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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로츠뎀 Nov 04. 2019

다른 사람이 되어야 전할 수 있는 목소리

김도영 감독, 정유미 공유 주연 <82년생 김지영>을 보다


82년생 아내와 함께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보았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걱정을 조금 했다. 원작 소설의 무게를 제대로 감당할 수 있을지, 주제의 심각성에 몰입돼 허우적거리다 완성도가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우려,  감정의 과잉 분비로 점철된 영화는 아닐지 등등. 하지만 영화가 시작되고 등장인물들이 뚜렷이 다가오기 시작하면서 분명해졌다. 나의 이런 우려는 정말 기우에 지나지 않았음을.




영화는 원작이 불러일으킨 소모적 논쟁을 의식해서인지, 아니면 감독의 의도가 원래 그랬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정말 세심하게 관객들을 배려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감동을 만들어내기 위해 어색하게 집어넣은 장면도 찾아볼 수 없었고, 불필요한 의무감에서 훈계와 충고를 하려는 시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오늘 한국사회를 살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가족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 기르며 행복을 꿈꾸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과정에서 성취감과 존재감을 느끼고 싶어 했던 평범한 82년생 한국 여성의 삶을 담담하게 조명하고 있었다.  


영화의 원작도 그렇지만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영화가 개봉되기도 전에 벌어졌던 인터넷 상에서의 논쟁과는 달리 여성인권 운동가나 여성 페미니스트의  삶과 투쟁을 다룬 영화가 아니다. 82년생의 한국 여성들 중에 가장 흔한 이름을 가진 주인공 지영(정유미 역)을 통해 지금은 30대 중반인 평범한 한국 여성들의 삶이 결혼과 출산, 육아와 가사노동의 부담에 짓눌리면서 어떻게 무너져 내리는 지를 보여준다. 그 부담과 압박 속에서 우리 시대의 수많은 '김지영'들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의 병을 얻고 있으며,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장벽과 편견에 부딪혀야 하며, 그 와중에 생겨나는 남편과 시부모, 가족들 간의 불화에 대한 죄책감에 어떻게 시달려야 하는지를 영화는 과장 없이 그려낸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원작 소설이나 영화를 사실은 접하지 않은 일부 남성들이 뒤틀린 심보로 막무가내 쏟아내는 비난의 대상이 결코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얼마간의 지적능력과 제대로 된 인식구조를 갖춘 사람들에게는 남성과 여성의 대립구도 속에서 '우리 여성의 아픔, 우리의 희생과 차별만을 알아달라'라고 소리 높이는 여성주의 서사로 읽히지 않기 때문이다. 80년대에 태어나 2000년대에 대학을 다니고 직장생활을 시작한 30대 중반의 한국 여성들이 보편적으로 겪는 출산과 육아의 과중한 부담, 그로 인한 경력의 단절과 가사노동의 전담으로 인한 존재감 상실과 우울감은 같은 상황의 여성들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우리의 문제'이다.


영화 속에서 지영은 빙의 상태 즉,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만 비로소 자신의 처지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사전적 의미로 '다른 것에 몸이나 마음을 기대는 것'을 말하는 '빙의'라는 장치는 이중적 의미에서 작품의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효과적이며 탁월한 선택이다. 먼저 지영은 빙의 상태에서만 자신을 힘들게 하는 문제를 말할 수 있고, 자기 목소리가 아닌 자신의 어머니나 할머니, 선배 언니의 목소리를 통해서만 그 문제가 자신을 얼마나 숨 막히게 하는지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주인공 지영의 몸과 마음이 건강하지 못한 상태에 놓여있음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그 질병의 징후 및 원인에 대해 정확히 자각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목소리가 호소하는 것은 거창한 여성해방과 여성의 권리에 대한 선언이 아니다. 82년 찬란한 봄에 기적처럼 태어났을 지영이, 사랑하는 한 사람을 만나 함께 아이를 낳아 기르며 당연히 느껴야 할 행복을 꿈꿨을 뿐인데, 그 평범하고 소박한 행복을 꿈꾸는 일이 왜 이리 힘든지, 왜 이리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느낌이 드는 일"인지 모르겠다는 고백일 뿐이다.


어린 시절엔 하고싶은 것이 많은 똑똑하고 자립심 강한 아이였고, 커리어 워먼을 꿈꾸며 당당하게 직장 생활의 첫발을 내딛었던 사회초년생이었으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어 행복한 일상을 꿈꿨던 우리 시대의 수많은 <82년생 김지영>들이 가정과 사회의 거의 모든 일상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하는 이유에 대해 명확히 인식하지 못한 채 "가끔은 행복한 생각이 들기도 하고, 가끔은 어딘가 갇혀있는 느낌이 들어요."라고 조심스레 이야기한다. 심지어는 이런 불안과 우울이 "사실은 다 제 잘못이에요."라고 자책하기도 하면서.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자기를 희생하면서 가족과 아이의 화목과 행복을 위해 다 잘 버티고, 견뎌내고, 기꺼이 감당해 온 것처럼 보이기에.


하지만 가끔은 다른 사람이 된 지영이 자신 세대 이전의 다른 여성 즉, 어머니와 할머니의 목소리를 빌려 자신의 입으로 전하는 것은 그들조차도 자신들에게만 강요된 희생에 결코 동의한 적이 없으며, 그들도 그 시대의 사회와 가족제도가 그들에게 요구했던 '여자'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었고, 독립적인 주체로서 인정받고 대우받고 싶은 가장 기본적이며 보편적인 욕구를 지닌 존재였음을 알리는 것이다.


지영이 자기의 본연의 목소리를 '다른 사람'으로 빙의해서야 전할 수 있다는 것은 할머니-어머니-지영으로 이어지는 연대의 고리를 나타내면서 동시에 지영 스스로도 자신을 병들게 하는 이 문제를 직면하고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자신을 극복해야 함을 암시한다. 남의 입을 빌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신의 입으로, 자기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우리 사회의 여성들의 문제제기에 대해 가해지는 비난과 혐오는 왜 이리 저열한지.....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야 그 고백을 힘겹게 쏟아내는 지영은 때론 육아와 가사노동의 가치와 무게를 이해하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한 채 '맘충'이라는 경멸과 '휴식'이라는 몰이해를 들어내는 사람들에게 지영은 질문을 던진다. "나에 대해 얼마나 잘 아냐?"라고 "얼마나 잘 알기게 그렇게 쉽게 이야기하냐?"라고. 지영의 이런 물음은 여성 차별적 혐오와 몰이해를 드러내는 사람들만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지영을 잘 이해하고 배려하는 듯한 남편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아내의 '빙의'를 가장 먼저 목격했고, 가장 가까이서 안타깝게 지켜보는 남편 대현은 하지만 아내가 아픈 이유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아내를 아끼고 사랑하고 배려하는 사랑스러운 남편이지만 출산과 육아, 가사노동의 본질과 그 억압성에 대해서는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일까 남편 대현에게 출산은 부모님의 잔소리를 듣기 싫어 내리는 선택에 불과하며, 가사노동과 육아는 자신의 일이 아닌 아내의 일을 잘 '내가 도와주면' 되는 일이며, 단 몇 시간이라도 육아와 가사노동에서 벗어나고 싶은 아내에게 '당신이 하고 싶지도 않은 일'을 하지 말라며 지영의 빵집 아르바이트를  반대한다. 지영의 직장생활을 위해서 자신이 육아휴직을 하고 아이를 돌보겠다며 '나도 좀 쉬고 싶었다'라고 말하는 대현의 모습은 우리 시대 자상하고 이해심 많은 남편의 평균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영화는 여성이 아니어서 여성만이 느끼고 알 수 있는 부조리와 부당함, 불편함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대현의 모습과 인식 수준을 담담하게 그릴뿐 그를 비난하거나 매도하려는 의도는 없다. 마찬가지로, 딸을 사랑하지만 자기 시대의 인식의 한계에 갇혀 여성으로서 딸이 겪는 참담한 일들의 책임을 가해자가 아닌 딸에게 돌리는 지영의 아버지 모습도 지극히 자연스럽다. 딸의 취향과 식성을 아들의 그것과 분리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아버지들은 <82년생 김지영>들에겐 너무나 익숙한 존재가 아니던가.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빛나는 균형은 이런 부분에서 두드러지고 그 균형과 절제의 효과는 자연스러운 공감과 자각으로 이어진다. 시어머니와 올케, 아버지와 남동생, 남편을 여성성의 잠재적 적군으로 몰아붙이지 않고 자상하고 사랑하는 가족이지만 인식과 시대의 한계를 지닌 채 살아가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보편적 인물로 그려내는 균형감각이 영화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그렇게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우리가 다 안다고 생각했던 이야기 속에서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했던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있다. 누군가의 어머니와 아버지, 누군가의 딸과 아들, 누군가의 아내와 남편으로  함께 살아가는 그 누구의 감정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는 듯, 그 어떤 이도 불편하게, 어색하지 만들지 않겠다는 단단한 선함과 주의 깊은 배려로.  영화가 끝난 뒤에도 내게 오래 지속되는 울림과 여운은 이 영화의 이토록 선하고 섬세한 배려에서 기인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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