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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로츠뎀 Dec 20. 2018

세상에 처음 나온 그림들

우리에게 처음 다가오는 것들을 우리는 왜 이해하기 어려운가

우리가 처음 만나는 것들, 우리에게 처음으로 다가오는 것들을 이해하기 어려워하고 심지어 그런 낯선 것들을 두려워하는 것일까요?


마네의 <올랭피아>와 파리의 위선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캔버스에 유채 / 130.5×190㎝ / 1863년 제작 / 오르세 미술관, 파리
입체감이 사라져 그림의 기본조차 안돼 있다.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1832~1883)가 1865년 살롱전에 출품한 <올랭피아>를 처음 본 당시 파리 시민들의 반응입니다. <올랭피아>는 이렇듯 당시 대중들에게 엄청난 비난과 조롱, 반감과 거부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심지어 분노한 시민들이 작품을 훼손할 것이 우려되어 전시 관계자는 마네의 이 작품을 막대기로도 닿을 수 없는 높은 곳으로 자리를 옮겨 전시해야 할 지경이었습니다.

마네의 <올랭피아>는 그 작품명에서부터 논란거리였습니다. ‘올랭피아’는 당시 파리의 고급 창녀들을 일컫는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1848년에 발표된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춘희》에 등장하는 매춘부의 이름도 '올랭피아'였습니다. 즉, 마네는 여신이나 요정이 아닌 일반 여성, 그것도 창녀의 벗은 몸을 그렸던 것입니다. 당시에는 신화가 아닌 일반 여성의 벗은 몸을 그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림 속 여성의 지극히 현실적인 몸매와 침대에 비스듬히 누운 그녀의 뻔뻔하고 노골적인 시선 또한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동안 사람들이 보아왔던 그림 속 여성의 몸은 신비하고 이상화된 여신이나 요정의 눈부신 육체였던 것입니다. 마네 이전의 화가들이 그린 그림 속의 여신 비너스의 몸은 탄력적이고 입체적이며 매우 세련된 완벽에 가까운 굴곡을 드러내 줍니다.   알렉상드로 카바넬이 그린 <비너스의 탄생>이나 윌리앙 아돌프 부그로가 그린 <비너스의 탄생>에 등장하는 비너스가 그 전형적이 예입니다. 

캔버스에 유채 / 130×225㎝ / 1863년 제작 / 오르세 미술관, 파리


윌리앙 아돌프 부그로가 그린 <비너스의 탄생>


마네가 그린 <올랭피아>는 여신들의 몸과는 완전히 상이한 현실적이고 초라한 여성의 몸입니다. 

사실 마네는 자신이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서 본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참조해서 <올랭피아>를 그렸습니다. 두 그림을 비교해 보면, 그림 속 두 여성의 자세는 예전부터 화가들이 그려오던 전형적인 여신의 자세입니다. 하지만 <우르비노의 비너스> 속의 시종은 흑인 시녀로, 개는 고양이로 바뀌어 있습니다. 당시 프랑스어에서 '암고양이'는 성기나 매춘 등을 암시하는 은어였고, 흑인 시녀가 들고 있는 꽃다발은 분명 손님이 전달해 달라고 부탁한 것임을 쉽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즉, 마네는 노골적으로 자신의 <올랭피아>가 창녀임을 사람들에게 부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마네가 살았던 인구 170만의 나폴레옹 3세 시절 파리에는 공식적으로 약 5,000명, 실제로는 어림잡아 약 12만 명의 매춘부 존재했다고 합니다. 당시 파리는 매춘과 매음이 성행하는 육체적 환락과 말초적 욕망의 도시였던 것입니다. 어쩌면 <올랭피아>가 당시 파리 시민들에게 그토록 엄청난 반감을 샀던 것은 자신들의 이런 치부를 그림 속에서 느껴야 했던 불편함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티치아노 〈우르비노의 비너스〉      캔버스에 유채 / 165×119㎝ / 1538년 제작 /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식사〉      캔버스에 유채 / 208×264.5㎝ / 1863년 제작 / 오르세 미술관, 파리
야만스럽고 속물적이다.
거장들의 위대한 작품을 형편없는 주제와 실력으로 베꼈다.

또 다른 마네의 걸작 <풀밭 위의 점심식사>에 대한 관객들의 비난입니다.

이 그림은 <올랭피아>보다 먼저 마네가 사롱 전에 출품했다 역시 엄청난 비난을 사고 낙선한 작품입니다.

이 그림 역시 전통적이 누드화와 달리 세세한 명암의 변화를 꼼 꼭 하게 포착하지 않고 거칠고 투박하게 창백한 여성의 육체를 대중들에게 보여줍니다. 인상파의 선구자였던 마네의 눈에는 자연광이나 강하게 내리쬐는 빛 속에서 여인의 몸은 이렇듯 거친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까왔을 것입니다. 수수한 옷차림의 두 젊은 남자 앞에 수치스러움을 전혀 느끼지 않는 알몸의 여자가 물끄러미 관람자를 응시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 앞에선 관객은 그 태연한 시선 앞에서 오히려 자신들이 수치심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마네는 이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그리기 위해 라파엘로의 도안을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가 판화로 제작한〈파리스의 심판〉의 한 부분과 티치아노와 조르조네의 작품 〈전원의 합주곡〉을 미리 연구했고 그 작품들을 참조하여 자신의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관객들은 거장의 작품을 형편없이 망쳐버렸다고 마네를 비난했던 것입니다.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 〈파리스의 심판〉      동판화 / 28.6×43.3㎝ / 1515~1517년 제작 / 파인아트 미술관, 샌프란시스코


티치아노와 조르조네 〈전원의 합주곡〉캔버스에 유채 / 105×137cm / 1509년경 제작 / 루브르 박물관, 파리




쿠르베의 <오르낭의 매장>315×668㎝ / 1849~1850년 제작 / 오르세 미술관, 파리
“내게 천사를 보여다오, 그러면 천사를 그리겠다.” 


마네보다 조금 앞선 시기인 19세기 중엽 파리에서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가 이 작품으로 사실주의의 시작을 알렸을 때 평단이나 관객들의 반응은 매우 거칠었습니다. 전시회 장 한 벽면을 꽉 채운 <오르낭의 매장>에 대해  “농부의 죽음에 이렇게 많은 양의 물감을 써야 했느냐.” 는 비난부터,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더럽고 괴상한 것을 최악의 추악으로 나타낸 것"이라는 매도가 뒤를 이었습니다.  신화 속의 인물도  아니고 고대의 영웅도 아닌 평범한 시골 농부들을 이렇게 거대한 화폭에 담담히 담아낸 화가는 일찍이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의 평단과 관객의 격렬한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사실주의의 선구자였던 쿠르베는 당시의 지배적인 화풍이던 신고전주의에 반기를 들어, 존재하지도 않은 고대의 신화 속 이상이나 교훈 대신에 시골 농가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상 중 하나를 과감히 큰 화폭에 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쿠루베의 작품 <오르낭의 매장>은 그래서 종종 당시 사롱 화가를 대표하는 마네의 스승 토마 쿠튀르(Thomas Couture, 1815~1879)의 작품〈쇠퇴기의 로마인들〉과 비교됩니다. 이 그림을 보면 쿠르베의 작품과 달리 주인공들의 몸매는 고대 그리스 신화 속 영웅들처럼 지극히 이상화된 매우 균형 잡힌 몸매를 보여줍니다. 또한 고대 로마풍의 건축물과 조각상을 배경으로 향락에 빠진 로마인들의 모습을 그려 후대인들에게 결국 로마 몰락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라는 큰 가르침을 주려는 목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로마를 멸망시킨 게르만족 두 명을 오른쪽에 배치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이렇듯 쿠튀르의 작품은 당시 주류 화풍이던 아카데믹한 역사 화풍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쿠루베의 그림 속에는 영웅적인 주인공도, 역사적인 교훈도 사라지고 단지 소소한 시골 마을 장례식의 슬픔만 남아있습니다. 


토마 쿠튀르 〈쇠퇴기의 로마인들〉      캔버스에 유채 / 472×772㎝ / 1847년 제작 / 오르세 미술관, 파리


“<인상, 해돋이>? 인상이라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다고 이 작품에 인상이 존재하는지는 의문이다. 붓질에 나타난 자유와 편안함이라니! 제작 초기의 어설픈 장식 융단조차도 이 해안 그림보다는 더 섬세할 것이다!”
- 루이 르루아-


이 말은 클로드 오스카 모네(Claude-Oscar Monet, 프랑스, 1840~1926년)가 1872년 <인상, 해돋이>라는 작품을 세상에 처음 내놓았을 때, 보수적이었던 평단으로부터 받았던 비아냥입니다. 그림 제목을 비꼬며 이 그림은 하나의 완성된 작품이 아니라 그저 한낱 붓놀림이나 사물에 대한 단편적인 인상일 뿐이라는 조롱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평단의 조롱에서 바로 '인상주의'(impressionism) 말이 유래합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이게 그림이냐?"라는 조롱을 받았던 모네의 <인상, 해돋이>는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걸작이 됩니다.  모네는 이 작품 속에서 빛의 강약과 주변 사물의 반사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항구마을의 풍경을 포착해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처음 등장 당시에는 엄청난 비난과 반발, 조롱과 멸시를 받았던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미술작품들은 쿠르베와 마네, 모네 이후 서양 미술사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해 한 시대를 장식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인상주의 미술 작품은  다른 그 어떤 미술 작품들 보다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작품들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인상, 해돋이>48x63cm         1872년,  클로드 오스카 모네(Claude-Oscar Monet) 프랑스


          

우리는 왜 우리에게 처음으로 다가오는 것들을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요? 인간은 왜 처음 보는 일, 새로운 생각과 시도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과 거부감을 갖는 것일까요?  쿠르베의 <오르낭의 매장>, 마네의 <올랭피아>와 <풀밭 위의 점심식사>, 모네의 <인상, 해돋이>를 처음 보았던 당대의 파리 시민들이 그랬듯이 우리는 기존의 지배적인 분위기와 다른 방식과 시도를 쉽게 이해하지 못하고 반감을 갖기 쉽습니다.  


Aller Anfang ist schwer. "모든 시작은 어렵다."라는 독일 속담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과 외양이 상이한 낯선 존재를 처음 만났을 때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본능입니다. 익숙하지 않은 것은 불편하고 거북하고 충격적입니다. 예전에도 그랬듯이 우리에게는 새롭고 낯설고 충격적인 것들, 익숙하지 않고 기존의 통념과는 상이한 낯선 새로운 관념들이 여전히 다가옵니다. 그것은 우리 공동체 구성원이 아닌 외부의 낯선 존재일 수도 있고, 우리 공동체 내에서 기존에는 자신의 생각과 존재 드러내지 않았던 대상일 수도 있고, 새로운 변화일 수도 있고, 기존의 지배적인 관념과 인식과는 다른 새로운 사고, 새로운 관념일 수도 있습니다. 과거의 우리가 막연하게 느끼는 두려움과 낯섦을 극복하지 못하고 마음의 빗장을 걸고 기존의 사고방식에 안주했다면 지금의 우리는 인상파의 수많은 아름다운 그림들과 빛나는 예술작품들을 볼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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