리나라 가족 호칭 체계에서 여자는 시가 쪽 부모님을 어머님과 아버님으로, 배우자의 남자 형제는 아주버님과 도련님(서방님)으로, 배우자의 여자 형제는 형님과 아가씨로 불러야 하는 반면에, 아무도 새로 가족 구성원이 된 며느리에게는 ~님 자를 붙이지 않습니다. 제수씨나, 새아가 아니면 00야라고 이름을 부르면 됩니다. 남자의 가족은 '시댁'이고 여자의 가족은 '처가'라는 명칭부터가 차별적입니다.
왜 피해자가 더 인내하고 희생하기를 강요받는 것일까?
그래서 이런 호칭이 불편하고 차별적이라 느낀 저자는 가족모임에서 이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어떤 정해진 답이 준비된 것도 아니었고, 누구를 모욕하거나, 어떤 권위에 도전하는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으며, 의견을 나누다 보면 무언가 지금과는 다른, 조금은 기분 나쁘지 않은 해결책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습니다.
가족에도 위아래가 있다
그러나 저자가 차별적인 호칭 문제를 제기하려 했을 때 반발은 예상과는 달리 시부모님으로부터가 아니라 오히려 같은 세대와 같은 나이의 남편의 형(재현)과 그 배우자(수진)로부터 나왔습니다. 반발의 강도도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어서 배우자의 형 재현과, 굳이 나이를 따지자면 오히려 저자보다 다소 어린 그 배우자 수진은 아예 이런 문제제기조차 '위계질서에 대한 도전'이자 '모욕'으로 인식하고 대화를 거부합니다. "말 섞으면 길어진다"며. 수진은 저자가 손위인 자신을 '형님'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아 시댁 식구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자신을 공격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저자는 예상치 못한 경로에서, 예상치 못한 커다란 장벽에 부딪힙니다. 성별도 자신과 같은 여성이고 비슷한 연배인 수진도 자신과 같은 불편함을 겪고 있을 것이고 자신이 이런 문제를 제기하면 쉽게 공감하면서 자신의 우군이 되어줄 줄 알았건만 실제는 영 딴판으로 전개됩니다. 왜 수진은 저자의 문제제기를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하고 오히려 모욕감을 느꼈을까요? 남녀차별적인 호칭으로 가장 큰 불편을 겪고 있는 사람은 가족 서열의 가장 최하위에 위치한 저자인데도 말입니다.
저자의 문제제기가 뜻밖의 벽에 부딪혀 그 파장이 일파만파로 번져가고 두현과 재현 가족의 평화는 깨지고 말 위기에 처하자 배우자의 형 두현과 시부모님들은 저자에게 '가족의 평화'를 위해서 수진에게 사과할 것을 요구하면 문제를 일단락 짓고 싶어 합니다. 문제 해결에 소극적이던 가부장제의 최상위 서열에 있는 시아버지가 나서서 마침내 교통정리를 하겠다며. 이것은 수직적 가족관계와 차별적 호칭의 최대 피해자인 저자에게 오히려 '너만 가만있으면 다 괜찮다"며 계속해서 고통을 감내할 것과 이번 사태에 대한 사과와 문제제기를 그만둘 것을 강요하는 2차 가해와 다름없습니다. 그러면서 재현이 덧붙이는 말은 "가족관계에도 위아래가 있는데 어떻게 아랫사람이 호칭을 바꾸자는 그런 말을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재현의 그 말속에는 이 호칭 문제의 핵심이 가족관계의 서열 문제 즉 차별성의 문제임이 명백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결국, 수진이나 재현이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가족 호칭의 변화가 아니라 그 변화를 통해 무너질 수 있는 서열과 위계의 질서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질서는 결코 수평적이고 평등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진과 재현이 "어떻게 아랫사람이 그런 의견을 제시할 수 있어?"라는 물음은 결국 우리의 가족관계는 결코 수평적이고 평등할 수 없음을 선언한 것에 다름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사랑과 화목, 배려와 애정의 공간이어야 할 가족관계가 평등하고 수평적이면 안 되는 걸까요? 가족관계가 왜 꼭 서열과 위계의 질서로 짜여야 하는 것일까요? 그런 가족관계가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것일까요?
왜 그렇게 예민하냐고?
결국, 저자가 제기한 호칭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못하고 두현네 가족과 수진네 가족의 대립으로까지 번지고, 저자와 두현뿐만 아니라 시부모, 재현 부부의 가족관계마저 파탄의 위기로 몰아넣게 되자 저자는 이 문제를 1인 시위를 통해 사회적으로 공론화시키게 됩니다. 그러자 저자의 평등한 가족 호칭 사용 제안에 대해 SNS 상에서는 수많은 반발 댓글이 달립니다. 그 대부분은 이런 것입니다. "그렇게 할 일이 없냐? 그깐 호칭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이라거나, "호칭은 그냥 호칭일 뿐이다. 일 년 중에 얼마나 만난다고 그래?" 혹은 "왜 그렇게 예민하냐? 가정의 평화를 위해 쫌만 참으면 될 것을... 참 예민하네, 예민해." 등등입니다.
가족 속의 나는 나만의 나일수는 없을까?
그러나, 저자의 문제제기를 재현 부부가 처음에 자신들의 서열과 지위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하며 문제제기 조차 용인하지 않았듯이, 이 호칭 문제는 절대 그리 간단하고 사소한 문제가 아님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마치 빙산의 일각처럼 이 호칭 문제의 근저에는 우리의 가족관계를 촘촘히 얽어매고 있는 가족 간 서열의 구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가부장 즉, 남자인 가장의 지위를 최정점으로 하고 그 아래에는 남자의 나이에 따라 서열화된 가족의 위계질서가 자리 잡고 결혼제도를 통해 여자를 이 가족의 수직적 위계질서에 재편시키는 일의 시작이 호칭 문제였던 것입니다. 이 위계질서에서는 여성의 지위는 철저히 가족관계에서 남편의 서열에 따라 결정됩니다. 저자의 문제제기는 바로 호칭 속에 반영된 이 위계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된 것이고, 겉으로는 어떤 구실과 핑계를 둘러대든, 이 불평등하고 차별적이며 수직적인 위계구조를 보편적이며 자연적인 질서로 존속시키고 싶은 사람들은 이 도전을 결코 용인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호칭은 결코 별거 아닌 게 아니라 그 안에 모든 문제적 구조와 관계를 응축시킨 폭탄 덩어리였던 것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성별로는 같은 여성이고 비슷한 연배의 수진이 가족 호칭 개선에 가장 격렬하게 반대했던 사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같은 구조 속에서 다양한 선택과 결정을 내리는 인간의 행동방식은 단면적으로, 단순하게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성차별적 서열과 위계 구조에 대해 모든 여성이 동일한 반발 보이는 것도, 모든 남성이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 위계와 서열의 질서로부터 아무도 자유롭지 못하며, 그 구조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는 각자의 개별적인 경험과 사회문화적인 의식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지 성별과 나이, 세대별로 구획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책의 뒷부분에서 저자가 어린 시절 동생에게 가했던 폭력의 기억을 소개하는 매우 인상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당시 중학생밖에 안된 저자 자신도 어린 동생에게 '감히 어린것이?'라는 분노를 표출하며, '교육을 시킨다'는 명분으로 자신이 행사한 그 폭력을 합리화하는 에피소드는 심지어 저자 자신도 이 폭력적인 위계와 서열의 구조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가족관계의 호칭이 감추고 있는 그 차별적인 구조에 매몰되는 순간 어느 누구도 위계와 서열의 불합리성과 폭력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이 작은 사례는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호칭은 단지 호칭일 뿐이 아니다
호칭은 별거였습니다. 그러므로 호칭이 뭐 별거냐고 그냥 부르던 대로 부르면 되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결코 자신들의 그 호칭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호칭 속에 모든 문제가 녹아 있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이 호칭 문제가 당사자에게는 예민하게 지각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또 예민한 성격이 왜 문제인가요? 내장이 예민해야 자신이 뭘 잘못 먹었는지도 금방 알 수 있으며, 예민한 사고와 감각을 갖추고 있어야 고루한 인습과 남루한 관행을 벗어날 수 있는 거 아닐까요?
이 책의 놀라운 장점
무엇보다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놀라워했던 것은 심각한 주제를 매우 깊이 있게 다루면서도 독자의 마음을 짓누르지 않는 경쾌함이었습니다. 무겁고 보편적인 주제를 다루다 보면 쉽게 당위와 교훈의 중요성에 몰입돼, 반복과 훈시로 독자를 꾸짖으려는 유혹에 빠지기 쉬운데 이 책은 일상에서 일어나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가감 없이 전달하면서 독자로 하여금 깊게 생각해 보게 만듭니다. 그 과정이 결코 지겹고 힘든 과정이 아니라 쉴 새 없이 웃음을 터뜨리고 긍정하게 되는 즐거운 사유의 과정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독서의 즐거움과 깊이를 동시에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저자가 이 호칭 문제를 바라보는 진지함과 애정 어린 시선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싸움을 하려 해도 힘이 들고 애정이 필요하다
어느 누구도 가족들과의 불화와 가족관계의 파탄을 원하지 않을 것이고 그 다툼과 언쟁의 과정에서 서로의 감정에 난 상처는 그 깊이 결코 얕지 않을 것입니다. 독자들이 저자의 가족들에 대해 섣불리 갖게 될 선입견을 우려했기에 이 책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저자와 가족들이 그간의 과정에서 겪었던 감정의 파고와 상처, 좌절과 불안의 양과 폭은 아마도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그 많은 현실적인 불편함과 상처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이 호칭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하고 해결하고 싶어 했던 이유는 결혼을 통해 맺어진 남자의 가족들과 함께 사랑하고 기뻐하며 서로의 친밀한 감정을 공유하는 기쁨을 갖고 싶어서였던 것입니다. 싸움을 하려면 그 감정의 불편함을 감수하겠다는 상대방에 대한 애정과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며느리라는 호칭으로 규정되고 서열화된 위계에 놓인 채, 인내와 고통을 강요당하며 1년에 몇 차례 어색한 호칭과 눈인사를 나누는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가족관계가 아니라 말입니다.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새아가, 누군가의 며느리, 누군가의 제수씨가 아닌 온전한 하나의 인격체로서 말입니다.
구조는 어떻게 인간에게 작동하는가
이 책에서 호칭 문제에 대해 예상외의 격렬한 반대를 보인 수진의 입장도 주목할 만한 것이었지만, 저에게는 아무래도 같은 입장에 처한 저자의 배우자 두현의 입장에 시선과 생각이 많이 끌렸습니다. 상당히 저와 비슷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듯 보이는 두현은 저자와 자신의 가족의 중간에 위치하면서 양자 간의 의견을 조율하고 의사를 전달하는 중개자의 역할을 힘겹게 맡고 있습니다.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다소 아쉽게 두현은 처음 자신은 이 문제의 당사자가 아니며 중간에서 양쪽의 감정을 위로하고 오해를 풀어주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그 과정에서 두현 본인도 많은 상처를 입지만, 결국 저자와의 많은 싸움과 대화 속에서 얻는 깨달음은 이 문제가 결코 저자와 본인 가족들, 형과 배우자와의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가부장 체계 속에 서열화된 위계질서 즉, 구조의 문제임을 자각합니다. 그리하여 이 문제가 서열화된 가족 관계 속에서는 호칭으로 불편함을 겪는 배우자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며, 온전한 인격체로 존중받고 사랑받으며 살고 싶은 배우자의 소망은 이 구조하에서는 실현될 수 없다면, 이는 이런 부조리한 구조와 자신이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의 문제, 즉 누구의 문제도 아닌 바로 자신의 문제임을 깨닫습니다.
가족 호칭은 구조이자 질서이다.
배우자와 시월드 간의 갈등을 잘 중재하는 흔히 말하는 "남편이 하기 나름"이라는 수사는 사실 실재에서는 공허하기 짝이 없습니다. 저자가 남편 두현에게 가장 많이 서운해했던 지점도 바로 여기였습니다. 남편도 힘들게 중재자로서의 자기 역할에 충실하게 양쪽을 오가며 의견을 전달하고, 양쪽을 이해시키려 하는 과정에서 많이 상처 받고 힘들었겠지만, 이 모든 분란과 사단의 촉발자, 근본적인 갈등의 원인 제공자라는 모든 비난을 감내하면 싸우고 있는 저자에게는 남편도 역시 여전히 이 위계적 가족질서의 혜택을 누리는 수혜자에 불과했습니다. 이 구조의 문제를 자각하지 못하는 한에서는 말입니다. 그래서 남편 두현이 저자에게 "그래도 우리 집은 다른 집보다는 낫잖아? 제사도 없고, 명절 때 일도 안 시키고. 집안일, 청소도 내가 다하며 나도 나름 열심히 노력했어." 라며 마치 자신의 가족들이 저자에게 무슨 시혜라도 베푼 양 말하며 호소할 때 가부장제 속에 위치한 '머리로 페미니즘을 배운 남자'의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저자에게는 이 모든 의무가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생겨난 가족관계 속에서 당연히 짊어져야 하는 의무로 강요되고 있음에도 말입니다.
가족 호칭이 뭐 별거냐고?
결국, 가족 호칭은 별거입니다. 가족 호칭이 결국 문제입니다. 호칭이란 단순한 언중들의 자의적 약속인 기표에 불과한 것이 아나라 존재와 존재의 관계를 규정하는 구조이자 질서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어떤 호칭으로 부르느냐에 따라 자신의 역할과 지위를 구분 짓고 전체 질서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그럼으로써 이 호칭이 통용되는 구조를 재생산하고 이를 우리 의식 속에 내면화합니다. 자신의 상전을 마님과 도련님, 아가씨라고 부르던 종놈이 이 호칭을 거부하고 상전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는 순간, 이 질서는 깨어지는 것입니다. 현대사회의 호칭이 어떻게 전근대 사회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그런 종속적인 인간관계와 위계질서를 반영할 수 있냐고요?
배윤민정, <나는 당신들의 아랫사람이 아닙니다>
가족 호칭에 대한 문제제기가 그토록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가장 수평적이고 평등해야 할 가족관계에서조차 수평적 인간관계, 평등한 인간관계가 구현되기 어렵다는 점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 차별적인 가족질서는 여성이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새로운 가족 구성원으로 등장할 때, 바로 그 여성의 몸과 지위를 가족 위계질서 내에서 남편의 서열에 따라 자리매김할 때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남편 쪽 식구들은 모두 ~님 자를 붙이도록 강요하는 호칭과, 친정을 낮추고 시가를 높이는 존대법과, 그 각각의 지위에 맞는 가족들에 대한 호칭을 강요함으로써 말입니다. 호칭은 그래서 아주 견고하고 질긴 질서이자 구조입니다. P가 사준 배윤민정 작가의 <나는 당신들의 아랫사람이 아닙니다>를 읽고 든 많은 생각들 중 몇 가지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