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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로츠뎀 Mar 27. 2019

임신은 축복, 생리는 죄악?

김보람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피의 연대기>

결혼하고 1년 정도 지났을 때쯤 아내와 대판 싸운 적이 있다. 싸움의 발단과 원인은 '생리대'였다. 아내가 생리를 시작했다며 생리대를 사다 달라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좀 곤혹스러웠다. 첫째, 마트나 편의점에서 생리대를 파는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무언가 생리대는 의약품 같은 것이어서 본인이 사용하기에 적합한 것이 따로 있는 줄로 알았다. 그래서 마치 슈퍼에 가서 두부 한 모 사 오라는 듯 무심히 던지는 아내의 말이 좀 의아했다. 둘째, 심리적 거부감이 있었다. 생리대? 생리? 그걸 남자인 내가? 편의점에 가서 생리대를 계산대에 올려놓고 계산을 해야 하는 내 모습이 상상됐다. 왠지 난감할 것 같았다. 생리대 사는 남자? 왠지 창피할 것 같았다. 그래서 원망스러웠다. 미리 생리대를 넉넉하게 사놓지 않은 아내가. 그래서 뭉그적거리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나서다 "진작 좀 사놓지"라고 했다가 아내의 심기를 건드렸고, "관둬, 내가 피 흘리며 갔다 올 테니."하고 쏘아 부치면서 아내가 직접 생리대를 사러 나갔다. 그렇게 해서 하루 반나절의 '콜드 워'가 발발했다.

생리 패드

그리고 며칠 뒤 김보람 감독의 다큐 영화 <피의 연대기>를 아내와 함께 봤다. "생리대도 안 사다 주면서 이런 건 왜 봐"라는 아내의 핀잔과 함께. 영화는 처음부터 충격적이었다. 나름 성적 감수성도 높고 남녀 간 성차별 문제에 좀 깨인 편이라 자부하던 내가 부끄러웠다. 내 자부심은 구체적 실상에 근거하지 않은 허상이었다. 난 여성과 여성의 몸과 여성의 생리에 대해 너무 무지했다. ‘여성의 몸과 ‘생리’에 관한 범시대적, 범세계적 탐구 다큐'라는 부제가 붙은 <피의 연대기>는 김보람 감독이 자신의 네덜란드 친구에게 생리대 파우치를 선물하면서 시작한다. 생리대 파우치를 선물 받고 "자신은 초경 때부터 탐폰을 사용해서 이런 파우치가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라고 말하는 네덜란드 친구의 말에 감독은 생리를 둘러싼 문화와 인식이 시대와 국가에 따라 상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본격적인 생리의 문화사, 피의 연대기를 탐구한다. 


"모든 여성들은 평생 10리터 이상의 피를 흘린다."


감독은 <피의 연대기>를 통해서 여성이 존재한 이래로-그러니까 결국 인류가 존재한 이래로-인류의 절반인 여성이 필연적으로 치러야 하는 생리의 역사가 어떻게 쓰여 왔고 어떻게 인식되어 왔는지를 밀도 있게 보여준다. 생리를 하지 않기에 생리에 별 관심이 없는 남성들은 잘 모르는 생리혈의 구성, 생리량 등 생리현상에 대한 기초지식에서부터 생리천, 생리대, 탐폰, 생리컵 등 생리를 처리하기 위한 생리용품의 역사와 사용법, 생리용품에 대한 공공지원을 둘러싼 논쟁을 소개하면서 감독이 던지는 질문은 '우리는 왜 여성의 몸과 생리에 대해 모순적 태도를 갖게 되었나?'가 아닌지 생각해 본다.

감독 보람

임신과 출산에 대해서는 '축복과 신비'로 포장하면서 그것을 가능케하는 전제 조건인 생리와 그것의 처리 문제에 대해서는 왜 공개적으로 언급하고 논의하는 것을 금기시하게 되었을까? 인류의 절반이 살아가면서 최소 400회 이상을 경험하고, 10리터 이상을 흘려야 하는 이 필연적 생리현상을 왜 인류의 역사는 더럽고 불결하고, 감춰야 하고 입에 담지 말아야 할 현상, 심지어 사악한 것으로 범죄시 하기조차 했던 것일까? 이런 생리와 생리를 둘러싼 여성의 몸에 대한 터부화는 생리와 여성의 몸, 여성성에 대한 태도와 인식을 왜곡시킨다.

다양한 생리대

남성 위주의 역사는 임신과 출산을 위한 순환적 과정이며 자연적 현상인 여성의 생리를 여성에게 내려진 '신의 응징'이나 더럽고 불결한 것으로 취급하고 기록함으로써 생리현상에 대한 거부감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생리적 현상과 이와 관련된 몸의 변화에 대한 언급은 금기시되고, 생리는 '당연히 참고 견뎌야 하는 것'이나 '더러우니 빨리 처리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질 뿐 어떻게 하면 불편하지 않게 생리를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생각과 고민은 어려워진다. 


여성의 몸에 대해 지극히 무지한 남성적 시선으로 구성된 생리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태도는 생리를 처리하는 방식에도 당연히 많은 영향을 미친다. 서구에서는 탐폰이나 생리컵이 많이 사용되는 데 반해 우리나라에서는 일회용 생리대를 주로 사용해서 생리를 처리하는 데에는 이런 여성의 생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즉, 우리에게 여성의 생리는 '빨리 처리해 버려야 하는 더럽고 불결한 것'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인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생리혈 자체는 순수하고 깨끗한 피일뿐인데 이를 처리해야 하는 생리대에 첨가된 화학약품과 결합해서 특유의 냄새가 난다고 한다. 또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생리를 처리하기 위한 방식으로 탐폰이나 생리컵을 사용할 수 없도록 하는 데에는 여성의 질과 처녀성에 대한 지극히 남성 우월적인 선입견이 작동한다. 여성의 질 안에 남성의 성기 이외의 것이 들어오는 것에 대한 지극히 남성적인 거부감! 탐폰이나 생리컵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야기될 수 있는 '상상된 처녀막의 훼손'에 대한 우려! 

현 단계에서 가장 이상적인 생리용품 생리컵 

결국 생리에 대한 왜곡된 인식과 거부감은 생리를 살아있는 여성이 스스로 여성의 몸이 작동하는 과정과 신체적 변화를 알아가고 경험하고 긍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약한다. 여성은 스스로 자신의 몸과 친해질 수 없고 자기 몸으로부터 소외된다. 영화에서 현재 상황에서 여성의 생리현상을 가장 이상적으로 처리하는 생리용품으로 추천하는 생리컵의 사용은 이런 소외를 극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여성의 질의 모양과 특성이 다양하듯 생리컵의 모양과 신축성도 각기 다르며, 1회용으로 쓰고 버리는 생리대와 달리 생리컵은 세척과정을 통해 반복 사용이 가능하고, 생리컵을 여성이 스스로 자신의 몸에 직접 착탈 하는 과정을 통해 여성은 자신의 몸을 느끼며 자신의 몸과 친해지고 자신의 몸에 대한 이해를 넓혀 갈 수 있다는 점에서 생리컵은 여성의 생리를 처리하는 새로운 방식에 그치지 않고 여성의 몸을 대하는 새로운 태도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 다큐멘터리 영화가 무엇보다 좋았던 점은 바로 여성의 생리와 몸에 대한 세심한 탐구를 통해 여성의 생리현상을 대하는, 그리하여 여성의 몸과 여성성 자체를 대하는 올바른 자세를 제시한 데에 있었다. 여성이지만 자신의 생리와 몸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거부감을 가졌던 많은 여성들과 그 여성들과 함께 살아가는 남성들이 함께 보고 이야기하면 좋을 영화임에 틀림없다. 생리대로 인해 벌어진 우리의 '냉전'은 하루 반나절 만에 나의 처절한 자기반성과 사죄를 아내가 '일부' 수용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전쟁은 끝났고 나는 새로 태어난 것 같았다.


영화 포스터


오락성: 

영상미: 

작품성:  

완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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