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권 연령 18세 인하로 달라져야 할 것들 _21대 총선을 기록하다 3
올해 4월 15일 실시되는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달라지는 것들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언론을 통해 많이 이야기된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못지않게 중요한 변화가 선거권 연령이 18세로 낮아진다는 점입니다. 우리나라의 선거권 연령은 그동안 1948년 만 21세, 1960년 만 20세, 2005년 만 19세로 꾸준히 하향 조정되어 왔지만 OECD 국가 중에 선거권 연령이 가장 높았습니다.
마침내 선거권 연령 18세로 인하
선거권 연령을 만 18세로 더 낮추자는 의견은 선거철이면 주로 진보진영 쪽에서 제기되어 왔는데 이번 선거법 개정 관련 패스트 트랙 법안에 통과되면서 드디어 우리나라도 선거권 연령이 18세로 낮아지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이번 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약 50만 명의 18세 인구가 투표할 권리를 얻게 되었고, 교육부 자료에 따르면 그중 약 14만 명 정도가 아직 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 유권자'라고 합니다.
18세 선거권 확대에 대한 찬반 대립
그동안 주로 진보진영은 OECD 국가 중에서 우리나라만 선거권 연령이 19세 이상인 점, 민법상 성인 연령은 19세이지만 18세에도 부모의 동의하에 혼인이 가능하고, 18세부터 성인으로서의 각종 납세, 근로, 병역의무가 부여되고, 18세 이상이면 운전면허 취득도 가능하고, 공무원 시험도 응시 가능한데 선거권만 부여하지 않은 것은 부당하다는 점에서 선거권 연령 18세 인하를 적극 주장해 왔습니다. 또한 젊은 세대가 상대적으로 진보 정치세력을 더 지지하고 보수정당보다는 진보정당에 표를 던질 것이라는 기대 하에서 선거권 연령 18세 도입에 적극 찬성했던 것입니다.
이와 달리 보수진영에서는 선거권 연령 인하에 소극적이거나 반대 의견이 우세했고, 우리나라 학제상 18세 이상 선거권이 도입되면 14만 명에 이르는 고3 학생들이 새로 선거권을 갖게 되고 이로 인해 교실에서의 선거운동도 가능하게 될 것이며, 학생들은 일부 교사들의 정치적 편향과 이념 주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기고, 선거 때만 되면 학교가 정치화되고 선거판이 되어 학생의 본분인 학업에 집중하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에서 선거권 연령 인하를 반대해 왔습니다. 일부 교원단체와 학부모 단체가 선거연령 인하에 반대하는 주요 이유도 이런 점인 것 같습니다.
민주시민 교육의 확대, 활성화 필요성 대두
18세 선거권 도입에 따른 부작용을 해소하기 위해 각급 학교에서 정치교육 혹은 시민교육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이를 담당할 주체를 누구로 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분분합니다. 제가 근무하는 선거관리위원회에서도 18세 선거권 도입과 학생들의 참정권 확대에 따른 민주시민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이에 대한 기관차원의 대비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독립적인 민주시민교육 담당기관으로서 공정하고 중립적인 유권자 교육과 시민교육을 담당해 온 중앙선관위 산하 <선거연수원>도 이를 위해 다양한 기관과 협력하여 독일이나 프랑스 등 서구 선진국의 사례를 벤치마킹하여 민주시민교육 교재를 개발하고 민주시민교육 강사를 육성하고 있습니다. 18세 선거권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어 학생들의 정치참여가 더욱 활성화되면 선관위와 각급 학교, 시민단체의 협업과 역할분담이 더욱 증대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정치적 입장과 당파적 주장에 휘둘리지 않는 중립적이고 보편적인 시민교육의 방법과 내용에 대한 시민사회적 합의를 이룰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만 시민교육에 대한 사회적 수요는 분명 폭증할 것입니다.
민주시민교육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선거연령 18세 인하에 반대하는 주장의 근저에는 고3으로 대표되는 18세 학생들의 인격적 성숙을 인정하지 않는 불신이 자리합니다. 고등학교 학생들은 아직 인격적으로 미성숙하고, 스스로 사고하고 스스로 결정하는 독립적인 주체로 인정되지 않는 것이지요. 그러하기에 진보 교육감과 전교조 교원들이 도사리고(?)는 있는 학교에서 고3 학생들에게 선거권이 부여되면 교사들의 일방적인 주장이 학생들에게 주입되어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학생들이 동원되고 희생될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하는 것입니다.
이런 우려는 18세 선거권 연령 인하에는 찬성하지만 학생들이 정치에 동원되고 희생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교실에서는 '중립적이고 공정한 민주시민교육'을 도입해야 하고 "자기만의 사고를 개발할 수 있는 교육제도 개편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전문가들의 조언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바탕에는 언제나 정치는 음험하고 위험한 음모의 세계이고, 학생들은 우매한 계몽의 대상이라는 단선적 판단이 있습니다. 계몽의 밝은 빛으로 학생들의 의식을 순화해야 한다는 조급함과 고귀한 사명감이 그러한 걱정 앞에 놓여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많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계의 여러 다른 나라 학생들보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을 더 미개하거나 미성숙하다고 간주할 합리적 근거는 찾을 수 없으며, 선거권 연령이 18세로 인하되더라도 교실에 남아 있는 학생 유권자들은 그 일부에 불과합니다. 40만에 이르는 18세 유권자들의 대다수는 이미 사회 각 분야에서 자신의 역할을 성실히, 묵묵히 해내고 있으며 그 어떤 성인에 못지않게 자율적이고 성숙한 사고와 행동양식을 보여줍니다.
학생들은 민주주의를 체험하며 시민이 된다
또한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는 참여를 통해 학습되고 성숙됩니다. 선거권 연령제한을 통해 그 참여의 기회를 애초부터 박탈하고,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시킨 상태에서 성숙하고 자율적인 정치적 행동을 요구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입니다. 단순히 계몽과 교육을 통해 개인의 정치적 의사를 조율하고 변경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파시즘적 전체주의 국가에서나 가능한 '국민의식 혁명'을 희망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학생들이 교실에서 교사들의 주입식 교육에 의해 편향적 사고를 학습할 것이라고 우려하는 것과 학생들에게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질과 태도를 가르치는 교과목을 중등교육 커리큘럼 개편을 통해 도입하기만 하면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 믿는 단순한 기대는 동전의 양면과 다를 바 없습니다. 문제는 학생들의 자발성을 존중하고 자율적인 참여를 보장해 주는 정치 참여의 기회 제공이지 훈육과 감시가 아닐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는 민주주의는 학습될 수 없습니다.
학생은 계몽의 대상이 아니다
교실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민주시민 교육을 강화함으로써 학생들을 민주시민으로 계몽할 수 있다고 믿기보다는 그들이 교실을 벗어난 시간에라도, 그리고 선거라는 특정 국면에서라도 시민사회의 역동적인 정치과정에 직접 참여하고, 민주주의 사회의 토대인 자발적인 정치적 관심과 다양성 존중의 문화를 몸에 익히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물론 이런 경험은 학생들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구성원 대부분에게도 부족한 게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선거연령 18세 인하로 인해 부각되고 있는 민주시민교육의 필요성은 학생들만을 대상으로 제한될 것이 아니라 일반 시민 모두들 포함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우리 대부분은 학교에서 뿐만 아니라 대부분 직장이나 사회에서도 여전히 민주적 의사결정에의 참여와 소통의 기회를, 그리하여 구체적인 민주주의의 체험을 제대로 못하고 살고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