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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로츠뎀 Dec 20. 2018

어느 원칙주의자의 사랑

하네스 홀름 감독의 영화 <오베라는 남자>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원칙은 불가피한 것일까?

좋은 원칙이란 어떤 원칙을 의미하는 것일까?   


한 중년(?)의 남자가 아내의 무덤 앞에 장미 두 다발을 들고 서있습니다. 주름 가득한 얼굴엔 사랑하는 사람을 모두 잃은 자의 슬픔과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은 삶에 대한 깊은 냉소가 배어 나옵니다. 오베라는 59세의 이 남자는 지금 얼마 전에 죽은 아내의 무덤 앞에서 자신도 곧 뒤따라 가겠다고 맹세를 하는 중입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여러 방식으로 죽으려 애써봅니다. 그러나 아무리 죽으려 애써도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꼭 방훼꾼들이 등장해 결정적 타임을 놓치고 맙니다. 죽기가 살기보다 더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 짧은 무의식의 순간에 아스라이 떠오르는 행복했던 삶의 기억들. 

오베는 어머님의 죽음을 통해 삶이 죽음과 연결되어 있음을 어렴풋이 알았고,

아버지를 통해 근면한 노동과 성실, 정직이라는 삶의 원칙을 몸에 익혀 살아왔습니다.  

부당한 이익을 탐하지 않았기에 기차 안에서 주운 지갑도 함부로 갖지 않았고,

아버지가 죽은 뒤에 받은 월급은 회사에 다시 돌려주려 할 정도로 오베는 어떤 의미에서 '지나친' 원칙주의자였습니다.

그래서, 거주자 우선구역엔 차량이 들어오면 안 된다는 원칙을 어떤 상황에서도 고수하려 애를 썼고,

심지어 자신이 응급차에 실려가게 된 위급생황에서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그런 오베의 확고한 원칙주의는 이웃들과 때론 가벼운 마찰을 빚기도 했습니다. 

차는 '볼보'가 아니라 '사브'를 타야 한다는 다소 허세작렬 원칙에서부터

빌려간 물건은 반드시 기한 내에 돌려줘야 한다는 원칙, 

길가에 함부로 개인 물건을 방치해 두어선 안된다는 원칙,

정해진 시간만큼만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돌아와야 한다는 아주 사소한 원칙에 이르기까지.

오베는 지극히 까다롭고 까칠한 원칙주의자입니다.

그래서 오베는 자신이 소중히 생각하는 이런 원칙들을 지키지 않는 요즘 이웃들과 요즘 세대가 도무지 마땅치 않고 이해되지 않습니다. 두 다발에 70크로네인 장미가 한 다발만 사면 왜 35크로네가 아니라 40크로네가 되는 건지, 원 플러스 원 행사를 오베는 이해할 수 없었고. 평생을 성실함과 정직함으로 살아온 자신을 하루아침에 해고하려는 젊은 경영진을 이해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찾아온 갑작스러운 불행과 시련들을 이해할 수 없어 스스로 세운 자신만의 원칙에 갇혀 살아갑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 보면 오베가 자살에 실패할 때마다 보여주는 회상 장면을 통해 오베가 원칙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우리는 조금씩 알게 됩니다. 


오베는 드디어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마치던 날 평생 철도노동자로 성실하게 살아온 아버지를 기차 사고로 잃었고, 자신이 직접 배우고 익힌 기술로 자신의 노동을 쏟아부어 만든 집을 화재사고로 잃었고, 운명처럼 다가와 유일하게 자신의 내면과 진가를 알아봐 준 사랑하는 소냐와 아이를 가져 가장 행복하던 순간에 교통사고로 아이를 잃고, 소냐는 불구가 되는 시련을 겪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할퀴고 간 불운과 사고는 오베로 하여금 결국 운명의 무자비함과 예측 불가능성에 맞서 살아갈 방법은 사소할지라도 원칙을 지키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최소한의 안전수칙과 운전 규칙을 준수했더라면 자신의 행복을 뺏어간 이런 사고들은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나 오베의 삶에서 이런 '원칙주의'는 역설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오베가 이웃들과 자주 다투게 되고, 자신을 절친 르네와 소원해지게 만들고, 그 친구를 이제 가족들로부터 격리시키려 하고, 자신의 집을 뺏어간 것도 '어떤' 원칙주의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남자라면 자동차는 꼭 '사브'를 타야 한다는 오베의 원칙은 한때의 절친 르네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만들었고, 부양능력이 없는 가정의 장애인은 국가가 격리해서 돌봐야 한다는 획일적인 장애인복지의 원칙은 이제 그 절친을 가족에게서마저 빼앗으려 하고 있으며, 새로 정해진 건축 규격에 맞지 않는 건축물은 모두 철거해야 한다는 공무원의 관료주의적 행정 원칙은 자신의 소중한 집을 빼앗아 갔던 것이죠.

원칙 없이 살아가기에는 삶과 운명이 너무 가혹하고, 획일적인 원칙만 고수하려는 사람들 때문에  삶은 너무 거칠고 팍팍해지는 '원칙주의'의 아이러니. 이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 오베라는 남자를 통해서 우리가 원칙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지를 묻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답을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인 소냐를 통해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소냐의 원칙은 그녀 제자의 입을 통해 영화에서 전해지는데  다름아닌 '항상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을 돕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원칙은 오베가 이웃에 이사 온 이란계 다문화 가정, 성 소수자인 아내의 제자들과 뜻하지 않게 접촉하는 과정에서 점차 다른 원칙들을 다 포기했음에도 유일하게 놓지 않은 원칙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사회와 공동체가 진화해 감에 따라 사람들은 그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좋은 원칙과 기준들을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우리가 원칙을 만드는 본연의 이유인 공동체의 '사람'과 삶이 무너져 내린다면 그렇게 세워진 원칙과 기준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오베의 사소하지만 '중요한' 원칙들이 오베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웃사람들과의 원치 않았던 접촉을 통해 조금씩 무너져 가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소통해 나가듯이, '원칙'은 궁극적으로 '사람'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획일적이며 균일한 대상이 아니라 이질적이고, 무기력할 수 있고, 소수일 수 있지 않을까. 

<오베라는 남자>를 보는 내내 드는 생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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