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예술과 신화에 대해 말하는 것
오르페우스 신화가 의미하는 것
그리스 신화의 비극적 주인공 오르페우스(Orpheus)는 아버지 아폴론에게서는 탁월한 리라 연주 재능을, 어머니 칼리오페에게서는 천상의 목소리를 물려받았다. 오르페우스가 리라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면 인간들은 물론이거니와 동식물들까지도 음악에 취해 세상의 모든 고통과 슬픔을 잊어버리곤 했다. 즉, 오르페우스의 음악은 시간을 정지시킨다. 숲의 요정 에우리디케(Eurydike)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게 된 오르페우스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사랑을 잃고 비극에 휘말린다. 에우리디케의 미모에 매료된 양치기 아리스타이오스(Aristaios)의 욕망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달아나다가 풀밭에 숨어 있던 독사에 발을 물려 아내 에우리디케가 즉사하고 만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를 허망하게 잃은 슬픔을 견딜 수 없었던 오르페우스는 위험을 무릅쓰고 저승 세계로 가 자신의 음악으로 여러 신들을 감동시켜 아내를 다시 데려오려고 시도한다. 애절한 오르페우스의 사랑과 예술적 재능에 감명받은 저승의 신 하데스와 그의 아내 페르세포네는 그의 청을 들어주기로 한다. 그런데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아내 에우리디케가 저승을 완전히 벗어나기 전까지 오르페우스가 절대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에우리디케를 저승세계에서 구출한 뒤 오르페우스는 어두운 저승길을 묵묵히 앞장서 걷기 시작했지만, 저승 세계를 벗어나기 직전 안타깝게도 뒤를 돌아보고 말았고 그 순간 에우리디케는 애처로운 눈빛을 남기며 저승 세계로 다시 끌려 들어간다. 오르페우스는 결국 그렇게 사랑하는 아내를 영원한 죽음 속으로 돌려보내야 했다.
예술은 순간을 버리고 영원을 선택하는 것
셀린 샴마 감독, 아델 아에넬, 노에미 메랑 주연의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바로 이 오르페우스의 신화를 변주하며 진행된다. 그 변주는 주체의 변주, 그리고 시선의 변주, 그리하여 마침내 해석의 변주를 동반한다. 영화 속에서는 신화의 주인공은 오르페우스가 아니라 그의 아내 에우리디케가 된다. 영화는 주인공들의 대화를 통해 이 영화의 중요한 주제가 그리스 신화의 비극을 여성의 관점에서, 여성의 시선으로 다시 해석하는 일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 재해석의 시도는 회화와 음악으로 대표되는 예술의 궁극적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예술은 결국 인간의 한계로는 붙잡을 수 없는 순간을 영원 속에 가두는 일이라는 것을. 그런 예술적 본질은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기로 선택하는 결정 속에서도 찾을 수 있음을.
제한된 인물과 공간, 제한된 시간 속에 제한된 사랑
18세기 프랑스를 시간적 배경으로 펼쳐지는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초상화를 그리는 여성 화가 마리안느(노에미 멜랑 역)가 원치 않는 결혼을 앞둔 귀족 아가씨 엘로이즈(아델 에넬 역)의 결혼 초상화를 의뢰받아 비밀리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 브리타뉴의 해변 마을에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제한된 공간 속에서 제한된 시간 간에 엘로이즈 모르게 그림을 완성해야 하는 마리안느는 비밀스럽게 그녀를 관찰하게 되면서 그 누구보다 한 여성으로서의 엘로이즈의 감정과 생각을 가장 깊게 이해하고 그녀의 모든 행동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런 세심한 관찰과 배려는 마리안느를 대하는 엘로이즈의 시선과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영화는 매우 제한된 공간을 배경으로 제한된 인물만을 등장시키면 진행된다. 이런 영화적 연출은 관객들이 극 중 인물들의 섬세한 감정 변화와 미묘한 연기에 더욱 몰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등장하는 짐꾼을 제외하면 영화 속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여성이라는 점은 이 영화의 지향점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명백히 드러낸다. 브리타뉴의 해변 마을에 있는 귀족의 저택이라는 제한된 공간을 배경으로 귀족 아가씨 엘로이즈와 그녀의 결혼식 초상화를 그리는 직업 화가 마리안느, 그리고 그녀들을 보살피는 어린 시종 소피(루아나 바야미 역)는 각자의 계급적 역할이 다르고 따라서 신분도 다르지만 여성이라는 보편성 속에서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고 연대한다.
사랑은 어떻게 영원히 기억되는가
화가로서 그림을 의뢰받고 왔지만 원치 않는 결혼을 앞둔 엘로이즈의 입장을 이해하고 친구가 되어주며 그녀의 심리 상태를 세밀하게 살필 줄 아는 마리안느, 곤경에 처한 마리안느를 위해 기꺼이 모델이 되어주는 엘로이즈, 생리통으로 괴로워하는 마리안느를 위해 따뜻하게 구운 콩을 준비해주는 하녀 소피, 그리고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된 소피의 낙태를 도와주는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연대는 계급과 신분을 뛰어넘는 아름다운 숭고한 연대인 것이다. 그리하여 영원히 기억 속에 남게 될.
영화 속에서 엘로이즈, 마리안느, 소피는 그리스 비극 오르페우스 신화를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죽은 오르페우스의 신화를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자신들의 이야기로 살려낸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사랑이 비극으로 끝난 것은 아내가 따라오는지를 보기 위해 뒤를 돌아본 오르페우스의 인내심 부족이나 의심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뒤를 돌아보라고 말했을지도 모를 에우리디케의 선택 때문일 것이라고. 어쩌면 에우리디케는 "뒤를 돌아봐. 그리고 후회하지 말고 기억해." 라고 말하며 오르페우스를 불러 세웠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오르페우스를 부른 에우리디케의 선택으로 두 사람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나지만 영원한 기억 속에 살아남는 것이라고. 시대와 신분을 초월한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사랑이 마리안느가 그린 엘로이즈의 초상 속에 영원히 담겨있듯이. 죽음도 18세기라는 시대적 한계도 갈라놓지 못한 에우리디케와 오르페우스의 사랑,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영원한 사랑은 그렇게 예술이 되어 그림 속에 남아 있다는 것을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영화 내내 침묵하다가 영화 마지막에서 마침내 강렬하게 쏟아지던 비발디의 사계는 우연히 재회한 두 사람의 감정의 격정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예술의 한 장르로서 음악의 본질 역시 순간을 영원 속에 포착하려는 예술적 초월성에 있음을 부각하려는 감독의 영화적 장치로 보인다. 그 기획은 적중하여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쏟아지듯 흐르는 비발디의 선율과 함께 우리에게 오래 각인된다. 엘로이즈를 바라보는 마리안느의 시선과 함께. 그렇게 이제 우리는 비발디의 사계를 들을 때마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감독: 셀린 시아마
출연: 아델 하이넬, 노에미 메를랑, 루아나 바야미, 발레리아 골리노, 크리스텔 바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