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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로츠뎀 Oct 17. 2020

소박한 부정선거의 시작?

대한민국 부정선거 잔혹사 02 _ 이승만의 발췌개헌과 2대 대선 



우리 현대 정치사에서 주목할 만한 부정선거로 기록된 최초의 사례는 이승만 정권 때 치러진 제2대 대통령 선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게임의 룰이라 할 수 있는 선거 관련 법규범들의 제정 과정부터 부정과 초헌법적 조치들로 얼룩졌다. 1952년 8월 5일 실시된 제2대 선거는 우리나라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 선거였다. 1948년 제정된 제헌 헌법은 국회에서 간접선거를 통한 대통령 선출방식을 규정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2대 대통령 선거도 간접선거 방식에 의해 치러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1950년 5월 30일 치러진 제2대 국회의원 선거가 이승만 정권에 우호적이지 않은 중도파 민족주의 세력의 압승으로 끝나 최초의 여소야대 국회가 되었고, 이런 국회 세력 구도하에서는 자신의 재선이 불가능함을 분명하게 알게 된 이승만은 재집권을 위해 대통령 직선제로의 헌법 개정을 무리하게 추진했던 것이다.




2대 대통령에 취임한 이승만




발췌 개헌을 통과시키기 위해

먼저 정부가 제안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이 국회에 의해 부결되자, 이승만 정권은 그동안 연기되어 왔던 지방자치선거를 갑작스레 실시하기로 전격 결정하여 1952년 4월과 5월 시읍면 의회 선거 도의회 선거를 실시한다. 이는 제헌헌법에 규정된 지방자치를 구현하여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행하려는 순수한 목적보다 친이승만 세력으로 구성한 지방의회와 지방의원들을 진정한 민의의 대변인이라며 국회의원에 대한 압력의 도구로 사용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관철시키려는 이승만의 정치적 노림수의 성격이 더 강했다. 실제 이승만은 정부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반대한 국회의원들을 국민이 소환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초헌법적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또 이런 이승만 정권의 노선을 충실하게 따르는 지방의회 의원들의 국회의원 소환 시위가 국회의사당 앞에서나 부산시내 전역에서 연일 이어졌다. 

지방의원들의 초헌법적 국회의원 소환시위




한국전쟁 당시 수도였던 부산에서 발생한 정치 파동

심지어 이승만은 1952년 5월 자신의 심복인 이범석을 내무부 장관에 앉히고 부산을 포함한 경상남도와 전라남북도 일대에 비상계엄을 선포하더니 자신의 개헌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출근하는 국회의원 48명을 헌병대로 끌고 가는 만행을 저지른다.  야당 의원 10여 명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체포당하고 경찰과 헌병들이 국회를 포위한 살벌한 상황에서 결국 국회는 7월 4일 정부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과 국회의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일부 발췌한 이른바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킨다. 바로 이렇게 절차적 정당성도 없고 누더기처럼 통과된 '발췌헌법'에 따라 실시된 선거가 제2대 대통령 선거였으니 이것이 우리나라 부정선거의 효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국회의원 통근버스를 통채로 헌병대로 끌고간 부산파동



직선제 대통령제를 선전하는 선거포스터



졸속으로 치러진 제2대 대통령 선거

강압과 위협에 못이겨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키는 국회의원들



또한 2대 대선은 발췌개헌안이 통과되자마자 7월 26일 후보자 등록을 서둘러 마치고 선거운동 기간은 겨우 8일에 불과했다. 국민들이 선거에 출마하는 후보자의 면모나 공약을 파악할 시간적 여유조차 주지 않고 졸속으로 치러지게 된 것이다. 게다가 집권 자유당에서는 대통령 후보에는 이승만, 부통령 후보에는 이범석을 지명했지만 이승만은 이를 거부하고 자신은 이번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사양하는 모양새를 취하더니 후보자 등록 다음날에 담화를 통해 자신의 재집권을 위해 자신이 일으킨 부산 정치 파동을 오히려 자신을 몰아내려는 세력이 일으킨 정치파동이라고 호도하면서 자신은 민의에 따라 입후보한다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자유당이 지명한 부통령 후보 이범석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국민들은 잘 알지도 못하는 전직 심계원장(지금의 감사원에 해당) 함태영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어이없는 일까지 벌인다. 이는 이범석의 세력이 커져 자신의 잠재적 경쟁자로 등장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노회한 정치인의 술책이었다. 



제2대 대통령선거




우리나라 최초의 관권 선거

 이렇게 후보자 지명과 입후보 절차도 투명하지 않았고 선거운동 기간도 지극히 짧아 제대로 된 정책대결을 펼치기 힘들었던 2대 대선은 그 진행과정에서도 경찰과 공무원의 엄청난 불법행위가 동원된 우리나라 최초의 주목할만한 대규모 관권선거였다.  이에 대해 당시 대표적 지식인인 김준연 씨는 한 언론 기고문을 통해 대표적인 부정선거 사례로 다음과 같은 사건들을 제시한다. 


첫째, 경찰이 자정이 지나면 이승만과 함태영 후보자의 선거벽보를 제외한 다른 선거벽보는 모두 제거한다.

둘째, 투표소에서는 참관인이 이승만과 함태영 후보자 기호 아래 기표할 것을 콕 집어 요구한다.

셋째, 어떤 투표소에서는 30~50명에 이르는 결석 인원의 표에 참관인들이 무인을 찍어 출석한 것으로 가장하여 이승만, 함태영 후보자에게 투표한다.

넷째, 어떤 지역에서는 이승만, 함태영 후보자를 제외한 다른 후보자의 선거벽보나 현수막을 전혀 게시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 선거였던 제2대 대통령 선거는 이렇듯 이승만 정권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경찰과 공무원의 불법행위가 대규모로 자행된 최초의 관권선거이자 부정선거였다. 그러나 이후 이승만 정부와 그 뒤를 이은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이 자행한 부정선거에 비하면 이번 선거는 '아름다운' 수준 아니면 '초보적'인 수준의 부정선거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후 우리 선거사에서는 훨씬 더 자극적이고 기묘한 부정선거의 작태들이 속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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