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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로츠뎀 Dec 24. 2019

같은 꿈을 꾸는 '윤희에게'

임대형 감독, 김희애 김소혜 나카무라 유코 주연 영화 <윤희에게>


그럴 때가 있다. 긴긴 겨울밤 알 수 없는 이유로 한밤 중에 잠에서 깨어나 소리 없이 쌓이고 있는 눈발을 바라보게 되는 날. 끝끝내 아침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 일어난 날,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해버린 길을 걸으며 문득 안부가 궁금해지는 사람이 가슴에 차오르는 날. 잘 지내고 있는지? 하루 종일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도 머릿속에 맴도는, 가슴에 머금은 아련한 통증 같은 궁금증. 잘 지내고 있는지? 그렇게 문득 그 사람의 안부를 묻는 편지를 보내고 싶을 때가.


누군가의 안부가 궁금해지는 눈 오는 날



"윤희에게.

잘 지내니? 오랫동안 이렇게 묻고 싶었어.

너는 나를 잊었을 수도 있겠지.

벌써 20년이나 지났으니까.

갑자기 너한테 내 소식을 전하고 싶었나 봐.

살다보면 그럴 때가 있지않니.

뭔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질 때가.

......

오랫동안 네 꿈을 꾸지 않았는데, 이상하지.

어제 네 꿈을 꿨어.

나는 가끔 네 꿈을 꾸게 되는 날이면 너에게 편지를 쓰곤 했어.

......

망설이다 보니 시간이 흘렀네.

나는 비겁했어.

너한테서 도망쳤고, 여전히 도망치고 있는 거야.

머지않아 나는 아마 또 처음인 것처럼 이 편지를 다시 쓰게 되겠지?

.....

바보 같은 걸까? 나는 아직도 미숙한 사람인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아무래도 좋아.

나는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내가 부끄럽지 않아."



영화 <윤희에게>는 우연히 배달된 편지에서 시작된다

영화 <윤희에게>는 윤희의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 쥰(나카무라 유코 역)이  20년 전에 헤어진 윤희에게 쓴 편지에서 시작한다. 눈이 많이 내리는 일본 홋카이도의 오타루에서 비혼인 고모와 함께 사는 쥰은 편지에서처럼, 어쩌면 도망치듯 윤희를 떠나왔다는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며, 그리울 때마다 윤희에게 부치지 못하는 편지를 썼다.  헤어진 지 20년 동안 서로 연락을 끊었고, 그리울 때마다 편지를 썼음에도 그 편지들은 부쳐지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윤희와 쥰의 이별은 서로에게 여전히 아물지 못하는 상처로 남아있고, 아마도 그 상처는 자신들의 선택이라기보다는  타인의 간섭에 의해 강요된 것일지 모른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영화는 우연히 배달된 편지에서 시작된다


아버지의 죽음 뒤에 집에 돌아와 윤희를 그리워하며 윤희를 생각하는 꿈을 꾸는 쥰, 남편과 이혼하고 혼자서 어린 딸을 키우며 삼촌에게 '짐'이 되지 말라고 딸을 꾸짖는 윤희의 잔잔한 호통에서 윤희와 쥰의 사랑과 이별 뒤에는 가족들의, 어쩌면 부당한 간섭과 지나친 개입이 있었고, 그 과정은 서로를 할퀴는 상처로 깊게 남았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윤희와 쥰이 다시 만나게 되는 것도 가족의 구성원인 쥰의 고모와 윤희의 딸 새봄의 따스한 개입 덕분이다. 고모는 쥰이 스스로 부치지 못하는 편지를 대신 보내줌으로써, 새봄은 엄마에게 배달된 편지 속에서 엄마의 행복을 찾아 줄 단서를 발견하고 그 편지의 발신지인 오타루로의 여행을 계획함으로써.   

그곳에는 엄마의 첫사랑이 있다





영화 <윤희에게>는 아련한 엄마의 첫사랑을 딸이 되살려내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어느 날 엄마 윤희(김희애 역) 앞으로 일본에서 온 편지를 몰래 읽어 본 새봄(김소혜 역)은 이 편지 속에서 엄마의 이혼과 외로움의 합당한 근거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막연히 느낀다. 그리하여 새봄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딸과 엄마의 '모녀 여행'을 가장하여 엄마를 편지의 발신지인 오타루로 이끈다. 그리고 엄마의 첫사랑을 다시 만나게 될 그 여행에 동행한다. 그곳에서 엄마가 20년 만에 만나게 되는 엄마의 첫사랑은 윤희와 가족을 멀어지게 만든 원인이자 불편함의 기원이 된 사랑이었다. 그러나 윤희에게 그 첫사랑은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오타루의 눈처럼 순백의 기억으로, 투명한 아픔으로 남아 있는 사랑이고, 달이 차면 기울고 일그러지다가 다시 때가 되면 부풀어 오르기를 반복하는 결코 완성되지 못하는 영원한 미완의 사랑이었다.


첫사랑의 기억을 찾아 나선 윤희(김희애)


그 첫사랑 이후 엄마의 삶은 외로움과 헛헛함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가족의 반대로 사랑을 잃었고, 가족의 강요로 이성과의 결혼과 새봄의 출산을 감내했으나 결코 윤희 자신의 삶과 사랑이 되지 못했을 시간들. 오타루에서 온 편지는 그 첫사랑의 기억을 불러내 윤희의 마음에 다시 그 첫사랑의 설렘을 조심스레 되살린다.  그리고 그 과정에 윤희의 딸 새봄은 적극 개입한다. 아직 어리지만 이젠 자신의 사랑을 스스로 가꿔나갈 만큼 커버린 새봄은 엄마의 외로움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누군가에게 짐이 되길 싫어하는 엄마의 성격을 닮았다.  그런 새봄과 윤희는 엄마의 첫사랑이 살고 있는 오타루에서 서로의 흡연 사실을 커밍아웃한다.  

윤희의 동반자 새봄(김소혜)




영화 <윤희에게>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같은 곳을 향하는 사람들에 관한 영화다.

윤희와 쥰은 서로를 깊이 사랑했지만 그 사랑이 보통의 취향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존중받지 못했던 상처를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아마도 가족이라는 이름의 가장 '가까운 타인'들이 그들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가족이란, 거리는 가깝지만 가장 멀리 느껴지는 존재일 수도 있기에,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큰 상처를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이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여전히 같은 꿈을 꾸고 같은 달을 바라본다. 달을 닮은 이들의 사랑은 화려하게 빛나지는 않지만 그윽한 빛을 내뿜는 사랑이고, 조금씩 차오르고, 또 조금씩 비어지기도 하는 달의 모습은 다양한 감정과 다양한 모습의 사랑을 비유하는 것은 아닐까? 멀리 떨어져 있어도 같은 달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여전히 같은 꿈을 꾸고 서로를 그리워한다. 우연히 20면 만에 전해진 편지는 두 사람의 감정을 살려 낼 수 있을 것인가? 윤희는 쥰에게 보내는 추신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도 같은 꿈을 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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