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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로츠뎀 Sep 06. 2019

벌새,
단단해 보이는 것들의 무너짐

김보라 감독, 박지후  김새벽 주연의 영화 <벌새>를 보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미래의 은희일지도 모르는 영지는 은희에게 쓴 마지막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 말속에는 김보라 감독의 세계관과 인생관, 감독이 영화 <벌새>를 통해 보여주고 싶어한 핵심 주제가 녹아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 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은희가 만나는 사람들에 관한 영화

김보라 감독의 영화 <벌새>는 그런 '알다가도 모르겠는' 세상에서 자기 또래 아이들처럼 자신도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여자 중학생 은희의 이야기이다. 영화는 중학생 은희가 만나는 사람들을 한 명씩 한 명씩 있는 그대로 소개하면서 전개된다. 그 사람들 중에는 영지나 수희, 지완, 유리처럼 은희와 상당히 친밀한 관계인 사람도 있고, 그냥 얼굴만 알고 지내는 사람도 있고, 그냥 우연히 가족이라는 이유로 함께 사는 사람들도 있다.  피를 나눈 가족은 은희에게 오빠처럼 폭력을 가하는 존재이거나 '다들 먹고살기 바빠서' 관심 없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어쩌면 영화 첫 장면처럼 아무리 두드려도 대답 없는 엄마와 열리지 않는 문과 같은 존재들일 지도 모른다. 

1994년을 살아가는 중학생 은희에게는 얼굴을 아는 사람은 한 200명쯤 되지만 마음까지 아는 사람은 아마도 자신이 다니는 한문학원 선생님 영지뿐이었을지도 모른다. 늘 같이 다니던 단짝 친구 수희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배신할 수 있고, 남자 친구 지완이는 은희가 완전히 의지하기에는 아직 미숙하고, 자신을 좋아한다던 후배 유리의 사랑도 한 학기용일 뿐이다. 어쨌거나 영화 <벌새>는 은희 주변의 사람들을 통해 은희를 드러내는 영화다.


상처와 기쁨을 함께 나누는 존재들에 관한 영화

은희 주변의 이 사람들은, 겉으로는 단단해 보이지만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던 1994년의 한국 사회를 은희와 함께 살아간다. 1994년을 살던 은희의 세계는 가정과 학교, 사회에서 학벌주의의 병폐, 가부장제의 문제점, 재개발의 폭력성, 성장 제일주의의 한계가 드러나던 시기이다. 그 세계 속에서 은희는 때론 아빠와 오빠의 가부장제적 폭력에 저항을 포기한 채 숨을 죽인 채 살아야 했고, 오직 성공과 성취만이 최상의 가치로 인정받는 가정과 학교에서 특별히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은희는 별다른 이유 없이 '날라리' 학생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대치동 아파트로 상징되는 획일적인 주거공간 안에서 은희는 오빠의 폭력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채 살아가지만 가족과 사회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어 나름의 몸짓으로 소리치고, 버둥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족들 누구도 은희의 이 힘겨운 버둥거림에 대답하지 않지만. 사실, 엄마와 아빠, 오빠와 언니, 한문학원 선생님 영지와 친구 수희, 지완, 유리 모두 자기에게 가해지는 가정과 사회의 압력을 견디며 버둥거리고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 <벌새>는 은희가 그 사람들과 함께 상처와 기쁨을 나누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은 영화다.

  

모든 것은 흔적을 남긴다

그러던 은희가 다니던 한문학원에서 대학생 영지를 만나면서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난 기쁨을 얻고 자신이 사는 세계에 대한 이해를 넓혀간다. 영지가 가르쳐준 한자. 


상식만천하 지심능기인(相識滿天下 知心能機人)처럼 . 

서로 얼굴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가득하지만 마음까지 아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그 말을 통해 영지는 자기 주변의 사람들의 마음을 더 깊게 이해하는 법을 배우고, 그들과 더 깊게 교감하는 법을 배운다.  자기 주변의 사람들과 사물들을 조그만 더 깊게 들여다보면 얼핏 보이는 것과는 또 다른 면들이 보인다는 것을. 담배 피우는 영지가 사실은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듯이. 언제나 함께 하고 배신하지 않을 것 같던 친구도 때로는 자신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을. 단단해 보이는 것들이 오히려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것을. 세상 일엔 나쁜 일과 좋은 일이 함께 올 수도 있으며,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을. 그 나눔의 과정은 서로에게 흔적과 파편을 남긴다는 것을. 

그것이 우리의 삶이란 것을. 영화 <벌새>는 우리 삶이 그런 흔적으로 가득함을 보여주는 영화다. 


단단해 보이는 것들이 무너지는 세계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그 황당한 무너짐으로 딸 영지를 갑자기 잃은 영지 엄마의 "어떻게 그 튼튼한 다리가 무너지니.."라는 탄식처럼 그 무너짐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단단하고 견고해 보이던 것들이었다. 그 후 1년 뒤 삼풍백화점이 무너졌고. 또 그 후 몇 년 뒤 1997년 외환위기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 경제가 무너졌다. 그토록 단단해 보이던 재벌과 대기업, 은행과 투자회사가 IMF 구제금융이라는 먹구름 속에서 믿기 어려울 정도로 무기력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 무너짐 뒤에는 성장과 결과, 성공과 실적만을 최우선으로 평가하는 '성공 제일주의'의 신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영화 <벌새>는 그 단단해 보이는 것들의 무너짐에 관한 영화다. 

 

모처럼 여운이 오래 남는 영화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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